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46-54절
제가 전에 신문에서 아주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국에 살던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겪었던 해프닝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미국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살면서 이웃에 이사온 한국사람이 나눠준 김치를 먹고서 그 맛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불편을 줄이려고 한글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드디어 한국에 들어오게 된 그 사람이 처음 찾아다닌 것은 당연히 김치였다고 합니다. 그 때만해도 반찬가게도 별로 없고, 마트도 없던 시절이라서 김치를 어디서 파나 헤메고 다니던 그는 드디어 김치를 파는 곳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더듬거리며 김치를 파느냐고 물었는데 이상하게도 김치를 팔지 않는다고 해서, 분명히 김치를 판다고 써 있어서 들어갔기 때문에 왜 팔지 않는지 이상하게 여기며 그 곳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어서 혼자서 깔깔대고 웃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보았던 간판에 무엇이라고 써 있었을까요? 그 간판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합니다. “김치과”
아무리 간판이 정확하게 써 있어도 그 간판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면 그 간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표지판이라도 그 표지판의 그림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 중요한 메시지를 놓여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외국에 갔다가 교통 표지판을 읽지 못해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니 표지판을 보고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갈릴리에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가나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는 가나가 어떤 곳인지 잘 압니다. 그 곳은 예수님께서 친척의 결혼잔치에 참석하셨다가 처음으로 표적을 행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 기적은 하늘나라가 얼마나 풍성한 곳인지, 하늘나라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지판으로 그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 표지판을 알아보지 못한 채로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다시 그 가나로 들어가신 예수님께 왕의 신하가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다급한 이유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되었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너무도 다급하게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와서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 신하의 귀에 이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은 그를 따라가실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다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 급하게 달려왔는데, 그 아이가 지금은 살아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야기를 들은 신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방금까지 아들이 죽기 전에 빨리 내려오셔서 고쳐달라고 애걸하던 아버지가 그 말 한마디로 아들이 나았다는 것을 믿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집으로 가던 도중에 자기를 찾으러 오는 종들을 만난 신하는 깜짝 놀랍니다. 들어보니 아들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그 아이의 열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각과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았다고 하신 시각이 일치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이 일의 결론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갈릴리 지역에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가나에서 예전에 행했던 일들도 이제는 다 알려졌을 것이 분명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새 예수님은 그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또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할까 하여서 예수님을 좇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가나에 갔을 때에 그 신하를 만났던 것입니다. 간청하는 그를 따라 나서는 대신에 사람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이들이 표적과 보아야만 믿으려 할 정도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실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보여주어도 너희는 믿지 못할 것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표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표적은 표지판입니다.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목격한 것이 표적을 본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 기적을 통해 하늘나라를 보아야 비로소 표적을 본 것입니다. 갈리리의 유대인들은 결코 표적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하를 따라 나서는 대신에 그저 말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그런데 그 신하는 그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듣고 믿었을 때, 그 때 아이가 낫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 사실로 인해서 온 가족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것은 신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치료를 경험한 것도 신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되는 특혜를 받은 것은 그 지역 전체의 유대인들 중에서 신하의 말을 들었던 그의 가족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꾸지람만 듣고 예수님께서 신하에게 해 주었던 짧은 말만 들었을 뿐 아무 것도 듣거나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하는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서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 들음에서 하늘나라의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생기면 눈에 전혀 보이는 것이 없어도 마음은 평강을 누립니다. 조금전까지 높은 풍랑이 일었던 바다가 고요한 호수처럼 변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표적을 보지 못합니다. 기적이 진짜로 이야기해 주는 것을 결코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호기심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주는 유익은 하나도 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평안 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마저도 놓치고 맙니다.
사실 누군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그 사람의 말만듣고 믿는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믿고 거짓이 없는 신실한 성품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신하의 경우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더하여 그 사람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그의 믿음이 이 모든 것을 포함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호기심만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믿는 믿음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운 일들도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겨나야 참된 믿음이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듣고 생겨나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 될까요? 그것은 그 말씀을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그 속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믿음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될까요? 그것은 바로 신하의 경우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평안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성품과 능력을 모두 믿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가를 보면 됩니다.
표적을 보려했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얻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는 믿고 가다가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표적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표적을 보려는 사람은 결코 표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의 눈에는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표적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표지판이며, 우리 영혼을 놀라게 할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표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을 위한 표지판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 주며,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 불가사의한, 그렇지만 진정한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게 해 달라고 하지 마시고, 믿게 해 달라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믿음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보려는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적도 보고 표적도 보게 될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믿는 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참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참된 이적,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표지판을 제대로 읽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가운데서 기이한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