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요한복음 7장 14-24절
같은 길을 가는 사람,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아봅니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는, 때로는 생전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이 만나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생전처음 만났는데도 많이 본 듯합니다. 또 이야기를 시작하면 살아오면서 나눈 공통된 경험이나 시간이 없는데도 십년지기 친구들처럼 자기 속마음을 터놓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면서 오랫동안 기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죽마고우를 만난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다 같은 길을 가면서 같은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다른 랍비들처럼 랍비 학교에 입학해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빈민촌이고 우범지대로 여기며 하찮게 생각했었던 갈릴리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이런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이 꼬리표처럼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옷차림은 항상 남루했고 따라다닌다는 사람들도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는 예수님은 형편 없는 동네의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들으니 그 속에는 여느 랍비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교훈과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이히’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기이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사실 사람들이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들어보고 그 교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메시지도 받고 전하는 사람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교훈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교훈과 전하는 사람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출신과 겉모습에 대한 편견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스스로 진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분별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진리대로 살아 본 사람입니다. 아니 적어도 지금 진리대로 살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가 들려질 때, 그것이 참된 진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 알아도 잘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그것이 길이 아니라고, 그러니 빨리 그 길을 돌이키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까? 왜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고민과 열망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고민하면서, 그 위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분명한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자신이 진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편안하게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고민스러운 종교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진리입니다.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본성, 내 삶을 하나님의 진리 앞에 가져와서 비춰보아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고민스러운 종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 안에는 이런 고민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 있는 것도 사실있지만, 이런 고민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이야 말로 우리를 진리에 속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분별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망하지 않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행동과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인 즉,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예수님 스스로를 높이며 스스로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불리하게 하고,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들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축소하고, 잘 한 것이 있으면 부풀리는 것, 이익이 되면 말하고 불리하면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을 들기 위해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유익과 영광을 완전히 포기하는 방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부딛히는 돌이 될 것을 알면서도 가감이 없이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들을 귀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예수님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편견에 가려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진리 때문에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것은 일이고, 저런 것은 일이 아니라고 세부적인 조항들을 마련해 놓고 그것 들 중 하나라도 어기면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세부규정에 의하면 병자를 고치는 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에 속해 있었습니다.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삼십 팔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 때부터 예수님을 죽일 구실만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일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실 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한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할례법을 지키려고 안식일을 범하는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도데체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규정해 놓은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실 안식일에 하면 안되는 ‘일’들, 그것은 철저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규정을 만들고 적용하면서 ‘안식일 준수’를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안식입니다. 쉼입니다. 그러면 병든 자, 그것도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참된 안식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병의 치유입니다. 그 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이 병자는 참된 안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 할례를 주고 받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람을 고치는 일은 일로 정해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치는 행위만 보았지, 그 행위를 통해서 치유를 받고 참된 쉼을 얻는 아픈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아픈 사람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해서 그를 고치는 일, 이것이야 말로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난하기 보다는 칭찬하고 권장해야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니냐는 규정에 묶여서 예수님이 하신 일의 참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겉모습을 보지 않고 공의로운 판단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판단기준으로 삼으시는 사람의 마음과 동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에 행동은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질서와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 규정을 세웁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이 규정은 죽은 규정이 되기 쉽습니다. 단지 규정이 있으니까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규정을 지키는 그런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그 규정을 어기는 사람은 무조건 정죄합니다. 그 사람의 동기나 원래 그 규정이 세워진 이유나 정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쯤되면 사람을 살리는 게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게 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의 희생자가 되어 계셨고, 바로 이 문제를 언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저 자신만 보더라도 마음이나 동기를 깊이 헤아리려 하기 보다는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는 그런 판단이 앞설 때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공의로운 판단을 세울 수 없습니다. 정당한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의 판단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러한 판단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완전한 자들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이나 일상적인 일의 판단에 있어서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주의 깊게 듣고 보아서 공의의 판단대로 판단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내가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기준 위에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나에게 오류와 편견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해서나 일상생활에 대해서 항상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 겸손해야 합니다. 신중하게 마음이나 동기를 헤아리려는 마음으로 듣고 또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진리 편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붙들고 고민하며, 또 그 진리대로 살려고 그 삶을 통해서 진리 편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 편에 더 확실하게 속해 있을수록 나의 판단도 더욱 진리에 가까운 판단이 될 수 있고 그 판단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판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진리에 속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온전한 귀와 더 온전한 눈으로 진리와 세상을 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