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시편 123편입니다.
이 시편 또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 122편에서 시인은 넘치는 기쁨과 기대 속에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기대하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같아도, 그 바램을 가진 사람도 다르고 그것을 바라는 감정도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기쁨의 반대편에는 같은 무게의 간절함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123편의 시인도 눈을 주께로 향한다. 종이 선한 주인을 바라보는 그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 눈길을 통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불쌍히 여겨주심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사실 시인, 그리고 시인이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멸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항상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형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멸시를 받고 있었다. 반면에 이론대로라면 멸시를 받아야 할 ‘평안한 자들’과 ‘교만한 자들’이 시인과 시인이 ‘우리’라고 부르는 결코 멸시를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을 조소하고 멸시하고 있었다. 시인은 그 말도 안되는, 이론과 반대되는 상황의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괴리는 사실 시인을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시인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시인이 그렇게 이론과 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현실과 그 현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기대와는 정반대가 되는 상황 속에 던져 넣었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러한 상황 속에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성도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다. 시인이,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이 드리는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한 마디 기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 있는가? 아마도 그 기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함축적인 한 마디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기도보다도 간절하고 절실한 간구일 것이다.
이론과 원칙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듯 보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이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그리고 그 현실 속의 괴로움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이 한 마디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온전한 제사요 그 제사의 제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영혼의 각을 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진실되게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을까? 나는 정말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절실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