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0419to24 -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pdf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19-25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다른 종교의 신이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인데요. 이러한 하나님의 인격성은 사실 우리의 신앙을 다른 종교의 신앙과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무척 중요한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만들고 또 반대로 다른 종교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굉장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거나 정반대로 하나님께는 가장 중요한 일인데 나는 완전히 무관심해 질수도 있습니다. 실재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심을 항상 생각해야 하며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판단할 때 그것을 먼저 생각한 후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있었던 예배에 대한 아주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제기한 문제는 예배, 그러니까 제사의 장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는 예배는 꼭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야 하느냐, 우리는 대대로 여기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겨왔는데 왜 여기는 안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의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사마리아 여인은 이 문제를 방패로 사용하려고 제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가? 또 어디서 드리면 받으시고 또 어디서 드리면 받지 않으시는가? 이 문제는 무척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에 대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생각은 단지 장소에만 묶여 있었습니다. 예배의 장소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고 받으시고를 결정하게 하시는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언제나 생겨나는 문제가 있죠? 바로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배의 순서를 가지고 싸울 때, 예배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인간적이고 관례적인 기준들만이 득세하게 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어디”가 아니라 “누구에게”가 중요하다. 너희는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모양인데,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때가 온다. 그게 어디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때가 올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예배드리게 될 것이라고, 너희가 그 분의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또한 예배의 가족적인 차원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아버지와 자녀들이 한데 모이는 행위입니다. 왕되신 아버지의 은혜의 식탁에 그 분의 자녀인 우리들이 모여앉아 그 풍성한 하늘의 진수성찬을 함께 즐기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이미 왔습니다. 이미 주님은 양자의 영을 보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관계가 망각되면, 이 관계가 가져다 주는 그 풍성한 교제가 사라지만 예배는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물론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니 완전히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절차도 중요합니다. 장소도 중합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화장실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챙기느라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이고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아무리 화려하고 격식있게 드려지는 예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것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들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이 구절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메시야를 아는 것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아주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 자신이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지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반대가 됩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예배도 바리새인들의 예배도 온전한 예배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아주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말씀하셨으니 이제 주님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식을 가지고 드리느냐 하는 것보다 과연 그 예배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고 그래서 그 분께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뒤쪽이 만족되면 앞쪽은 조금 부족해도 괜챦지만 뒤쪽이 만족되지 않으면 앞쪽의 것은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참되게’ 드려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여야만 합니다.
영은 성령을 뜻합니다. 뒤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예배들여야 한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이 말은 다름 아닌 거듭남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 참된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람, 성령 안에서 속 사람이 새로 태어난 사람, 그래서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배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 분의 자녀들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거듭나지 않고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분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고 어찌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배는, 참된 예배는 참된 자녀들, 하나님을 진실로 자기 아버지로 인식하는 양자의 영을 지닌 자들의 몫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가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참된 예배를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은 그 예배가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드려져야만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위에서도 주님은 사마리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모르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자녀들이 드리는 것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예배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리가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 분의 성품, 그 분의 법,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성경을 통해서 될 수 있는대로 바르고 정직하게 선포되어야 하며, 성도들 또한 예배를 통해 이런 것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예배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그렇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는 아버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아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배가 참된 예배자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말고, 그리심 산의 성전에서도 말고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그 때라고, 이제 그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디서 예배를 드리게 될까요? 그저 아무데서나 드리면 될까요? 이 구절은 그런 말씀같지만 실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거하는 성전으로,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참된 성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질 참된 성전이 세워졌으니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예배가 드려질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산도 아닌 제 삼의 장소에서 드려야 합니다. 그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그 분 안에서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예배만이 참되 예배가 됩니다. 그 예배만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됩니다. 이것은 옛날의 이스라엘이 제물인 양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를 위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고,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해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참된 예배자는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람입니다. 진리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그 분 안에서,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런 자녀들에게 예배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시며, 또 이런 자녀들을 기뻐 받으십니다.
여인은 예배에 대한 질문을 방패로 사용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여인의 진짜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는 참된 예배자가 될 때라야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에게 예배드릴 때, 바로 거기서 그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들 모두를 위한 가장 기쁜 잔치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예배자가 되어서 예배를 통해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하늘의 풍성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