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7장 25-30절
요한복음은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진리 자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쓰여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복음이 쓰여진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이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대항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은 쉽게 말해서 소수만이 알 수 있는 진리, 그러니까 직통계시가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아는 것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종파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정통 기독교의 진리와는 전혀 달랐지만, 또 그것을 아는 방법에 대해서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성도들을 이런 이단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만이 진리라는 사실과 앎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리를 아는 방법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진리가 진리임을 아는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는 것이 바로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는 것이 되는데, 그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이미 진리,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라는 근거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진리 자체를 분별하는 방법 또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것과 더불어 중요해 지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는 일을 방해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방해물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치워버리면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이 굉장히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 정확하게는 유대의 당국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의 주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나 정통파라는 자부심이 굉장했습니다. 특히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유대인 당국자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겠다가 달려든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과의 말싸움에서도 이기지 못하니 그것이 굉장히 한심했고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들을 이렇게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는가?” 그러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이 사람의 이야기인즉,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것 하나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말들이 다 필요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어디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만으로도 그는 절대로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서 믿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는 결코 어디서 오는지 알게 오지 않고 또 진짜로 이 땅에 왔다고 하더라도 엘리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그 시점까지는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입니다. 그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이미 자신을 드러내며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이라는 위업에 비한다면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절대로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리고 믿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그러한 이야기가 틀린 것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오히려 그 아는 것 때문에 메시아를 절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그런 이야기 자체가 전혀 성경과는 상관 없이 그저 사람들이 이리 저리 만들어낸 ‘속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메시아에 대한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시는 순간까지 숨어계신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메시아를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예루살렘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응수하셨습니다. “너희 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말이 맞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식이 정확하다고 이야기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만약 진짜로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서 온 것을 안다면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줄 알아야 하고 또 내가 누구로 부터 난 자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너희는 참된 하나님을 모르니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사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정확했습니다. 나사렛 출신입니다. 별로 배운 것도 없습니다. 훌륭한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드러나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아니 믿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속설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너무 너무 자신있게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일수도 있다는 가능성 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속설이 진리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속설을 알고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속설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했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이미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수많은 속설들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참된 진리를 향해 가는데 굉장히 많은 방해를 받았고, 실제로 신앙 자체가 비뚤어 지기도 했습니다. 참된 신앙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너무 굳어지고 또 굳어져서 아얘 성경의 가르침보다도 더 권위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라 우리도 모르게 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냥 그것을 믿게 되기가 쉽습니다.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이죠. 대개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입맛에도 잘 맞아서 혹하기 쉽기 때문에 더더욱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신앙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리기도 하고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 때, 교회 안에는 “예수 잘 믿으면 복받는다.”는 이야기가 거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복이 하늘의 복이라면 이 말은 틀림없는 진리가 되고 아무리 믿어도 부작용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지만 이 말은 사실 단 한 번도 그런 의미로 진지하게 사용된 적이 없어서 문제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해서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처음에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계속 이 말이 들려지고 또 들려지기 때문에 어떤 성도건 이 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신앙을 망가뜨립니다. 첫째는 이것이 신앙생활 하면서 눈에 보이는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열등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복 못 받는 것은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이것이 정말 위험하고 심각한 것인데, 그저 눈에 보이는 복 많이 받으면 그 사람은 자신을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은 예수 잘 믿어서 저렇게 복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복이 신앙의 호불호를 가리는 가장 확고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이 잘못된 신앙의 속설은 아직도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아주 심각한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모든 질병은 이리 저리 모습을 바꾼 이 근거없는 속설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치료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교회 안에, 우리의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확인되지 않은 속설들, 그렇지만 철석같이 믿어지고 있어서 참된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 속설들은 너무 너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절대로 ‘카더라’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듣기 좋다고, 그럴듯하다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게다가 내 입맛이 맞는다고 정확하게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 성경에 들려오는 ‘속설들’과 ‘그럴듯한 주장들’을 걸러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름망을 통과한 속설들만을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확신은 그것이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의 확신이 바른 것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면 그 확신이 우리를 더 심각하게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꽉꽉 믿는 그 믿음이 우리 영혼을 뒤틀어지게 할 것입니다. 최대한 냉정하게 성경을 보시고, 최대한 정직하게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은 속설들을 걸러내는 안전한 거름망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 눈에 가리운 희미한 것들을 치워주고 우리를 명확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날마다 더 진리에 예민해 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날마다 더 진리에 대해서 명확해 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들려오는 신앙의 낭설들을 걸러내시고 참된 진리 안에 안전하고 풍성하게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