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시편 127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세우고 지키는 일의 연속’이다. 무언가 세워지기 전에는 그것을 세우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서 세우기만하면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우는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세우고 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세울 때보다 더 조바심을 내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없을 때와 있을 때... 언제 우리의 마음이 더 평안한지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세우려는 노력이나 세워진 후에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나 그 모든 노력이 성공이 보장된 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세워지고 또 그렇게 세워진 것이 지켜진다면 그 누가 조바심을 내며 불안해 하며 집착할 것이고, 또 그 누가 실패한 삶을 살겠는가?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제시하는 세우고 지키는 방법은 단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하면 그래도 세우고 지키는 일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충고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세상에 세우고 지키는 방법 중에 ‘철칙’이라는 것이 있을까?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가 세우고 지키는 일을 책임질 수도 없고 스스로 보장할 수도 없다면 실제로 이런 일들은 우리 손에서 내려 놓아야 한다. 세우고 지키려는 노력은 하되 스스로 그 성공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태도를 연습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진실로 “현실적인”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현실적인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무엇이 진실로 현실적인 것인지 생각해 보라!)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일만해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이니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만으로는 견고한 삶, 든든한 삶을 보장할 수가 없다. 정직한 사람은 이것을 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태도만으로는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모든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는다. 여전히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지만 더 이상 그것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는 자신의 손에 있지 않기에 결과는 결과를 만드시는 ‘그 분’께 맡긴다. 여기서 평안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렇게 결과를 맡아주시는 분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그 분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한 내 삶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장소로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분에게 자신의 삶의 결과를 맡기는 일은 마음 넉넉한 일이며 무엇보다 든든한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그러므로...” 인생이 허무한 사람, 그 삶이 텅 비어 있는 사람이 평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삶의 열매를 만들어 내고 그 열매를 지켜내며 그래서 자신의 삶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허무할 수 밖에 없다. 왜? 겨우 그런 것들로는 결코 인간 존재 내면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채울 수 없으니까.(사람에게 온 세상을 다 주어보라. 그가 진실로 만족할 수 있을까? 평안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그 사랑으로 만족하며 그 안에서 쉬려고 하는 자들에만 평안이 주어질 수 있고, 또 그런 평안이 주어진다.
누군가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했던가? 그렇다!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들, 그 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잠꾸러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 분이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평안이 그를 평안한 밤잠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불면의 밤을 보내는 자들이여!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혹시 나의 불면의 이유가 여전히 내 삶을 내가 책임지고 열매를 내가 만들어 내려는 내 삶의 태도에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라!) 평안한 잠자리는 평안한 삶의 증거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삶을 통해 얻어낸 평안의 열매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 세상에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열매 중에 ‘자식’보다 귀한 열매가 또 있으며 그 열매보다 마음대로 맺기 어려운 열매가 또 있을까?(열매가 있는 자들은 그 열매를 쉽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열매가 없는 자들은 이 열매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잘 안다.) 그러니, 자녀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가장 귀한 “세워주심”이 아닐까? 또 그렇게 얻은 자녀를 “지키는 일”은 얼마나 쉽지 않은가?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 옛날에는 낳는다고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었고, 또 살아남는다고 해서 계속해서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얼마나 많았고, 그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부모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그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자라나서 화살 통을 채운 화살들처럼 건재하다면 그것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지켜주심”은 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인가!
사실 요즘도 종류가 달라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지켜주시는 일”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꼭 살아남는 일만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일만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쓰러뜨리고 무너뜨리려고 하며, 실제로 쓰러뜨리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자녀들이 그 어떤 이유로건 쓰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강한 “지켜주심”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분이 집을 세우셨고 그 집을 지켜주셨기 때문에 누리는 은혜이다.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요즘이야 자녀들 때문에 원수와의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구절은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삶 속에서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평강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원수가 이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할 때, 우리가 누리는 평강은 그 원수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평강으로 주어지므로 우리는 그 평강을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를 제압하는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삼아야 한다.
- 평안한 잠을 자는가? 그리고 건강하고 건재한 자녀들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워주심”과 “지켜주심”의 증거이다. 감사하라, 그리고 믿으라.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로 우리 믿음을 뒤흔드는 사탄의 거짓에 대항하라. 그것을 “장사의 수중의 화살”로 삼아서 “수치를 당하지 말라” 그러나 주의 해야할 것이 있다. 귀한 것일 수록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 그저 잠을 잘 잔다고, 그리고 자녀들이 건강하며 그들의 삶이 건재하다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워주심”과 “지켜주심”의 증거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는 것을 인정하고 삶의 ‘세움’과 ‘지킴’을 하나님께 의탁한 자들이 그러한 의탁함 속에서 누리는 잠과 자녀들의 건재함만이 엄밀한 의미의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세워주심”과 “지켜주심”이다.
- 하나님, 삶의 모든 결과와 그 결과를 지켜주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엄언한 현실을 항상 기억하며 인정하게 하셔서 스스로 세우고 지키려는 어리석고 공허한 노력들을 그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우심’과 ‘지켜주심’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시고, 항상 그 증거들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하늘에서 참되고 영원한 안식이 주어지기 전까지 그 평안으로 충분하며 또 그 평안만이 충분함을 알고 누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