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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5.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녀가 아니냐

본문 : 예레미야 31장 10-22절

서론 :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 뿌리내려야 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세가지 내용 중에서 세번째의 기도입니다. 그는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함으로써 그들도 자신이 그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제목에 동참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것을 신앙의 참된 목표로 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세가지 기도제목 중에서 가장 긴 기도제목이 바로 세번째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지식에 넘친다’는 말은 지식은 지식이지만 단순히 머리로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은 꼭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이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손으로 만지듯이 온전하게 알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랑을 알 때 생겨나는 마음의 감동을 받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구하노라” 이것이 그가 기도드리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아는 크기만큼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와 믿음을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을 때, 그 사람의 신앙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것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할 때, 그 아이는 자신 없는 아이가 되고 항상 불안한 아이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만이 줄 수 있는 풍성한 안정감과 만족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불안하고 기복이 심한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기 쉽습니다.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고 또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회복시키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신앙자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열심을 내기 보다는 사도 바울의 기도대로 그 노력의 방향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구체적이고 제대로 알려는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는 모든 풍성함으로 풍성하게 되어야 합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들을 혼낼 때, 특히 조심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혼나고 때로는 매를 맞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내가 자기를 싫어하거나 미워한다는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많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게 잘 되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리다 보니 부모의 본심을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때때로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있는 아이에게 걱정스런 마음으로 “아빠가 너 미워하는 것 같아?”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합니다. 차라리 혼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못난 애비가 자식 다 망쳐 놓을까봐 빨리 마음을 다 잡아 먹곤 하지만, 아이를 혼내는 것과 그 아이에게 부모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는 일 두가지 모두를 잡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이는 아직 아픔과 사랑받는다는 느낌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마음의 용적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혼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내실 때의 우리의 마음도 철들지 않은 어린 자식과 같지 않나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과 징계 속에서 “아... 하나님이 정말로 날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하나님이 날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 괴로움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느껴질 때는, 그 길이가 긴만큼 그리고 그 어둠이 짙은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농도도 흐려져만 가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상황

북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시점에서 이미 100년이라는 세월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유다보다는 이스라엘이 훨씬 못된 자식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부터 그들을 징계 가운데로 몰아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포포로 100년을 지냈지만, 아직은 70년이나 더 징계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냥 살펴보면 무척 희망차고 따뜻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묻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100년의 포로생활 후에, 그것도 아직도 70년을 더 남긴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 들려진 말씀임을 감안해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느끼는 따뜻하고 밝은 느낌보다는 훨씬 어둡고 냉냉했을 것입니다. 천하의 바벨론이 망할 것 같이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갑자기 순순히 보내줄 것같지도 않은 캄캄한 상황에서 이 약속을 붙잡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

     그래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전령으로 선택하시고, 먼 섬들을 그 메시지를 받는 수신자로 정하십니다. 그들이 전하고 들어야 할 소식은 비록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셨지만, 다시 모으시고 목자로 견고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지금 이스라엘은 흩어져 있습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광야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양우리로 돌아올 것이고, 목자는 그들을 온전히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의 전달자요 증인으로 이방나라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랬듯이 그들의 회복도 만천하에 보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곤경은 그것이 다시 회복될 때는, 하나님께는 한없는 영광이 될 것이고, 그들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지금 이스라엘은 너무나 강해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대인 바벨론의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해방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말입니다. 사자의 입을 벌리고 양을 건져 내실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찬양할 것입니다. 그 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은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상하지 못했던 더 좋은 것으로 그들을 채우실 것입니다. 새로 볶은 곡식을 먹게 하실 것이고, 돌아온 땅에서 새로 수확한 포도로 담근 새 포도주, “보졸레 누보”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회복은 이런 물질적인 부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회복은 그들의 심령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그들의 심령은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채워진 풍족한 그 분의 정원이 될 것입니다. 부족한 것 없고, 불만스러운 것 없으며, 충분히 넉넉하고 충만하여 넘치는 정원이 될 것입니다. 그 심령의 풍성한 만족은 그들에게서 불안함과 근심을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게 하며, 스스로 만족을 위해서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게 했었던 그 불안한 근심은 이제 영혼의 꽉 찬 만족감으로 인해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슬픔이 있지만 돌이켜 즐겁게 하실 것이고 비록 지금은 낙심해 있지만 돌이켜 기쁨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그 분의 생각은 항상 고통과 근심이 아니라 언제나 그 뒤에 찾아오는 참되고 큰 기쁨에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하며 우상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만 춤추는 백성들이 될 것이고 제사장들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흡족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예배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런 약속에 눈물을 거두고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품을 정도로 간단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처럼 통곡하고 있고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로를 주시는 대신 명령을 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통곡에게 명하여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게 명하여 더 이상 흘러내리지 못하게 하라” 그들의 마음을 몰라서 하시는 몰인정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있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제 라헬은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습니다. 울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그 무덤에서 편안하게 쉬기만 하면 됩니다. 

