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0206to16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고전10).pdf
본문 : 고린도전서 2장 6-16절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는 평가까지 얻었던 스탠리 존스라는 인도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우연찮게 그 분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전기까지 찾아 읽으면서 어떤 면에서는 그 분이 정말 그런 칭찬을 받을만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의 전기 속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분은 인도에 있을 때, 복음을 전하면서 인도의 전통종교나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결국 예수님이 중심을 차지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로운 까닭은 내가 예수님을 변호하고 증명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나는 그 분을 전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태양을 향해서 진흙을 던진다고 해서 태양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양은 여전히 빛난다. 방어는 태양의 몫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변호하시고 증명하신다. 왜냐하면 빛이 눈을 잡아 끌고, 사랑이 마음을 잡아 끌듯이 그 분도 영혼들을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텐리 존스 선교사의 글 위로 바울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에 온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났고 지식이 탁월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철학, 수사학, 율법 등. 당시 유대와 헬라의 모든 학문들을 섭렵하고 있었고 그런 것들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복음이 있는 그대로의 복음으로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십자가의 복음처럼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모습으로 전해주고 싶은 유혹도 있었겠지만 바로 그 거친 십자가의 복음 속에 사람을 구원하는 완전한 능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고린도라는 도시가 경제적으로 무척 풍요롭고 학문적으로 매우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100퍼센트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많이 알게되고 또 많은 것을 가지게 되면 거의 항상 보이게 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라는 도시는 교만한 도시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런 고린도 사람들에게 맞게 복음을 요리해서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교만함을 인정해 주는 것이고 그들에게서 교만을 포기하고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위하려고 하다가 복음을 망가뜨리고 그들이 참된 복음으로 거듭나게 되는 일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고 또 무시를 당할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특별히 고린도에서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거칠고 투박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우리나라는 적어도 겉으로 보면 고린도를 굉장히 많이 닮아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모두들 자신의 지혜를 믿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대개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기호에 맞게 조심스럽게 잘 포장되고 맛있게 요리된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전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 자체가 흐려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복음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만 구원얻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담대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이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담대하고 확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릴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생겼습니다. 그런 복음을 듣고서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 중에서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복음 자체를 부끄러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부끄러워한 것은 복음이 요구하는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어리석게만 보이는 복음을 통해 믿음의 길로 들어왔다는 것은 세상이 지혜롭다고 하는 삶의 방식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어리석은 십자가의 복음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제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고, 또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되기 시작하자 또 다시 예전의 삶의 습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서로가 자신을 굉장히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는 바로 고린도 성도들의 이런 모습 때문에 생겨난 부산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삶이 잘못되는 이유들이 참 많습니다만, 그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말의 뜻이 잘못되어 있을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혜라는 말을 교묘한 처세술과 같은 말로 이해한다면, 그는 오히려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세속적이고 교묘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순전히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그는 그저 감정에 따라서만 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또 헤어지기도 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이혼하는 일을 굉장히 쉽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랑 없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강한데, 그 사랑이라는 말을 철저히 감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있을 때는 물고 빨고 난리를 치지만 그 감정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삐둘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 신앙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어들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단어들 중에서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지혜’라는 단어였고, ‘영적이다’라는 말과 ‘성숙’이라는 말도 그런 단어들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이런 단어들의 의미가 심각하게 비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잘못된 표지판을 가지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열심히 가면 갈수록 원래 가려던 목적지에서 더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잘못된 표지판부터 바로 세워주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이 세 가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참 지혜롭다’느니, ‘저 사람은 영성이 뛰어나고 참 영적’이라느니, ‘저 분은 참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말이기도 하구요.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에는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면 비뚤어진 표지판을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진짜 지혜가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지혜의 첫번째 특징은 그것이 세상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란 그 당시에 유행하는 사고방식과 학문적인 흐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지혜란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지혜는 이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참된 지혜를 얻고 진짜로 지혜로워지려면 우선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혜에 있어서는 출발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써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창세전에 미리 정해져 있었지만 하나님이 완전히 꽁꽁 감추어 놓았던 하나님의 지혜가 진짜 지혜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분이 없으니 하나님이 지혜가 지혜 중의 최고 지혜이고 진짜 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너무나 심오하고 탁월한 지혜이기 때문에 사람은, 심지어는 사탄이나 천사들까지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추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려고 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람의 지혜로는 결코 영광스러워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짜로 영광스러워지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 놓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제 