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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31. 그리하면 정하리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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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레위기 13장 1-17절

 


서론 : 죽음의 증상인 질병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나무열매를 따 먹는 죄를 저지르고 난 후, 이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그 변화 중에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다 세상을 무너뜨리고 망가뜨리고 일그러뜨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갑작스럽게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천천히 진행되어져 갑니다. 소위 말하는 노화를 경험하고 그 노화의 마지막에 육체적인 생명을 잃게 되는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경험하는 죽음은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당장의 죽음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죽음은 질병이라는 이름으로도 인간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어딘가 기능이 손상되고 외형이 변형되며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 질병을 전염시켜 그 사람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게 됩니다. 질병은 이렇게그 사람 개인의 온전함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온전함을 깨뜨리며 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온전함을 깨뜨립니다. 질병이라는 것은 죽음의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아니지만 인간이 죽음이라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설명 : 차라트의 진단과 처리방법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그런 질병들 가운데서도 피부병과 관련된 진단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에는 문둥병이라고 번역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본문에 언급된 내용 안에는 문둥병은 없습니다. 본문이 문둥병이라고 표현한 것이 문둥병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문둥병이라면 당시의 상황으로는 치료불가능한 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기록된 피부병들은 모두가 다 회복가능한 것들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문둥병, 그러니까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그 질병은 옛날에는 걸리기만 하면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되는 아주 무시무시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피부병들은 문둥병일 수가 없습니다. 또 오늘 본문의 뒤쪽을 보면 이 문둥병이 벽이나 옷에도 생길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봐서 적어도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한센병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전염성이 있는 악성 피부병, 그것도 굉장히 광범위한 피부병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본문의 판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차라트라고 불리는 이 피부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고, 제사장에게 진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질병의 판단을 의사가 아니라 제사장이 맡은 이유는 그 질병의 진단이 곧바로 그 사람의 제사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증상으로 보아서 차라트가 분명하다면 그는 ‘부정하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서 가족이나 동족들과 격리된 채로 살아가야 했고, 모든 종교적인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거나 혹은 그 질병으로 그 사람 전체, 그 사람의 존재 전체가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더럽혀졌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이런 피부병들이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일 때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서 그저 질병은 질병에 불과했습니다. 단순히 누구나 걸릴 수 있는 피부병이었고 그 사람은 그저 그 때 그 질병이 걸린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한시적으로 금지된 것 뿐이었습니다. 

이 차라트는 사람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피부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피부가 움푹 들어가고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들어간 부분의 피부가 벗겨져 그 안의 속살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차라트는 전염성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처음 그 질병이 걸린 사람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온전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온전함 마저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각한 피부병인 경우에는 그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그러니까 ‘깨끗하지 않다’고 선언하게 하시고 그 질병이 다 나을 때까지 진 밖에서 격리생활을 해야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판단은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또 함부로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판단은 제사장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신중을 기울여 판단해야 했습니다. 확실치 않을 경우에는 일주일 후에 다시 진단해야 했고, 그래도 확실치 않은 경우에는 칠 일을 더 기다린 후에 진단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은 진단은 차라트가 완전히 확실한 경우에만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트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 ‘부정함’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피부병이 치료되면 부정함은 해제되고 정하다고 선언되어 다시 이스라엘 사회로 돌아오고 또 제사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을 기뻐하거나 즐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주 가끔씩 학교가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악동들을 빼면 말입니다. 무어라고 말해도 모든 질병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질병에 걸린 당사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 차라트에 걸린 사람에 대한 성경의 처리방법은 조금 부당하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약자요 피해자인 병자를 오히려 부정하다고 판단하고 격리시켜 진 밖에 거하게 하며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두 번 괴롭게 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격리시키고 정죄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죄도 없는 사람을, 오히려 그 질병의 가장 큰 피해자를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내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함을 갖춘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은 원래 피조물로서의 온전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실은 그 온전함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고 그 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면서 그 온전함은 회복불능으로 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 의가 다시 회복될 수 없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의는 찰흙덩어리가 아닙니다. 어떤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망가졌다고 해서 다시 뭉쳐 처음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인간에게 주어졌던 온전함, 그 의는 마치 유리병과도 같습니다. 깨어지면 그 뿐입니다. 다시 완전하게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은 적어도 그것을 깨뜨린 입장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처음 그 유리병을 만들어 주었던 분이 다시 만들어 주시기 까지는 그 병을 소유할 수 없고, 그래서 그 유리 병이 있어야만 그 분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힘으로 그 분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온전치 못함은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질병은 그 온전치 않음이 육체를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피부병, 본문이 말하는 ‘차라트’같은 심각한 피부병들은 인간의 겉모습을 심각하게 일그러 뜨렸으며 또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온전함도 그렇게 파괴하고 일그러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죄는 무슨 일을 하는가? 

