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시편 126편입니다.
그냥 당하는 곤란, 의롭게 살기 위해 감당하는 고통이라면 그래도 소망이 있다. 그러한 곤란은 우리를 더욱 온전한 곳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다듬으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곤란이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기도 힘들다. 그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도 그저 끙끙댈 뿐 의롭게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처럼 하나님을 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런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구원을 경험하게 된 자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처해진 그 누구도 도와주지 못할 상황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주님의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입술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함을 받고, 우리도 깨닫지 못하던 영적인 곤경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경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 때 우리는 ‘죽었었다’ 모든 것이 끝난 상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태, 그렇지만 그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 곳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리였다. 그래서 구원의 경험은 정말 믿지 못할 만큼 즐거운 경험이 된다. 입술에는 흘러넘치는 기쁨이 있고 혀에서는 연신 그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는 찬양이 있는 그런 경험이 된다. 우리는 회상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복음을 만났을 때, 그 때의 기쁨과 찬양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다시 ‘꿈 꾸는 것 같은 신앙’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구원에 있다면 우리는 바로 그 곳에서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다시 입술 가득히 웃음을 담고 찬양이 가득한 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야 한다.
그러한 구원의 은혜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삶과 신앙 속에서 항상 반복되게 되어 있다. 나에게도 그렇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건기에는 먼지만 날린다. 건기에 거기 있는 것이라곤 죽음의 흔적 뿐이다. 그 누구도 거기 풍성한 강이 기운차게 흘렀다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기가 되면 거기는 어김없이 가장 풍성하고 기운찬 생명이 흐르는 곳이 된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다. 죽음의 땅에 어김없이 흐르게 되는 생명의 강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을 생명으로 덮어버리는 그런 강물 말이다.
구원의 기쁨은 누구의 것일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이다. 절망의 강가에 소망의 씨앗을, 주님의 은혜의 계절이 어김없이 돌아와 그 죽음의 땅이 생명으로 충만해 질 것을 믿으며 눈물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절망의 순간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정녕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물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말라버린 절망과 죽음의 땅에 뿌려진 한 알의 믿음의 씨앗, 그 위에 떨어진 눈물이 강물이 되어 돌아올 때, 그 씨앗의 생명은 온 세상을 덮는 기운차 것이 되리라.
“울며(울어야 한다. 씨앗을 뿌리는 일에는 눈물이 필요하니까) 씨앗을 뿌리는 자는(마른 땅, 절망의 땅이라도 씨앗은 뿌려져야 한다. 씨앗이 있어야 열매가 있으니까) 기쁨으로(눈물은 기쁨이 될 것이다. 눈물만이 참되고 흘러넘치는 기쁨의 이유가 될 것이니까)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그 씨앗은 ‘단’이 될 것이다. 거두는 자의 품을 한 아름 채우고도 남을 그런 풍성한 단이 될 것이다)”
- 최악의 절망적인 순간에도 주님은 구원자가 되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거기서 우리에게 꿈같은 기쁨을 주실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절망의 땅, 그 매마른 시간이 우리가 눈물로 소망과 믿음의 씨앗을 심어야 할 바로 그 옥토임을 잊지 말게 하소서. 우리의 눈물이 남방의 시내처럼 풍성한 강물이 되어 흐를 소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