바울은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무엇이 만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던,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지혜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험악하고 잔인한 십자가, 그 불의하고 부당해 보이기만 하는 십자가, 승리가 아니라 완전한 패배로 밖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내세우며 사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깨닫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적인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러면 과연 누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로 깨닫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 해답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를 지혜로 알아볼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해답은 성령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십자가를 혐오하거나 혹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를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려면 누군가가 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다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은 성령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셔야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고, 또 복음을 들려주어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하기 시작하고 또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그가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이 역할을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어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눈으로 복음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복음의 초보’입니다. 그게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며 그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십자가 안에서 더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해야 하고 또 배워가야 하며, 결국에는 그 지혜를 우리의 지혜로 삼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님께 속해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나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상에 대해서 쓰는 말이 아니라 실은 단순하게 성령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13절의 말씀은 성령님께 속한 일은 성령님께 속한 기준이 있는 사람만이 분별해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짜 지혜를 계속해서 알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님께 속해 있는 사람, 항상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는 성령충만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은사의 형태로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충만함을 은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있는 사람은 어쨋든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은사를 생각할 때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는 철저히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성령충만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은사는 탁월한데 도덕성도 부족하고 인격도 그저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는 그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철저히 ‘기능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성격은 엉망이어도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나, 인격은 괴퍅하기 짝이 없지만 머리는 비상한 사람들 또한 얼마든지 있습니다. 은사와 성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을 때, 혹은 다른 사람이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이나 그 사람을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단의 교주가 되거나 교계에 무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은사 자체는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의 참된 영성이나 성숙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혼란에 빠지고 미혹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게 되니까요.
성령충만함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복음 안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더 많이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성령충만한 사람, 그리고 진짜로 성령님께 속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지혜를 더 깊게 깨닫게 되고 그래서 복음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성령충만함의 진짜 표지입니다. 은사는 그 사람의 성령충만함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로 성령충만한가를 보려면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지, 복음을 기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사람이고, 그러면 그 사람은 복음을 기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고 또 설교를 통해 듣게 될 때, 우리 속에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영혼, 성령충만한 영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십자가의 복음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될 것이며, 그럴 때마다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와 복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예민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을 비춰주는 가장 정확한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영혼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되고 또 계속해서 배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계속해서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성령충만한 영혼은 십자가를 계속해서 기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일어나게 되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인 이유는 거기 예수님께서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모든 마음이 베어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만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진심을 보고서 거기 반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그 겸손함, 그 순종, 그 용서, 그 기쁨, 그 풍성함, 그리고 완전함...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예수님의 성품을 만날 때 그 사람은 예수님께 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모든 예수님의 성품이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럽게 드러난 곳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은 기뻐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또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기뻐하면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러면 돈을 닮아갑니다. 권력을 기뻐하면 권력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러면 권력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돈과 권력에는 마음도 인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은 무정하고 비인격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기쁨을 얻는 자들은 결국 십자가를 닮게 되어 있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영광스럽게 회복되게 됩니다.
진짜 지혜라면 그 지혜는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또 그 지혜를 붙들고 살 때, 그 유익함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망쳐놓거나 그 지혜를 따라 사는 것이 이 땅에서는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온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망가져 버린 자신과 영원한 부끄러움 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도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런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지혜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존재를 위한 최고의 지혜도 담겨져 있습니다. 항상 성령충만함 가운데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를 계속해서 배우시고 또 흉내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해 줄 것이고 또 가장 행복하고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지혜가 주는 이 놀라운 복을 놓치지 않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