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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1.12.3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묵상할 부분은 시편 119편 161-176입니다. 시편 119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61-176절

방백들은 시인을 핍박하지만 정작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방백들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동일한 주의 말씀을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얻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말한다. 큰 경외함(두려워함)과 큰 기쁨이 하나의 대상, 주의 말씀을 향한다. 얼핏 모순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기뻐하고 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물론 그 두려움은 그 대상 자체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대상에서 자신이 이탈되었을 때,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을 떠났을 때의 불이익과 상실감을 두려워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두려움과 기쁨, 그리고 사랑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진짜 기뻐하고 진짜 사랑하면 두려워하게 된다. 만약 시인이 방백들처럼 거짓을 선택했더라면 시인은 괴로움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는 것은 ‘탈취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 말씀 자체를 노래한다. 그 이유는 그 분의 말씀이 의롭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바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바름은 단순히 도덕적인 바름이나 성품의 바름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며, 그 신실함에서 나오는 바름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며, 그것이 정확하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왜 시인은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이러한 언급은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시인 자신의 현재상황과도 다르다. 그는 심각한 장애를 경험하고 있다. 방백들이 그를 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고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고백은 아닐 것이다. ‘큰 평안’은 ‘작은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평안이며, 오히려 장애를 무색하게 할 만큼 큰 평안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법은 평안이 되는가? 왜 모든 장애물을 무색하게 하는 큰 평안이 되는가? 그것은 그 법이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완전하신 뜻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법을 따를 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가 나의 삶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샬롬을 가져온다. 땅의 평화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 사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 ‘큰 평안’이 있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장애물들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워 평탄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장애물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곧 하나님의 법은 그 장애물을 의미없게 만들고 만다. 그 법은 ‘큰 평강’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구원이며 평강이며 도움이었다. 하나님이 시인을 찾아나서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걸 깨뜨리신다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주의 법과 주의 구원, 주의 법과 주의 도움, 주의 법과 주님의 개입... 이 모든 것들은 항상 짝을 이룬다. 서로 떨어지지 않는 짝이다. 하나를 붙들면 하나는 따라온다. 시인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믿고 신뢰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으며 노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덧붙여서...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사람은 자신이 택한 것의 도움 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택함은 씨앗과도 같아서 심은 것을 거둘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택하지 않은 것의 도움을 바란다면 그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주의 법도를 택해야 주님의 손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열매에 맞는 씨앗을 심은 사람만이 그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택했는가? 또 무엇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가? 혹시 ‘이 세상의 거듭나지 못한 법칙을 택하고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도 어디가 어떻게 어긋나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19편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 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시편이다. 그런데 이 시편은 고백과 간구로 끝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그 신뢰에 자신의 삶을 정초시키고 앞을 '바라보며' 사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성취를 보고, 승리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말이다. 물론 말씀은 확실한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섣불리 현실 속에서 기대하는 일은 오히려 너무 위험하다. 그런 신앙이야 말로 실망과 환멸에 빠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