아버지와 자식

    하나님께서는 그 징계의 마지막에 그 분이 그렇게 듣고 싶으셨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망나니 같던 이스라엘, 아직 코뚜레를 하지 않은 송아지 같았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고 스스로를 한탄합니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길들여질 줄 모르던 망아지 같던 내가 주님께 너무나 당연한 징계를 받습니다. 이 징벌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주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돌이켜 주신다면 제가 언제든지 돌아가겠습니다. 철 없을 때 저지른 일이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종아리를 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 같은 자식의 입에서, 망나니같이 제 멋대로만 하던 아들의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왔으니 얼마나 기쁘고 또 기쁘셨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또 그 기쁨이, 섣부른 용납이, 그리고 들통난 아버지의 약한 마음이, 귀한 자식을 망가뜨릴까봐 속마음을 이스라엘에게 직접 드러내지 못하십니다. 징계가 끝날 때까지, 영광스럽고 온전한 회복이 주어질 때까지 그 마음을 아껴 두십니다. 그 분은 허공에 대고 독백처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지? 내가 기뻐하는 내 새끼지? 내가 그 아이를 혼 낼 때마다 내 마음에는 그 사실이 얼마나 더 깊게 새겨졌는 줄 알아? 그 아이의 고통이 조각도가 되어 내 가슴에 그 아이가 내 아이란 사실을 깊게 새겨놓았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그 사실이 변한 적은 없었어. 내 사랑하는 내 자식이니, 내 기뻐하는 내 새끼니 내가 꼭 그에게 긍휼을 베풀꺼야. 반드시 그 아이를 제 자리로 돌려놓을꺼야.” 

남편과 아내 

    그러면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제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에 네가 걸어갔던 길을 기억해 보렴. 그리고 그 길 곳곳에 네가 잘 알아볼 수 있는 이정표와 표식을 세우렴. 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라. 돌아오거라.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놓았다. 네가 비록 패역한 여인이었지만 너는 나에게 둘도 없는, 결코 둘 일 수 없는 내 아내야. 이제 돌아와 나를 안으렴. 나의 아내로 변치 않고 떠나지 않을 남편인 나를 안거라. 예전의 너의 방문은 단 한 번도 닫혀진 적도 남에게 주어진 적도 없단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인가? 

