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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5.18. 주일오전 -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 75)



막1533to39 - 성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7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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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5장 33-39절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닮아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대신 값을 치르는 대속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한 권사님께서는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반드시 할 필요가 없었던 일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했노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거니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내어 놓고 꼭 해야하는 필요 이상의 사랑과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 결국 그 누구도 유익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풍성함과 감사, 그리고 기쁨이 사라진 푸석 푸석한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도 그런 세상 가운데서 살게 되지요. 우리는 충분히 우리 자신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에 머물면서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각박해 져서 요즘은 그 정도만 해도 잘 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우리 주님이 우리가 살아내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맡기신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삶과 죽음을 흉내내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의 향기와 색깔이 들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삶의 자리를 점점 더 풍성한 생명의 땅으로 가꾸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저 이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시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온 세상을 구속하는 일에 아름다운 역할을 감당하며 또한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영원히 누릴 하늘 영광을 더욱 더 크고 빛나게 만들어 가기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너무 움켜쥐고 쌓아 놓으려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전혀 대속적인 삶이 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영광도 빛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세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한 장면 한 장면 그림을 그리듯이 마음에 그리면서 찬찬히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은 골고다, 그러니까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의 한 가운데서 당신의 보혈을 모두 흘려 주셔서 세상에 영생을 선물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처음 세 시간은 그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욕하는 가운데 다른 날의 같은 시간과 별 다를 것 없이 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 제 6시 그러니까 정오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해가 중천에 떠서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 시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온 세상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제 9시 그러니까 오후 세시까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간 동안의 갑작스럽고 자연스럽지 않은 어둠. 이것이 오늘 본문의 첫번째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온 세상을 캄캄하게 만드렸을까요? 그 어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선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 해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 말씀하는 아모스서 8장 9절과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갑작스런 어둠은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신다는 징조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이유는 항상 사람들의 죄악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 날은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의 죄를 심판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 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에 대해 진노하고 계셨고, 또 그 죄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노의 심판을 당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심판을 당한 것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대신에 예수님께 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의 어둠은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의 슬픔과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대신에 죄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진노와 형벌을 퍼 부어야 하는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진노와 형벌을 그 가냘픈 인간의 몸으로 다 받아 내야만 했던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슬픔과 고통이 어둠이 되어 한 낮의 강렬한 태양마저 빛을 잃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세 시간의 첫번째 장면은 바로 이러한 어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두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암흑 속의 세 시간이 지나고 제 9시, 그러니까 오후 세 시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온 세상을 덮었던 어둠은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이 세상은 다시 빛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어둡던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을 버리셨을까요? 거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을까요? 사람들은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드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지 진짜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으며,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색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 외침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거기서 다윗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 중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똑같은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고 그거 그것을 하나님께 하소연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 시간 동안, 아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부터 숨을 거두시기까지 여섯 시간 동안은 반드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야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형벌을 대신 당하는 그런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형벌을 온전히 모두 다 쏟아 부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퍼 부으실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형벌이 남지 않게 되고, 그래야 우리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실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온전히 버리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그리고 형벌은 참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우리 주님의 이 절규는 단순한 고통스러운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하소연 하는 것도 아니었구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겪어내셔야 했던 고통스러운 현실 그대로 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섯 시간, 그리고 암흑만 계속되던 그 세 시간이야 말로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함께 해 주심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진 삶과 사역, 그리고 사람들의 적대감과 오해를 감당하실 수 있으셨던 힘은 바로 하나님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해 주시는 두 분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함께 해 주심과 사랑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 오자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버리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죄 없으시고, 죄를 가장 싫어하시며 결코 죽음에 던져 질 수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죽음을 당하시는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저주하며 그 아들을 향해서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죽음이라는 형벌의 잔을 부으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 받을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원래 예수님과 하나님은 결코 누가 누구를 버리고 누가 누구에게 버림 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분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니까요. 두 분 사이의 신뢰는 완전합니다. 두 분 사이의 사랑도 완전합니다. 두 분 사이의 친밀함은 그저 가깝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철저하게, 그것도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셨습니다. 자신에게 순종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 섬기는 귀하디 귀한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순간에 아들은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중에 갑자기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아주 오랜 시간을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한 채로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제 정신을 차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첫번째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누구도 이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이렇게 어렴풋하게 그려볼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크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 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크기입니다. 