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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9.18. 금요기도회 - 이 도로 말미암아 소동이 있었으니(사도행전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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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9장 21-27절




바르게 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일 자체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또 오히려 상황이 더 힘들어 질 때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나 세상으로부터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좌절을 하거나 화를 내게 되지요.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하면 잘 될거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성공할 거다라는 고정관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리고 성경도 우리에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형통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오는 형통은 그저 잘 되고 성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형통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 된다는 뜻이구요. 물론 아주 길게 보면 분명히 형통합니다. 그런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결국 영원한 하늘의 영광이 주어지게 되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영원히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현실적인 형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갔던 삶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승리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계속 살펴 보고 있듯이 사도행전은 그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사도행전은 그런 사도들의 발걸음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지만 그 다음에는 또 다시 커다란 위험과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처럼 대접받을 때도 있지만 정반대로 생명을 잃게 될 일촉즉발의 위험 앞에 서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이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성경을 정말 좋아합니다. 성경은 듣기 좋고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정직합니다. 절대로 믿음으로 사는 삶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에 대해서 아주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가장 어두운 순간도 거기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인생을 보는 사람들은 절대로 섣부른 기대나 장미빛 꿈에 빠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눈을 성경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진짜 목적은 소위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에게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주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서 장미빛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분노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에베소 전도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쓰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덮으면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갈 정도였으니까요. 마술사들은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마술책들을 불태우며 지난 삶을 회개했습니다. 시민들은 바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며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지요. 이렇게 보면 이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 도시가 예수를 믿고 기뻐하더라” 물론 복음은 점점 더 확장되어져 갔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로마로 가려는 계획이 있었으면서도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만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신은 잠시 아시아 지역에 더 머물러 있으려고 했겠지요. 그렇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복음이 제대로 전해질 때, 세상이 취하는 전형적인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처음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이 자신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을 때는 세상도 가만히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런 저런 선한 일에 대해서 칭찬도 하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그 복음이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래서 자신에게도 어떤 모양으로건 그 여파가 미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나 흔히 목격되는 일입니다. 아내가 조금 믿는 일에 이전보다 열심을 내면 남편은 말합니다. “교회다니는 것은 좋지만 적당히 해라.” 부하직원이 믿는지 안믿는지 표시가 나지 않을 때는 그 부하직원을 칭찬하고 좋아하던 직장상사가 그 부하직원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기 시작하면 오히려 그 부하직원을 힘들게 하기 시작합니다. 부하직원이 신앙 때문에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회사 일에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닐 때에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세계가 달라지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달라지게 되는데요.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되고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구체적이고 거친 액션을 취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서 복음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고, 그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직접 간접으로 불의한 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삶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어쩌면 내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며 따를 때, 언제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의 현실이니까요. 


에베소에 그리고 아시아에 점점 더 복음이 널리 퍼지고 그래서 우상숭배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일은 그냥 좋기만 한 일 같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고, 또 생명의 소식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살린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게 한 사람이나 혹은 몇 사람일 때는 괜찮았지만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실제로 그 동안 자신이 얻고 있었던 이익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당시 은 세공업자인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지역의 직공들을 고용해서 은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아 자신도 많은 돈을 벌고 또 직공들에게도 많은 봉급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로 만들어 팔았던 것이 바로 아데미라는 그리스 여신의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지가 전해지기 시작한 복음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더 이상 아데미를 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아데미 여신상의 매출감소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데미드리오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데메드리오는 우선 자기가 데리고 일하는 직공들을 선동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테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참 그럴 듯한 연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담고 있고 그 신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렇지만 사실 데메드리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이야기 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사 속에는 돈이 우선이었고, 또한 돈으로 직공들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이나마 이 우상 팔아서 누리는 풍족한 삶도 다 망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대의명분을 제공합니다. 첫째,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이니 그러면 아데미 여신은 가짜가 되고 그러면 그 여신상을 만들어 파는 너희들의 직업은 불명예스럽고 거짓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데미 여신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합니다. 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동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할 동기와 명분이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생계가 직접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잘못이 별로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을 집단으로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 충분한 명분이 공급됩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특별한 직업이 업신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가장 큰 여신인 아데미와 그의 신전이 모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데미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그걸 그냥 두고 볼수만 없습니다. 당연히 들고 일어서야지요. 이제 ‘돈’ 문제는 숨겨 놓은 채 그저 아데미에 대한 충성심만 표현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외칩니까?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칩니다. 이렇게 해서 데메드리오의 선동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속으로는 더럽고 이기적인 목적을 숨겨놓고서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명분을 제시해서 사람들을 꼬득여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사탄이 성도들을 꼬득일 때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아 넘어간 줄도 모르는 채로 아주 자주 속아넘어가고 있는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럴 듯한 포장으로 자신을 꾸미는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방식에 너무나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일에 대해서 별로 문제를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실 굉장히 악한 일에 속합니다. 그것은 드러난 악이 아니라 숨겨진 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을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물론 저라고 해서 이 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무엇을 의논할 때보면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겉으로는 아주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서 어떤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을 냅니다. 아니면, 어떤 의견을 내놓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그렇지 못할 때, 자기가 누리는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거나, 원하는 무언가를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나를 챙기고자 하는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도는 적어도 겉으로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할 이유와 목적이라면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속과 겉이 일치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어져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베소의 은세공들이 데메드리오의 유혹을 받아 겉으로는 아데미를 외치며 속으로는 자기 이익을 챙겼듯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한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 일에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은혜와 복이 있지만 우리가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 이전에는 없었던 많은 갈등과 유혹에 노출되게 되는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따라 사는 정직함이 없으면 우리는 진짜 의도는 숨겨 놓은 채 그럴 듯한 겉모습만 드러내는 속다르고 겉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어둠 속에 넣어 놓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악한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일은 참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인 어려움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미 세상은 이렇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을 편안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항상 이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을 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 닥쳐 오는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실망하고 그 바른 길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가려지지 않은 순전한 마음으로 사탄의 꼬득임과 현실이 주는 실망을 너끈히 이겨내는 힘있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신앙의 순전함을 지켜내고 우리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