    때로는 양도 목자를 귀챦게 여기고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 양을 양을 잊지 않습니다. 때로는 양우리의 소중함과 목자의 선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양떼를 광야에 흩어놓을 때도 있지만, 결코 양을 자기 양이 아니라고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비록 몸은 우리의 양들과 함께 있어도 마음은 밤새 흩어놓은 양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여기지 않고,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에게 대들 때도 있지만, 한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에게 아들은 결코 아들아닌 때가 없습니다. 한 대, 한 대 회초리가 아들의 종아리를 물들일 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은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더 깊게 패여만 갑니다. 비록 말 안듣고 어긋나가고 그래서 징계를 내리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닙니다. 훌륭하고 자랑스럽게 자라주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그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지겨워 그 남편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직한 남편은 단 한 순간도 아내를 잊지 않습니다.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아내가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는 아내의 방문을, 그리고 아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그 어떤 순간에도 걸어잠그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유익과 필요만을 위해서 양을 기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무시하고 집을 나가버린 자녀를 결코 변함없이 기뻐하지 못합니다. 사랑하기는 해도, 안스럽게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자식 자랑스럽게, 기쁘게 여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인군자같은 남편이라도 집나간 아내, 그래서 몸 버리고 마음 빼앗겨 버린 아내를 한없이 걱정하며 아내로 여기지 못합니다. 결코 이전의 첫순간처럼 그 여인을 흔쾌히 품에 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참된 목자가 되어서 흩으셨다가도 다시 모으시고, 또 보호해 주십니다. 한없는 사랑의 아버지가 되어 못난 자식, 못된 자식 여전히 사랑하시고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그것들을 버리게 하려고 따끔한 징계를 주시기도 하시지만, 결코 자녀를 향한 사랑은 변질되는 법이 없으며, 새끼를 향한 기쁨은 퇴색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남편이 되어 남편을 떠나 방황하는 그 더러운 여인을 처녀라 부르며, 그렇게 변함없는 자신의 정혼자로 여기며, 돌아올 길 잊지 않을까 걱정하며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시기며, 또 느끼시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시며, 나간 자식 기다리다 버선 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는 사랑넘치는 아버지이시고, 결코 마음 변치 않는 사랑에 목숨을 건 남편입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의심해서는 안될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입니다. 믿으십니까? 바로 이런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 번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라서 이런 사랑 앞에, 이 엄청난 사랑, 그 발끝도 따라갈 수 없는 영원한 사랑 앞에 여전히 자신을 꼿꼿하게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또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힘을 얻고 견고함을 얻었습니다. 이런 변함없는 사랑, 상상할 수도, 헤아릴수도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일 앞에서 기가 죽고 낙심할 것이며, 의심하고 흔들리며 그래서 비뚤어져 가겠습니까? 인간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라는 느낌으로만 끝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다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가 있고, 사랑한다고 해도 이기심을 완전히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그 분의 가슴 속에만 있는 사랑도 아니고, 이기심의 벽을 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랑도 아닙니다. 그 분의 사랑은 언제나 일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움직이고, 움직이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전능하신 분의 사랑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도 주시지만, 그것은 단지 도구일 뿐, 그 아픔과 고통이 그 분의 진심이 아닙니다. 그 분의 진심은 우리의 참된 유익에 있습니다. 그 분의 진심은 우리가 그 분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그 만족과 견고함을 얻는 것입니다. “심령은 물댄 동산 같고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그 분이 진실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인 것입니다. 

징계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 : 물댄 동산이 되고 근심이 없게 하심

    대개 고난과 징계는 우리를 정결케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심한 고난과 징계는 그동안 우리가 의지하고 만족을 얻었던 모든 것들을 전혀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그런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서 가지 말아야 할 길도 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선택도 했습니다.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손에 들어오는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이 주는 잠시 잠깐의 부듯함을 참되고 영원한 만족과 안전함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과 징계는 그런 것들을 다 쓸데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실은 그런 것들은 의지할만한 것도 못되고, 우리를 안전하게 해 줄만한 것들도 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부질없는 것을 얻으려고 달려갔던 길, 선택했던 악에 대해서 뉘우치게 됩니다. 그 허무한 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던 자신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모든 의지했던 것이 소용없어졌으니 이제 그것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으니 하나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가 진실로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만족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진실입니다. 이제 그의 심령은 하나님 안에만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의 심령을 비로소 물댄 동산, 하나님의 시내가 흐르는 그 분이 가꾸시는 정원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만족합니다. 그렇게 만족하니 근심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으니 더 이상 유혹때문에 약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거기 만족함이 있으니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붙들게 하시려는 진짜 복중의 복입니다. 그렇게 그 분 자신이 우리의 만족이 되시고 복이 되신다는 것을 알고 그 분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론 : 사랑의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당신의 육성으로 아주 크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너의 선한 목자라고, 너의 아버지이며, 영원한 너의 남편이라고 , 그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그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열심히 그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우리의 믿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 뿐 아니라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미워서 내리는 벌이라고 말하는 사탄의 음성도 있고 우리에게는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려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그런 사랑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다 그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우리를 위한 최선의 은혜임을 믿어야 합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멀리 계신다고 느껴질 때에도 그 분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마지막에 우리가 그 분 한 분만으로 만족을 누리며 물댄 동산 같이 살게 하고, 그래서 더 이상 근심이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놓여져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변함없고 영원하며, 우리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진실로 믿어지십니까? 이제 안심하고 믿으십시오. 혹시 아직도 의심이 가신다면, 느껴지지 않으신다면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또 묵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이 믿어지고 영혼 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위에, 그 견고하고 가장 풍성한 사랑 위에 여러분의 삶과 신앙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 능력있는 사랑, 그 강하게 일하는 사랑 위에 터를 든든히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한, 우리에게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이제 진실로 선한 목자, 참된 아버지, 그리고 영원한 남편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그 믿음 안에서 물댄 동산 같게 하시고, 근심 없게하시는 참된 유익을 누리는 모든 회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