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0641to51 -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pdf
본문 : 요한복음 6장 41-51절
제가 목회자로 일하면서 거듭 거듭 확인하게 되는 아주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다행스럽게도 아주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처음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다가도 영생이 무엇인지 왜 영생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거듭거듭 말해주면 서서히 영생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는 성도들도 생겨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이야기 해도 전혀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목회자로서 이것보다 안타깝고 또 크게 좌절을 느끼는 일이 없습니다. 장기간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되면 정말 벽을 만난 것 처럼 힘이 다 빠지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도 여러분, 영생의 문제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그런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놓고 왈가왈부하거나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접어놓아도 될만큼 부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이유와 관련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영생에 대해서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이 멀리 떨어져서 이러쿵 저러쿵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영생을 가볍고 하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영생을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군거림은 예수님께서 과연 그런 생명의 떡이나 아니냐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자신들과 함께 있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자기들 옆에 있었던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 중에서 더 무게를 실어서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뒤쪽,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떡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붙들고 늘어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정말 예수님이 영생을 위한 생명의 떡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영생의 문제는 수군거림으로는, 그저 호기심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으로, 영생을 위한 하늘의 양식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 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문제이니만큼 그러한 결단만이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수군거리는 자들은 수군거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있는지 아닌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메시야에게로 이끌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속해 있는지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예수님께로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이전에는 구경꾼으로 있었을지라도 막상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는, 영생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는 가르침을 들으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셔서 지키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며 또 결국 부활하게 하실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진짜가 무엇인지를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평상시의 신앙의 특징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또 배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고 듣고 배우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 참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굉장이 큰 차이가 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같은 말씀을 보고 또 연구해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만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씀을 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정말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서 그것을 발견하고 또 듣기 위해서 정말 정직하게 투명하게 말씀 앞에 섭니다. 그게 사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메시지를 성경에서 찾아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직접 듣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하고도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앞쪽에 속하는 사람들은 진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조차도 진짜 예수님을 발견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고, 영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어도 관심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쪽에 있는 사람은 성경 속에서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믿음을 더합니다. 그래서 참된 메시야를 믿고 성경이 말하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또 영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이 살아나고 눈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 속에 있는 영생을 아는 영혼이 그런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됩니다. 더욱 더 예수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점점 더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만이 영생을 가져다 주는 영원한 양식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만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뿐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은 자는 다 죽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은 거기에만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현실적인 복들도 엄밀하게 말한다면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리 좋아도 기껏해야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맛있고 희안한, 40년 동안 변함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여 살린 양식이었지만 결국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는 끊어져 버렸고 그것을 먹은 사람들도 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만나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최고의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늘에서 주시는 최고의 양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와 달랐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주어진 최고의 복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모든 영혼들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꼭 먹어야 하는 다른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사용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영생을 누리기려면 꼭 기다리고 소망해야 하고 또 먹어야 하는 하늘의 참된 양식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시려던 만나는, 참되고 영원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 분이야 말로 모든 영혼들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 꼭 먹어야만 하는 하늘의 만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우리는 여기에 와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영생을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던 말씀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그 분이 우리의 영생을 위한 떡이 되시는 이유는 그 분이 십자가에서 그 분의 살을, 그러니까 그 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찟겨나간 그 분의 살점 사이로 흘러나왔던 그 분의 보혈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주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양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떡이라고 하셨던 모든 말씀들은 줄곧 이 십자가를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듣고 배운 영혼들은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가장 기뻐합니다. 가장 행복해 하고 가장 소망스러워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은혜 안에서 가장 크게 배불러 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믿음으로 영생을 위한 영원한 만나를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기쁨이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이끄시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그 행복함과 그 소망이 우리가 영생을 얻고 주님처럼 부활하게 될 사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생각은 온통 광야의 만나에만 묶여 있는 듯합니다. 그저 먹고 배부르는 그런 복들을 향해서 고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영원한 하늘의 만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짜 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날 때, 거기서 영생을 위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고, 영혼이 크게 만족하며 기뻐 뛰는 그런 복을 알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무슨 소린지 몰라,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인지 몰라 수근거리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 분이 전해주는 말씀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당장은 그게 부담스럽고 힘들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참되고 영원한 생명양식 앞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만족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뛰게 하는 이유가 되어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눈을 여셔서 우리 예수님이 진짜 만나라는 것을 보게 하시고,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게 하셔서 우리를 참된 영생의 확신과 기쁨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며, 참된 영생과 부활을 얻게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