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복 좋아하시죠? 저도 복을 좋아합니다. 될 수 있으면 복받은 인생을 살고 싶지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도 다 그러실 줄로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도 남들만큼 풍족했으면 좋겠고, 평생 큰 병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자식들도 잘 키워놓고 싶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이런 것들을 마다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서 그렇지 만약 누가 이런 복을 보장해 준다고 한다면 누구나 당장이라도 그리로 달려갈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언제나 복을 참 좋아해 왔습니다. 오복이다, 칠복이다 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고 또 누리고 싶어하는 복들을 헤아리기를 좋아했고,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복에 대한 소망들을 나누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이 인사 또 나누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복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어서 그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거나, 복에 대한 개념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그렇게 복을 얻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오히려 참으로 복된 인생을 망가뜨리고 삶을 있어야 할 제 자리에서 이탈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받는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 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지면 신앙 자체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의 목적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은 그러는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한 도구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결코 복이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신앙에 있어서 복 받는 부분이 너무 커져버리면 그 크기만큼 신앙에서의 하나님의 크기는 줄어들게 마련이고, 하나님은 결국 나에게 복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되어 버려서 내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는 분, 주어야 하는 분으로 오해받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맡겨놓은 것을 찾기 위해 제출하는 청구서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저는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항상 100퍼센트 이상적인 신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아무리 흔들리고 균형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 신앙의 목적의 자리에 앉아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앙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다른 신앙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다른 신앙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그것을 통해 내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사랑의 표현과 헌신이 됩니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복의 개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나는 A를 참된 복이라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복은 B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복을 주셨는데, 나는 그 복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참된 복을 받기도 전에 그렇지 않은 저급한 것을 붙들고 진짜 복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과 삶은 마치 가짜와 그림자를 진짜로 오해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 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킬 해방자, 자기들을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다스릴 정치지도자로서의 메시야였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그런 비뚤어진 복에 대한 개념들이 막상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영원히 살게할 진짜 복인 '복음'이 아닌 '율법'을 붙들고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미 오신 메시야를 여전히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 구절 속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누가 참된 성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중요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참된 성도인가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참된 성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힘쓰는 사람입니다. 현대인에게 하나님은 너무 작아지고 너무 볼품없이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그 앞에서 두려워서 떨 대상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부감을 없애겠다는 설교자와 전도자들의 과잉충성심이 하나님을 그저 우리들의 범죄 앞에서 마음이나 아파하시고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그러면서도 결코 화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그게 거부감이 든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없이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를 한 없이 기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없이 두려운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사랑과 두려움이 항상 긴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한쪽이 생략되면 그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왜 성도들마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저 그렇게 살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없는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까? 제 진단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두렵지 않으니 그 요구마저 가볍게 여겨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분명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그 분의 도, 그 분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참된 성도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들에게는 복이 있도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무슨 복을 주실까하고 눈동자가 커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을 주신다면 그것은 정말 엄청난 복일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기로 하나님은 째째하신 분이 아니시고, 풍성하신 분이시며, 특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니 정말 기대가 갑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사는 것,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어린시절 우리를 실망시켰던 포장만 그럴 듯한 종합선물세트 같습니다.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아니, 세상에 땀흘려 일한 대가로 먹고 사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 복입니까? 그건 누구나 다 누리는, 특별할 것도 없는, 어쩌면 당연한 권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어쩌자고 이것을 하나님의 참된 성도가 누릴 첫번째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그런 불만을 아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째째한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는 복될 것이라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그 복에 대한, 그 형통에 대한 설명은 또 다시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아내는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 출산을 합니다. 이것 또한 가정을 이루면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코스입니다. 특별히 복을 주시지 않아도 다 그렇게 삽니다. 자녀를 낳는 것은 믿는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가정들도 아이들만 잘 낳습니다. 그 다음은 그렇게 주신 자녀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젊은 가장의 가정이니 아이들이 아직은 어립니다. 다 자라면 스스로 인생의 열매를 맺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감람나무이기는 하지만 어린 감람나무입니다. 이것 또한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아이들하고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즐기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그들도 행복해 하며 깔깔대며 행복한 저녁식탁을 즐깁니다. 마지막 6절을 보면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라는 한 가지를 더 덧붙여 주시기는 하지만 그것도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오래 살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지만 여기에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이 속에 여러분이 진짜로 복이라고 여기는 것, 정말 받기를 원하는 복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흥분케 하고 감격하게 할만한 큰 복이 그 속에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이라고 하면 늘상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생각하고, 누구나 다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특별히 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돈이 남들만큼 있는 것은 진짜 복이 아닙니다. 더 많아야 진짜 복입니다. 자녀를 보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좋은 학교에 가야하며, 커서는 돈도 잘 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남과 비교해서 그들에게 내세울 만한 것, 자랑할 만한 것을 가져야 비로소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모두 평범하기 때문에 결코 복이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니, 복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큰 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자녀된 성도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복이라고, 그게 전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든지 하나님이시든지 누군가 한 쪽은 다른 쪽을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참된 신앙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다분히 상대적이고 그래서 비교적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복이 있느냐, 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남과의 비교를 통해 결정하고, 자기 욕심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합니다. 