우리는 그 헤아릴 길 없는 사랑과 은혜로 인해서 오늘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장면은 예수님의 그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절규를 잘못 알아들은 무정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야기이지만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번째 장면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십자가 밑의 죄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숨을 내 쉬셨습니다. 그 때 그 골고다와 전혀 상관 없는 곳, 그 부정한 죽음의 땅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주 이상하고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주욱 찟어진 것입니다. 이 성소의 휘장은 항상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 막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일년에 딱 한 번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접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앞에서 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은혜를 덧입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도 없고 또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년에 딱 한 차례, 그것도 대제사장 한 사람만 거기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를 통해서 한 해 동안의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그렇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었던 성소의 휘장이 완전히 찢어져서 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성소는 온 세상과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이 세상이, 그리고 죄인들이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보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부어지고 사람들은 모두 망하게 되었을까요? 그래야 마땅한데 그 순간 일어난 일은 그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이제 온 세상이 하나님이 임하시는 지성소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 어디서건 어느 때이건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은혜와 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 휘장은 통으로 짜여진 카펫같은 두꺼운 직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커튼들이 그렇듯이 위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부터 아래로 찟을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런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찟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찟으신 것입니다. 손수 그 장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것은ㅇ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죄인들에게 퍼부을 진노와 저주, 그리고 형벌을 아들이신 예수님께 모두다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온전히 용서하시고 만나실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꼭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하시고 우리가 그 임재 가운데 예배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성도인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그것보다 더 나은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죄의 형벌을 모두 짊어지시고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이런 기도는 함부로 드릴 수 없는 기도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구하는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니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충만히 거하시려면 우리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우리 주님께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 중에 함께 거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기도드리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고 복입니까? 우리가 흔히 드리는 찾아 오셔서 나를 만나 달라고 하는 기도는 얼마나 불가사이한 요청입니까? 그런데, 이 복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성소의 휘장을 찢어 놓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죄 용서만 생각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죄 용서의 은혜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이고 시작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려는 진짜 은혜와 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만나며 그 분과 항상 함께 지내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은혜를 구해야 하고, 이 복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 은혜와 복이 주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려고 하셨을 정도로 크고 중요한 은혜이고 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복이 있을까요? 땅이 아닌 하늘에만 속한 복,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런 복이 있을까요? 네. 그런 복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가 누려야 할 진짜 복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둘로 찢어진 휘장을 통해 지성소로 걸어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복은 몰라도 이 복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지성소가 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맡았던 로마군의 장교는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찌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 중요한 고백이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입이 아니라 그 동안 전혀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고, 직접 예수님의 처형을 집행했던 로마 장교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 로마의 장교는 어떻게  이 놀랍고 복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단지 그 동안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속에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던 무시무시한 어둠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이런 것들도 이유가 되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로마의 장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성전 휘장이 완전히 찢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렇게 찢어진 휘장 사이로 들어와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메시야를 만난 첫번째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이방인이었기기도 했으니까요. 백부장은 이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완전히 찢어 버리셨고,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지성소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최초의 증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그리고 죄의 형벌을 뒤집어 쓰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래야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를 그리로 들어오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거리낌 없이 만나시고 받아 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참으로 복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미 성소의 휘장은 둘로 찢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런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을 모두 참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직접 그 휘장 사이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누리며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이었으니까요. 


지난 주일에는 대속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누가 그런 삶을 달게 살 수 있을까요? 누가 기꺼이 다른 이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금 더 손해 보고, 조금 더 내어 놓으며, 조금 더 나눠주며 살 수 있을까요? 누가 그런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지성소에 들어가 거하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풍성함을 경험하며 사는 행복한 성도들, 그 영적인 복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아는 성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억지 부리지 않고 자기 의를 세우지 않으면서 그 길을 영광스럽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해도 우리는 이미 땅의 복은 받을 만큼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은 욕심입니다. 땅의 복은 충분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탐내야 할 것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입니다. 충분히 그럴 차례가 되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을 탐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 복을 누리며 대속적인 삶,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사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 동안 돈을 벌고 먹고 살기 위해서 애쓰고 힘썼던 만큼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을 얻고 또 누리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실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 어렵사리 열어 놓으신 그 문으로 들어가 주님과 만나 교제하며 주님 닮은 삶을 사는 참으로 복된 성도들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