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29-34절
우리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가장 손쉽고 정확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물론 어떤 책을 보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이지만, 사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힘으로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떤 책이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도움을 받으려고 집어든 책이 오히려 엉뚱한 정보만 주어서 우리를 영 이상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서점에 가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기도에 대한 책을 찾아보면 그것만도 수십 수백권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책들 중에서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것이야 말로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 분야의 권위자를 찾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아는 권위자가 없다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권위자를 찾아내고, 적어도 그가 쓴 책을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을 믿으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분이 우리의 전부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어렴풋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확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고 할 때도,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고 정확한 것이 되게 하려고 할 때도 우리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같은 그런 방법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권위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듣든지 아니면 그 권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남긴 정보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한 권위자와 그가 남긴 예수님에 대한 권위있는 정보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려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예수님 보다 앞서 와서 그 분을 이 세상에 가장 영광스럽고 정확하게 소개했던 사람이고, 다행히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그 증언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 빛을 증거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빛의 증거자로서 충실하고도 충분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야기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정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그 두 가지는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어린 양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분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려고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이라는 것을 지킵니다. 그 날은 1년 동안 이스라엘에 저질렀던 큰 죄들, 그 중에서도 직접 하나님께 대해서 저질렀던 죄들이 한꺼번에 용서받는,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최고로 은혜로운 날이고, 최고의 축제일이었죠.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로 양을 두 마리 잡습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제물로 제단에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양’이라고 해서 제사장이 그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죄에 짊어지워서 광야로 내어 쫓습니다. 그 양에게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임할 저주를 모두 떠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그 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깨끗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적어도 일년 동안은 말이죠. 그런데 이 두 마리 양은 원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갈갈이 찟겨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쫓겨서 혼자 헤매다가 죽을 그런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 양이 오셨습니다. 그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대속죄일의 두 마리 양의 역할을 영원히 감당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못에 밖히고 살이 찟겨서 모든 피를 다 쏟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마치 광야의 아사셀 양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온통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도 다 뒤집어 쓰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문 밖으로 내어 쫓기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뒤를 이어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두 번째 정보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은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물에 온전히 잠기고, 그 물로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실 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에 완전히 잠기어 충만하게 해 주시고, 그 성령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얼핏보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별로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역할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은 이 두 가지는 뗄래야 뗄 수 없게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따로 떼어놓으면 둘 다 망가져 버리는 한 세트의 보석처럼, 따로 먹으면 전혀 효과가 없는 두 가지 약처럼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실 뿐 아니라, 실제로 자녀로 살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법으로 삼아 살아가는 진짜 자녀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일에는 성령충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는 일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셔야 우리가 비로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 속에 아직 죄가 가득 차 있는, 심각하게 죄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의 영혼에는 충만하게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대속죄일의 어린 양으로, 그 옛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어쫓긴 아사셀 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시고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또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항상 기억해야 하며, 그것도 항상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는 따로 뗄래야 뗄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우리에게 두 가지 모두를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모여 생긴 교회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성령의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세례를 받았느냐?”하고 말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밟아야 할 수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나타내는 모습은 다를 수 있어도 성령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구원은, 죄용서는 약속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려는 전단계라는 것을 말입니다. 항상 성령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항상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그 분의 소욕을 따르므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