회원 여러분, 죄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죄가 하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곡시키고 파괴하는 일입니다. 죄란 악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죄를 범하는 이유는 그 죄가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죄를 범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도둑에게 물건을, 사기꾼과 범법자에게는 재물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것들이 그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죄로 표현된 악은 도무지 사람에게 참된 의미에서 선한 것과 좋은 것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악은 독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고래로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선의 결핍이라고 설명되어 왔습니다.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바로 악이라고 생각되어져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입니까? 선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선행의 혜택을 입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그저 좋은 일입니까? 옳은 일입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실은 좋고 옳아서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이어서 좋고 옳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선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참된 의미에서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세워주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러니 이 선의 결핍, 그래서 이 선의 반대인 악은 사람에게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악은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롭게 합니다.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세워주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고 궁핍하게 합니다. 그래서, 악하게 사는 사람들, 죄짓고 사는 사람들 중에서 마음 가득한 만족을 가지고 꽉 찬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죄악된 방법으로 살아가면서 행복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그것은 짚으로 불에 타지 않는 집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빼앗고 무너뜨리기만 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풍성하고 견고한 삶을 세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을 일그러 뜨리고 그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지만 죄의 영향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결코 그 자리에 머물고 그만두는 법이 없습니다. 죄는 항상 그 다음 수순을 밟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고 또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 전체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1+1=2가 되는 식이 아니라 1+1=4, 5, 10이 되는 식으로 번식해서 그 사회와 공동체 전체를 왜곡시키고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모두에게서 온전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셨던 것

하나님께서 차라트 환자를 진 밖으로 격리시키라고 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한 부분에서의 온전함이 아니라 한 사람 전체의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온전함었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제사를 통해서 그 더러움이 제거되고 다시 깨끗하게 될 수 있지만 질병, 특히 피부병은 그 병이 치료되어야만 다시 깨끗해지고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두었다가는 다른 사람의 온전함도 깨질 수 있기 때문에 그를 격리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결국에는 그 사람도 다시 몸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온전함도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차라트를 진단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규정해 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꼭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과 꼭 알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죄의 악한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께서 진짜로 요구하시는 것은 그 사람의 몸도 포함하는 그 사람 전체의 온전함이라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죄란 결국 그렇게 사람을 사람에게서 갈라놓고,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래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은 원래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온전하지 않으면, 완전히 의롭지 않으면 대면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완전히 순결해야 하고 완전히 거룩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그 누구도 이러한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니고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 분께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죄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이러한 곤경에 그대로 내팽겨쳐 두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온전한 의를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다시 그 분 곁으로 이끄시고 그 분 곁에 두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주신 것이 짐승의 생명을 희생시켜 드리는 제사였고, 결국은 친히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속물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과 완전한 의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사를 통해서 다시 깨끗해 지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깨끗해 졌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죄에 취약합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죄와 악으로 더럽힐 수 있고, 또 더럽히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실은 우리의 삶은 다시 망가지고 부셔져야 하며, 사람들과 하나님으로 부터 다시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다시 더러워지고 다시 부정해진다고 해도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지나 차라트 환자의 환부가 다 나으면 제사장의 확인을 받고 다시 정상적으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주셨듯이 지금도 반복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죄 때문에 생겨난 우리의 망가지고 일그러진 부분들도 다시 고쳐주셔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그런 은혜 가운데 살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회복의 은혜, 다시 씻어주시고 받아주시는 은혜 덕분에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성도로 사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는 더렵혀지고 깨끗해 지고, 또 더럽혀지고 다시 깨끗해 지는 이런 일이 아무리 반복되고 또 반복되더라도 그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무덤덤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시 받아들여지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거듭 거듭 내가 나의 힘으로는 전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 다가갈 수도 없는 ‘부정하고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하며,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고 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나를 용서해 주시고 씻겨주시며 또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 가운데 머물 때에만 그 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항시 그 은혜에 더욱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문둥병 환자를 진단하게 하셨을 때,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진단할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진단을 받기 위해서 환자가 제사장을 처음 찾아왔을 때, 그가 차라트에 걸렸다는 확실한 증상이 보이지 않으면 칠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찰해야 합니다. 그래도 확실치 않으면 다시 칠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찰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신중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항상 죄를 짓고 더럽혀 지면서도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 너무 쉽게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죄를 짓고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판단해야 하며 또 교회 전체를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 조치도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그렇지 못한 죄인에 대해서 당당하게 정죄하고 벌을 내리는 일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도 언제든지 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을 지키고 또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판단해야만 하는, 피치 못해서, 마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차라트의 진단과정을 이렇게 신중하고 까다롭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또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고 자랑스러워하기 잘하는 우리들의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를 그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시려고 그러셨던 것입니다. 


결론 : 정결케 하시는 은혜에 의지하자

레위기는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룩하지 못함을 처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한 은혜의 방편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죄인들이었지만 우리를 내치시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자신을 더럽히더라도 용서하시고 씻기셔서 용납하시고 다시 받아들여 주십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삶이 되게 하려고 애쓰고 또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성도의 삶이 갖추어야 하는 삶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본조차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거룩함과 온전함은 항상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돌아올 문을 열어놓으시고 피부병자들을 격리시키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보혈의 깨끗게 하시는 공로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다시 돌이켜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더러움을 정하게 해 주시는, 숯검댕이 같은 죄의 오염을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다시 정하게 하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 가운데서 거룩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올곧은 신앙인으로 끝까지 견디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