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9장 27-38절
텔레비젼을 보면, 가끔씩 어떤 분야의 최고 전문가의 이야기가 방영될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모습들이 일반인인 우리들이 보기에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이지만, 특히 아주 오래전 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물건들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그 정성과 정교한 작업을 보면서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옹기하나를 빚어도, 방짜유기 하나를 두드려도, 심지어는 메주를 띄우거나 술 한 병을 담그더라도 정말 엄청난 정성과 손길이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그 오랜세월동안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방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런 전통문화들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일컬어 전수라고 하는데, 이 전수의 방법은 철저히 보고 배우고 따라하게 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 지게 됩니다. 어떤 일을 배우게 하는데는 보고 배우게 하는 것 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이게 때로는 단순해 보이고 무식해 보여도 보게 하고 따라하게 해서 배우게 하는 것처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스승이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서툴어도 따라해보는 반복적인 과정이야 말로 다음 세대에 똑 같은 것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어 줍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통적인 옛날 방식의 과정이 너무 힘들고 지루해서 그런 장인들의 후계자가 되려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것도 참 안타까운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 후, 제자들을 데리고 이 곳 저 곳을 쉴새없이 다니셨습니다. 그렇게 다니시는 예수님의 일정은 정말 눈코뜰새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셨고 여러가지 필요로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예수님의 하루는 정말 잠 잘 시간조차 없는 그런 하루 하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모든 것을 듣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단순히 그 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렇게 제자로서 스승의 삶을 보며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준비시키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제자들은 반복해서 천국의 복음을 들었고,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일들도 목격했습니다. 제자로서 스승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지람도 들었고, 예수님을 온전히 환영하는사람들의 환대도 받았지만 반대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홀대도 함께 경험해야 했습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만져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확신을 주시는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모든 백성의 메시야가 될 만한 분이심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있었던 마지막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성경에는 직원으로 되어 있는 한 고위관원의 딸을 고치신 후에 막 그 집을 나서시는데, 저 멀리서 왁짜지껄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 사람이 소리를 치면서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데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어디쯤 가고 계신지, 자신들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나 되는지 자세히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렇게 소리치는 것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외침이 어떠했을까요? 그 외침은 결코 점잔을 빼는 말투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다시 예수님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외침은 정말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지르는 고함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외침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그 관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맞이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친히 그들의 눈을 만져 주시며, 그들을 평생 고통과 고생, 소외와 상처 속에 묶어 놓았던 바로 그 눈을 만져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들에게 이 질문은 어쩌면 전혀 필요없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이 칭호를 사용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칭호는 그들이 예수님을 이미 제대로 알고 온전히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금 훌륭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볼 때,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메시야라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그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면, 그 메시야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들의 치료는 자신들의 믿음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을 고쳐주신 후 막 집을 나가시는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굳은 그의 혀를 풀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고 다들 경이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광경을 주욱 지켜보면서도 정반대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면서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그런 일들을 행하실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찾았다고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저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냐. 예수는 지금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귀신들을 내쫓고 있는거야.” 이런 모습은 우리를 참 우울하게 합니다. 어떻게 같은 일을 보고도 이렇게 다른 판단을 할까요? 물론 사람들이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 부인을 위한 부인을 하려고만 하니 정작 명확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사역의 범위를 넓혀가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모든 성과 동네를 모두 다니시면서 해야할 일들을 하셨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자신을 위해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가는 곳마다 천국복음을 전하셨으며 병들고 약해져 있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였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 모든 일을 함께 하는 제자들, 그리고 비록 구경꾼이지만 그 뒤를 따라다니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이미 천국이 이루어진 것처럼, 즐겁고 들떠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계속하면 계속할수록 정작 예수님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 지셨습니다. 가시는 곳이 어디이시든지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든지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이 예수님의 가슴 속으로 더 깊게 파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찾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마음을 느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꼭같은 마음이 되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불쌍하고 안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지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는 에스겔의 예언을 그대로 현실로 옮겨놓은 듯한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안타까운 일들은 양들 때문에 생겨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자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가 없으니 양들은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고통 중에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자가 정말로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목자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목자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이 목자임을 잊어버리고 전혀 목자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수많은 랍비들.... 그 시대에도 그렇게 스스로를 지도자로 생각하고 또 지도자로 여겨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역할은 참 목자가 오시기까지 양떼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먹여야할 것을 제대로 먹이고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참 목자가 오시면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 양떼들을 그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오셔서 확인한 사정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사람들, 병들고 가난해서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 군중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며 놀라고 따르고 있었지만, 가장 먼저 예수님을 기다리던 참 목자로 알아보아야 할 이 사람들은 그 분을 모함하고 몰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귀신들려 말을 할 수 없게된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분으로부터 놀라운 선물을 받습니다. 눈이 띄여지고, 입이 열립니다. 그렇게 앞을 보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소문을 전했습니다. 정말 온 땅에 다니면서 전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그 분이 자기들을 고쳐주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릅니다. 정말 딴 세상 사람같습니다. 이들은 지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연거푸 보고 있습니다. 관리의 딸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들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귀신도 떠나가고 말도 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12년이나 불치의 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했는데 치료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눈 먼 자가 눈을 뜹니다. 말하지 못하는 자가 말을 하게 됩니다. 이건 분명히 약속된 메시야가 오시면 하실 일들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외우다시피 했던 그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에 대해서 온전한 것을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짜 소경은 소리지르며 불쌍히 여겨 달라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벙어리는 귀신 들려 말을 하지 못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소경과 진짜 벙어리는 바로 자신이 잘 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자신들은 언제나 참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사람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이렇고, 목자들이 이런 상태니 그들이 돌보고 인도해야할 양떼들은 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 안타까웠습니다. 