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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0.09. 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1(사도행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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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13-21절





 일주일을 머물면서 성도들을 돌보고 난 후에 바울은 드로아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자기 일행을 먼저 배편으로 앗소로 보내고 자신은 육로로 여행을 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일행을 만나서 배를 타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이 여행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사실 이전에 20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월절 이전까지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계획 때문에 잠시 발길을 돌려 마게도니아의 일부 해안지역들 둘러서 드로아로 간 후에 거기서 유대에 있는 두로로 가서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흘러가버린 시간 때문에 그는 오순절 이전까지 예루살렘에 가는 것으로 여행목표를 수정했습니다. 


오늘 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차근 차근 살펴볼 말씀은 바울과 일행이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던 중 밀레도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거기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그들과 작별하는 내용이 전부인데요. 성경이 이 일을 20장 17절부터 38절까지의 긴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 성도로서, 그리고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로서의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배같은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한 사도 바울은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밀레도라는 항구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서둘러서 사람을 보내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자신이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을 찾아 괴롭히려는 사람들 때문에 훨씬 더 시간이 지체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바울은 아주 긴밀한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남은 그만큼 더 특별하고 의미있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별 자체가 바울에게는 그러한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주는 어찌보면 유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남겨준 말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묵직하고 의미심장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들려준 고별사의 맨 처음 내용은 자신이 과거에 어떻게 살며 일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지만, 그 문제는 조금 뒤에 살펴 보기로 하구요.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깨달음은 성도의 삶이란 바로 이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흉내내면서 그와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모름지기 성도라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바울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모양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제가 처음 아시아 지역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여러분 앞에서 어떻게 살고 또 일하였는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바울이 그들에게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 중에서 “뭐라고? 자기가 그랬다고?”하면서 의문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분명히 듣는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맞다. 이 분은 정말 그랬다.”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항상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한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사는 모습도 믿는 모습도 부족한 부분이 있지요. 그러나, 그런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자신의 그런 연약함과 부족함을 극복해 내려고 치열하게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분투한 다음에, 그래도 실패한 후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런 자기 연약함에 대한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것은 그저 핑계와 자기를 합리화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기도만 시켜 놓으면 자기가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눈을 뜨고 나면 강자로 군림하고 부족함 없는 자로 자처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기도와 말은 그저 하나님을 향한 미사여구이며 공중 앞에서 행하는 위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이유와 세상이 우리를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기도를 드리면서 사용하는 ‘말’들이 그 말들이 담고 있어야 할 참된 의미와 고백을 담아내지 못한 채로 그저 형식적이고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내가 어떻게 살고 일했는지는 당신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짧게 풀어낸 자기 삶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그가 사용했던 단어들의 모든 의미가 온전하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도 아니었고 미사여구로 꾸며진 자화자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로서,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 특히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들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내가 성도로서 혹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는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 듣는 사람의 눈에서 깊은 동감과 긍정의 표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완전하지도 않고, 또 몇 가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귀 기울여 주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됨됨이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하곤 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일 자체에 대한성과는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선하심과 세워가고 가꿔가야 할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와 됨됨이를 망가뜨린다면 그 일이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우리가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고 서게 될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한 평생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서 가꿔오고 다듬어 온 우리 속사람 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속 사람을 점점 더 누추하게 만들어 간다면 우리는 오히려 오래 살고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더 부끄러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듣기에는 꼭 자기 자랑같은 그런 이야기를 늘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말을 곡해하지 않으려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하나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온 열 한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다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이 말씀을 머리에 이렇게 떠 올려 놓고서 저를 한 번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것과 예수 믿는 것은 다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완전히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하지만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제자를 삼은 후에 “내가 너희에가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제자라는 말의 의미이니까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표현하자면 제자가 스승을 흉내내면서 세워지고 또 이어져 가게 되는 그런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흉내내고, 그 제자들을 또 그들의 제자가 흉내내고 그렇게 똑같이 흉내내면서 이어져 갈 때, 망가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의 삶이 참 대단한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며 또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흉내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께 모여온 사람들을 돌보던 예수님의 모습,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들을 하시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과 사역 속에서 그 예수님을 흉내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지금까지 스승이신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질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고, 너희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너희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고 또 예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비극은 우리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사표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보고 흉내를 내려고 해도 흉내를 낼 대상이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예수님의 성품과 하신 일들에 대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넘칩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옮겨내고 표현하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 사람들의 숫자가 작아도 너무 작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갓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와 보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삶으로 옮겨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 분의 제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돌아 보아도 예수님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은 그저 말하고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흉내내는 일은 그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니 이제 교회 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처럼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 들, 그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이야기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 자신 목사이면서도 여러분에게 저의 삶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사도 바울처럼 들려 줄 수 없으니 저 자신도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이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빛을 바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그 분의 삶을 흉내내며 살아야 하는 그 분의 제자입니다. 자신의 삶과 성품을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야 하는 그런 제자, 그렇게 자신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무언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된 성도들의 참된 영광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흉내낼 때 알 수 있고 누려질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리는 가장 큰 영광 중의 하나는 성도로서의 당당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그렇게 고상하고 향기로운 삶을 사십시다. 이 땅에서 하루 하루 더 긴 시간을 살아가는 그 일이 주님 앞에서 우리를 그만큼 더 복되고 영광스럽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삶을 사십시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흉내내기 위해서 애쓰며 헌신하며 살 때, 우리의 삶은 분명히 그런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때, 우리의 입에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았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닮은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