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0장 13-21절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참 어렵고 힘든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해 낸 성도들과 하늘나라에서 얻을 즐거움을 위해서 이 땅의 잠시 동안의 행복을 내려놓은 구약 성도들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믿음으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믿음의 영웅이라는 정말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그 세상을 있게 하고 또 지금도 유지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는 세상보다 더 확실하고 변함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으로 성공적이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냈던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2장으로 넘어가면서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립니다. 믿음으로 살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였던 사람들이 정말 구름같이 그렇게 안된다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믿음이 별 것 아닌 것 같고 힘이 없다고 느껴질 때도 많은데요. 우리는 그럴 때마다 히브리서를 들여다 보면서 우리 믿음이 얼마나 능력있고 놀라운 것인지를 재확인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의심에 빠진 믿음을 확신으로 바꾸어서 믿음으로 사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믿음의 능력을 증언해 주고 있고 또 우리에게도 너희도 이 확실하고 능력있는 길로 오라고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어서 잠깐 같이 살펴 보았지만, 저는 특히 이 말씀 중에서 ‘증인’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니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내 주변에 저렇게 믿음의 능력과 참됨을 증명해 보이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었으면 더 좋겠다고 말입니다. 비록 그리 훌륭한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끙끙대다가 보면 참 많이 외로워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증인’이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저는 또 다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증인’이란 어떤 것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증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나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해 줄 나의 증인들’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증인들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나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나의 증인들이니까요. 사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항상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서로 서로를 보면서 서로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때, 그 모든 생각들은 마치 재판장 앞에서 증인이 증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생각들을 듣고 계시니까요. 물론 완전하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그 모든 증언들을 다 인정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 중에서 사실과 일치하는 것만 받아들이시지요. 이 증언이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변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나 평가가 정확할 때보다는 부정확할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말 빠지기 쉬운 착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생각과 내가 똑같고 내 마음과 내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나 마음이 나 자신이 아닙니다. 부정적으로건 긍정적으로건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실제 모습이 진짜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증언이 중요하고 또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과 판단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이나 평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그런 생각들이 나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효력있는 ‘증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라”라고 운을 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여행한 모든 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그리고 특히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자신의 가장 직접적인 증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과 일치하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애썼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생각할 때, 그는 태생이 우리하고 달라서 그가 그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노력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았는데도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삶의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짙은 외로움도 있었을 것이고,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을 테구요. 그가 그런 모든 벽을 넘겠다고 끊임 없이 자기 안의 자기자신과 싸웠을 때, 그는 비로소 우리가 아는 바울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서 무시 못할 기여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 특히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신앙을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 뿐 아니라 자기 삶을 통해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당시 사람들을 복음으로 온전히 설득해 낼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자기 삶의 증인이 되게 하는 그런 모양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그 모든 증인들은 부담이고 지기 싫은 짐이었다기 보다는 그의 영혼과 삶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기의 삶의 예를 들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교훈하는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생생한 증인이지요?”라고 그들을 자기 인생의 증인으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나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위선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되겠지만 정말 잘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될 수 있는대로 서로를 많이 그리고 먼저 섬기며, 다른 이들을 최대한 인격적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정죄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감싸주고 이해해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 사람의 성장과 믿음의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완전할 수도 없고, 완전할 필요도 없지만 점점 더 완전을 향해서 다가가야 합니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도 애써야 하고 항상 믿음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한 서로가 서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랬지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신앙 안에도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증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피하려면 교회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리고 교회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도 그만큼의 증인들을 세상에서 다시 만나야 할텐데 우리는 이 부담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선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것이 성도로 살아가는 일을 위한 바꿀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나서 그 조건을 이제 내 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더 거룩해지고, 그것 때문에 더 아름다워지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을 내가 눈치보면서 위선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고서 그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담스러운 조건이 다 나를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나를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더 영광스럽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이런 일을 계속 경험합니다. 어디서 일까요? 자녀를 기르면서 입니다. 저는 막 자녀를 낳아 기르는 젊은 부부를 만나면 기회가 될 때마다 꼭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성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녀를 키우는 일만큼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 말로 정답이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 일은 귀찮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부모를 더 망가뜨려 놓기가 정말 쉽습니다. 자녀들에게 짜증만 내고 자기 욕심만 강요하는 그런 속물이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이 비록 부족하지만 그래도 믿는 사람으로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면서 또 최대한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애쓰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중심을 지켜내면서 자녀를 양육할 때, 부모는 그 자녀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훨씬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내를 배우고, 인내심을 배우며, 사랑을 배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배울 수 있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면서 맡기신 부모로서의 소명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아픈 일이면서도 또 유익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이제 저 한 3년 겪어 보시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대충은 감이 잡히시죠? 저는 사실 일부러 저를 많이 드러내는 편입니다. 때로는 목사로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저 자신이 불편해지고 불리해 질 수 있는 입바른 소리들,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래야만 여러분이 저를 오해하실 수 있는 소지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목사에 대해서 전혀 몰라서 생기는 안타까운 오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담임목회를 하게 되면 제 감정, 제 생각, 그리고 저의 목회관이나 교회관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이야기하면서 목회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 생각대로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전부 다 드러낼 수는 없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 말고도 이렇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현재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혹 제가 그 교회들을 비난하고 그 목회자들을 욕한다고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이 목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뭐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아시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바른 교회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바르지 못한 목사관, 바르지 못한 교회관이 떡하니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호령하고 있는 조국교회의 상황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그 일을 저 자신을 지키는 방패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자주 목사는 이러면 안된다, 저러면 안된다라고 말하면서 제가 곧바로 그 길로 갈 수는 없는 일이고, 제가 교회는 이러면 안되고 저러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교회를 그 길로 이끌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제가 그런 이야기들을 여러분 앞에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러분을 저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맨날 만나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 놓으면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안된다, 틀린다고 말한 그 길로 갈 유혹을 더 잘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면 혹 여러분 중에서 ‘너나 잘 해라’하실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사로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여러분 앞에서 ‘공언’하고 여러분을 저를 지키는 방패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말 죄송스럽지만, 저도 유혹이 많은 약한 인간이고 보면 그래도 최대한 여러분을 증인과 방패로 삼아야만 저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저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나의 증인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정말 부담되고 무거운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고 그 증인들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힘들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그 증인들이 바로 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서서 나를 증언해 줄 소중한 사람들이고, 지금 나를 지켜주는 주님의 방패입니다. 우리가 그 방패를 방패로 더 잘 이용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광현교회를 통해서 내가 당신 덕분에 더 거룩해지고 내가 당신 덕분에 더 온전해졌다고 고백하며, 기쁘게 서로를 내 인생의 증인으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