백성들이 더 불쌍했습니다. 목자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목자들이 전혀 제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게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정말 많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들이 없다. 어떻게 해야하겠니? 빨리 요청해라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이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긴급하게 요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왜 오셨고 오셔서 그렇게 고생스러운 사역들을 쉴 새 없이 감당하셨을까요? 머리 둘곳도 없이 지내시며,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셔야만 쉴 사이을 얻으실 수 있을 정도로 애써 가르치시며 사람들을 돌보셨을까요?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셨던 소명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명이기 이전에 주님의 마음이 그 분을 몰아가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셨고, 또 그렇게 일하셨던 까닭은 목자 없는 양같은 그 분의 백성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양떼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백성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 분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몰아냈던 것이고, 그렇게 그 분을 쉴새 없이 양 떼들을 위해서 일하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하셨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제자들로써,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그 분의 지체요 몸으로써 우리들이 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들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교회는 가르치는 곳인 동시에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참된 뜻인지 끊임없이 더 깊고 온전하게 배워가야 하며, 그런 올바른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에게 참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요 대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청산하고서 스스로 배우고 또 가르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범이 되고 올바로 사는 것을 보여주고, 악에 대한 선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진실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고,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선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보면 이 두 가지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또한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는 일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아니기에 그 치료까지 완전히 보장하고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지체요 몸으로써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합니다. 주위의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고쳐지고 바로 세워지도록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남겨두신 그 분의 몸과 지체가 그 분을 대신해서 그 분의 뒤를 이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일을 할 수 없으니 한 가지를 골라서 거기에 올인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니 그렇게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교회나 성도의 소명은 스스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들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주어져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저 따라야 할 뿐입니다.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떤 것은 할 수 없는지, 나는 어느 것에 더 재능과 관심이 있는지....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은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개인이 아닌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지체가 아니라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셨던 모든 일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거나 한 가지가 생략되면 그 몸은 더 이상 건강한 몸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보다 항상 앞으로가 더 잘해야한다고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하라고 하시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그 분이 맡기신 대로 열심히 하는 것, 그것 한가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잘 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이것 저것 누덕 누덕 덧붙여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도와 교회는 결과는 자신의 몫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셨고 또 병든 자들과 약한 사람들을 고치셨다면 교회도 그 모든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되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을 고치시고 돌보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본 것이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또 한 가지를 보았습니다. 그 일을 하시는 예수님이 그런 일들을 결코 책임감에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을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정말 우러나서 하셨습니다.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도 기쁘게 그 일들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짜로 보여주시려고 하셨던 것, 그것은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정말 많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들이 없다. 어떻게 해야하겠니? 빨리 요청해라. 추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이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긴급하게 요청해야 한다”
주님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항상 추수할 것에 비해서 추수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양떼는 너무 많지만 그들을 돌보고 인도해야할 목동들은 태부족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변하지 않는 진짜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세상이 안타까워지고, 세상이 불쌍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더 급해지고 간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목자잃은 양 떼같은 백성들을 보시며,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도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밭을 보시며 안타까워 견딜 수 없어하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대신해서 일하기 전에 그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저는 오늘도 세상과 그 분을 따르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어 가지길 원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왜 전도를 하고, 너는 왜 선교를 하니? 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왜 구제를 하니? 그렇게 하는 네 마음 속에는 어떤 마음이 있니? 나의 마음에 너에게도 있니?”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주님께서 하셨고, 또 하라고 명하셨던 일들을 해야만 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며, 가르쳐야 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돕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은 참 귀한 일들이고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들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오히려 그 일들을 하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까요? 주님이 그런 일들을 하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점검하시기를 원하시는 다른 것은 없을까요? 주님은 일하러 나가기 전에 주님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눈으로 서로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실까요?
저는 교회가 세상을 바라 볼 때, 너무 고자세로 평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평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죄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런 모습입니다. 주님도 그걸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더 잘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시면서도 사랑하셨고, 그래서 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때로 그 분은 그런 세상을 저주하며 화를 선언하시기도 하셨지만 그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우리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그 분의 마음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라야, 우리는 그 목자 없는 모습에 안타까워 할 수 있고 진실로 추수할 일꾼을 속히 보내달라는 기도를 간절하게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사야처럼 자신이 또 한 명의 추수꾼이 되어 일하면서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기독교는 스승과 제자의 종교입니다. 주님에게서 보고 배운 사람들, 그렇게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통해 여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열 두 제자들과 처음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그 다음 사람들은 그 이전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그렇게 자신들의 스승을 통해 처음 스승이셨던 예수님의 삶과 마음, 그리고 일을 배운 사람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다 그렇게 배운 대로 행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 덕분입니다. 우리는 평신도든 목회자든 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스승이 하셨던 일을 뒤이어 해야 하는, 그 분의 어깨넘어로 보고 배웠던 그 분의 일을 그 분의 마음을 품고 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주님께 나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귀신들려 말을 못하게 되었던 그 사람처럼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모두들 이유와 과정이야 어쨋든 주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추수꾼으로써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주님께로 다가오게 하는 중매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닮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 많은 일꾼들을 속히 보내달라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승의 일과 능력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이어받은 신앙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세상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는 세상을 보면서 민망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는 일에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주님의 참된 추수꾼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