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9장 01-10절
목회를 하다보면 이러기도 힘들고 저러기도 힘든 참 난감한 일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후임자로서 전임자의 사역과 가르침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 다른 목회자들의 가르침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그렇게 자기 이전에 성도들을 가르친 목회자들과 또 다른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내용들과 다른 이야기를 해야할 때가 있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분들이 가르쳤던 것이 제가 가르칠 내용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 분들이 모두 목사가 아니다, 목사의 자격이 없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분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이지 않거나 바른 것이 아닐 때, 그리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뭔가 빈 구석이 많다고 여겨질 때, 제가 그런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대개 이전 목회자의 가르침이나 그래도 영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목회자들의 말을 거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분들의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혹은 부족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굉장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가 크게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부작용과 난처함이 있다고 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틀린 것은 고쳐 주어야 하고 또 부족한 것은 채워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고민이 있지만 그래도 항상 그 일을 제대로 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누구도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모두 그리고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바른 진리를 배우고 알아가야 하고 또 부족한 지식들을 더 온전하게 채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아볼로는 구약성경에 대해서 참 박식한 사람이었고 또 언변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선생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바울과 견줄만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세례 요한의 세례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예수 믿은 후에 받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에베소에 와서 꽤 오랫동안 복음을 전했고, 그러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비로소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포함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그 이전까지 그가 전한 ‘요한의 세례’만 들어있는 복음을 수정해서 가르칠 충분한 시간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도 성령님의 인도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갑자기 아가야 지역, 그러니까 고린도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할 사정이 생겼고 그래서 에베소를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볼로가 고린도로 간 후에, 바울이 윗 지방 그러니까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거쳐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 왔습니다. 에베소는 예전에 바울이 잠시 들러서 복음을 전했던 도시였는데요.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거기서 성경이 ‘어떤 제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 무언가가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것만큼은 확실한데 말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말입니다. 바울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들이 왜 성령의 계심을 듣지 못했을까요? 예수를 믿었는데도 말이죠.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아볼로가 성령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하니 성령님 자체를 몰랐을 리는 없지만 그 성령님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은 몰랐고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고린도로 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항상 이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나 항상 불완전하고 부족하지요. 인간은 모든 진리를 한 번에 알고 깨달을 수 없고, 또 모두 한꺼번에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전혀 오류가 없이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 부족함을 채워가고 틀린 것을 고쳐갈 시간과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아볼로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로가 필요했고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는 바울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빈 곳을 채우고 틀린 곳을 바로 잡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시간이 바로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지요. 그런데, 이 시간이 사람을 저절로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며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그런 고마운 역할을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가 시간 속에서 점점 더 온전하게 만들어져 가고 다듬어져 가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고치고 채워가는 일에 대해서 겸손해야 하고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떤 제자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게 뭐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냐. 난 더 이상 필요 없다. 믿으면 되지 다른 것을 더할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의 이야기를 거부했다면 그들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신앙에 대해서 우리도 모르게 하는 실수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실수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 믿음이 전부고 자신이 그 믿음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은혜와 능력이 예수 믿는 믿음이 주는 전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져 가는 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온전한 정도에 따라서 경험할 수 있는 예수 믿는 믿음의 능력과 은혜도 한이 없습니다. 크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이와 풍성함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은 정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최고급 부패식당에 가서 흰 쌀밥만 계속 퍼다 먹으면서 난 이제 배가 부르니 다른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능력 없고 빈궁하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크게 손해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들은 이미 회개하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지만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에게 정말 놀라운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그 즉시 그들 위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셨고 그래서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의 숫자가 열 두 사람쯤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이 이후에 열 두 사람의 신앙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때와 같았을까요, 달라졌을까요?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약속된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았으니 성경의 약속, 그것도 가장 중요한 마지막 약속이 성취된 증거를 그 몸과 마음 속에 지니게 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주로 성령의 내주와 충만한 임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이 두 가지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를 믿는 참 믿음이 생기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거듭난 새 생명이 있기 때문이며, 그 생명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그런 참된 고백이 있는 사람 속에는 이미 성령님께서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저 이렇게 모든 성도들 안에 일반적으로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것과 어떤 성도가 그 성령님께 사로 잡히게 되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며 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어서 그 누구도 이런 은혜를 받는 시기를 자기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성령님의 그런 충만한 임재를 허락해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선지자 요엘의 예언처럼 모든 사람이 성령충만해지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시고 또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한 상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하는 사탄과 이 세상의 거센 공격을 견디어 내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함의 증거,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성도로 사는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저에게는 왜 이렇게 안타까움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제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살펴보면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너무 자기 마음과 생각에만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만 자기 믿음의 확실함을 묶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고 확실하고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 당사자가 그 고백만으로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백만 있는 믿음, 고백으로만 만족하는 믿음만으로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주변의 공격에 대해서 언제나 흔들리기 쉬운 믿음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며 사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구요.
물론 우리가 성령충만함의 증거를 꼭 눈에 보이는 어떤 이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언이나 예언같은 은사들로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과 평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 그리고 자신의 삶과 존재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싶은 열망 등. 우리가 자연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내면적인 변화들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고 계신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가 어떤 모양이든 분명한 사실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증거는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증거들을 더욱 더 크고 풍성하게 지니고 또 누리기 위해서 애쓰고 추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참 안타까운 기록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어느 도시에서나 있었던 일이지만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달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계속 강론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핵심이니 이 말은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더 마음이 굳어져서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복음을 반대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이방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자기가 누리는 은혜 보다 더 깊고 풍성한 지식과 은혜를 향한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그 은혜와 더 온전한 지식에 반응을 보이고 기뻐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나서 더 원하고 더 구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 정도의 마음도 없다면 우리들 또한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도 오히려 마음이 굳어진 그런 사람들과 같아질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은혜와 진리는 무관심하고 거부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겸손하게 열린 마음! 참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마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이 마음이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더 깊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제자들과 회당의 유대인들은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은 같은 복음을 듣고 성령의 충만함을 선물로 받았지만 다른 한 쪽은 반대로 그 마음이 더 굳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항상 우리 주님과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겸손하게 열린 마음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더 온전한 새로운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는데 마음이 닫히게 하지 마시고, 더 깊고 풍성한 은혜를 받고 누리는 일을 향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더 깊은 은혜를 허락하실 때, 그 놀라운 복을 놓치지 않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