남보다 크고 많아야 복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내 욕심을 꽉 채워줄만큼이 되어야 비로소 진짜 복이 됩니다. 그러니 복이 복된 줄 모르고,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그 때뿐이고 만족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내 욕심을 끝을 모르는 밑 빠진 항아리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하고 이미 풍성한데도 계속해서 욕심부리고, 계속해서 목 마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약속된 복은 엄밀하게 신자들이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복들입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정직하게 말한다면 참된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마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오늘 시편에 기록된 복들을 이미 누려오셨고, 또 누리고 계실 줄 압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복은 우리에게 모자라는 복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는 과분한 복입니까? 분명히 과분한 복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반응해야 할까요? 충분하다고 넘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과분한 복을 주셨다고 해야하고 내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떤 분은 다시 아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이야기이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고 복주시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다루시고 그렇게 복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땅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소유가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의 소유를 가지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소유를 누리는 것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대우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히 더 크고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개 이런 기대는 믿음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믿음이란 것이 "잘 믿으면 복받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예수 잘 믿으면 현실적인 복을 더 많이 더 특별하게 받을까요? 여러분이 지켜보고 경험한 현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본 현실은 그 믿음에서 벗어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성공케이스가 더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뭐 잘 되는 것 없는 사람은 간증할 기회도 없고, 자기에 대해서 특별히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례가 만약 90퍼센트라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믿는 중에 누가 봐도 복 받았다고 할만큼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수이고 일부이지만 크게 부각될 수 밖에 없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부럽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처럼 되고 싶기 때문에 그 사례를 일반적인 경우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한번쯤 누려보고 싶다고 여기는 그런 복들은 특별한 것이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은 말 그대로 모두가 다 누릴 수는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다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우리는 그 분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복을 주시고,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세상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 자가 있듯이 교회 안에도 그렇다는 것이고, 그게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경우이건 간에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복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복을 주시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법칙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법칙을 가지고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큰 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이라는 큰 틀 안에서 움직이시지만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게 움직여 가십니다. 복을 주실 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복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 복에 매달려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이용하려들까봐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일상적인 복들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복이라고, 그게 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 때문에 그 자녀들이 다치고 빗나갈까봐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복이 우리가 보기에 일상적이라고 해서 복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크고 엄청난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감각이 하나님의 복에 무뎌져 있어서 그렇지 그 평범한 복도 하나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오늘 시편의 바로 앞에 있는 시편 127편을 보면 이런 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허사로다" 우리의 인생을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 무언가를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우고 이루었으면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인생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항상 경험하고 있듯이 우리가 세우려는 것이 다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또 세웠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지켜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다고 확신하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변수는 있고, 그 변수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까지도 우리 수중에 넣고 싶어하지만 일은 결코 우리 맘대로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결정적인 부분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고, 하나님은 바로 그 부분으로 우리 삶을 다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을 든든하게 세우려 해도 하나님께서 다 세워지도록 돕지 않으시면 헛일이고, 다 지어진 성을 파수꾼을 세워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헛일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밤낮 없이 애쓰고 땀 흘려도 아무 것도 남는 것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일상이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우시고 지키시는 복을 주고 계시며, 애쓰고 땀흘림으로써 생활이 유지되도록 붙들어 주시는 복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남편이 수고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아내는 성실하게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것, 자녀가 결혼하여 손자 손녀를 낳아 또 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한순간도 빠짐없이 우리 삶을 세우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이어지고 있으며,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그 일상 속의 평범한 일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 긍휼히 여기심의 증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을 일상적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 주시는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비교와 욕심으로 복된 내 인생을 오염시키고 망가뜨리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이제 한 해가 거의 지나가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은 올 한 해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남들이 누리는 큰 것,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엄청난 것들을 바라보느라고 이미 우리 삶 속에서 우리에게 과분한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놓치지는 않았습니까? 이미 약속된 복을 다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궁핍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작아 보이지만 꼭 필요한 것, 평범해 보이지만 그래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이제 눈을 열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평범해서, 누구다 다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보지 못했던 그런 것들을 눈을 열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는 아내와 남편을 보시고, 자녀들을 보십시오. 내가 여전히 다니고 있는, 아직은 건재한 직장을 보십시오. 여전히 숨쉬는 나의 생명과 견고하게 서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보십시오.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복주고 계신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비록 나에게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강한 결단도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시는 과분한 복의 가장 빛나는 증거입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127편과 더불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찬양대가 이 노래를 부르고, 뒤에서는 성도들이 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그렇게 그들은 기뻐하며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세우시며 지키시는 복, 그래서 살게 하시고 또 살아가게 하실 그 세밀하고 변함없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노래하며 올라갔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에게 그런 복이 약속되어 있고, 지금도 그런 복을 누리고 있다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뵈러 올라갔습니다. 그 특별하지 않은 복을 특별하게 노래하며 말입니다.
저는 이 노래가 저와 여러분의 매일의 노래와 고백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편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를 노래, 기도할 때마다 드리는 가슴벅찬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의 평강의 이유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학벌이 아니라,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우리 삶의 샬롬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온에서 복 주셔서, 평생 예루살렘의 평강의 복, 하나님의 평강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