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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11.06. 금요기도회 - 밀레도에서5(사도행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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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0장 17-21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한 번 그리고 27절에서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씩이나 자신은 성도들에게 그것이 성도들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거리낌이 없이 다 전해 주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성도들의 영혼과 영생에 유익한 진리들을 가감 없이 전해 주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건전한 교회가 되려면 참된 말씀의 바른 선포가 필수적입니다. 성령님께서 참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영혼 안에서 일하실 때, 성도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워져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거리낌 없이, 아니 거리껴짐에도 불구하고 애써서 전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여전히 너무 미진한 부분이 많고, 그 미진함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봉사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그 말씀을 정말로 믿고, 그 말씀을 붙들고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데,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붙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밥 먹는 일을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면서 몸이 건강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밥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건강하고 강건할 수 없습니다. 거듭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소중히 여기십시오.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영혼이 병들고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기쁨과 능력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이 곧 성도들의 생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듣는 사람들에게 부담스럽고 그래서 별로 반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해야 할 말씀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표적으로 어떤 말씀들이그대로 전해주기에 무엇이 가장 부담스러운 말씀이었고 또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직접 그 대답을 들려 줍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먼저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는 말씀을 전하고 누구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 메세지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정말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유대인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율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들이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으로는 안된다고, 율법만으로는 안된다고, 할례받은 것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이제까지 그것만 붙들고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살았는데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쉬웠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복음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메시야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윗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그런 메시야를 기다려 왔지, 자기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힘 없는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메시야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헬라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수요일에 고린도 전후서를 공부하면서도 살펴 보았지만 당시 헬라 사람들은 철저히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란 이 세상을 둘로 딱 나누어 놓고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인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과 육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영은 선한 것이지만 육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께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헬라인들이 듣기에 이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겨우 악한 육신을 벗어나 놓고서 또다시 악한 육신으로 되돌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그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서 부활했다는 것도 충분히 어리석은 일인데, 그 사람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복음은 정말 허왕되고 어리석은 주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음은 그 복음을 듣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또한 그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이 전한 회개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가 무엇이지요? 죄를 뉘우치는 것과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냥 자기 죄 때문에 엉엉 울고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이전의 죄에서 돌이키는데까지 가야 회개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회개를 그냥 회개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돌이켜서 바라보고 향하게 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죄를 조목 조목 나열하면서 ‘제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런 저런 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회개가 대개 이런 모양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많은 종류의 ‘죄’라고 부르는 것들을 저지릅니다. 분명히 그런 것들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죄들은 사실 뿌리가 되는 큰 죄가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깥으로 표현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뿌리가 되는 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주인되고 내가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의 욕심과 삶의 태도가 바로 죄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또 이것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면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왕이 되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해서 살아가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왕과 주인의 자리를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거리낌 없이 증언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회개는 이 믿음을 위해서 꼭 거쳐야만 하는 전단계입니다. 회개가 이런 믿음에 이르지 않으면 그 회개는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요 아버지로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이 믿음을 증거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전한 것일까요? 우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나에게 주시는 구원만이 유일한 진짜 구원이라는 것.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우선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그 사람이 자기 삶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고 증명해 보이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로 할 일을 다 마치시고 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위한 중보가 되어주고 계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모든 필요한 것들과 선한 것들은 전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순간, 우리 삶은 그 방향과 원리가 180도 바뀌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또 이 세상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세상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은 나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힘을 다해서 그 세상의 말과 세상의 요구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의 길을 가야 세상이 주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나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 분이 원하는 길을 가야 그 분으로부터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통로에 누가 서 계시느냐 하면 항상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좋은 것들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항상 그 안에 죄와 악함이 섞여 있을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 그것이 죄 용서이든지, 은혜이든지, 평안이든지,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든지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시고서 우리에게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 밖에 없구요. 우리가 기도를 드린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성도들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내게 필요한 것들이 주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회개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만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복음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선포되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여기까지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중심의 삶을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은 이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며 또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모습은 달라도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가 실제로 붙들고 의지하고 살았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믿고 살았습니다. 또 로마라는 강력한 힘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붙들었던 것은 율법이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었고, 또한 할례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의지해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그들에게 이제는 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서 살아야 한다고, 또 너 자신이나 이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복음이 달갑게 들려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 거치는 복음, 걸림돌이 될 수 밖에 복음을 그들에게 들려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밖에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리끼는 복음을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거리끼는 복음을 정말로 받아들이셨습니까? 나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회개해야 한다는 복음, 이제는 나 자신이나 이 세상과 그 안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라는 복음을 들으셨고, 또 그 복음에 진실로 순종하셨습니까? 여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고 해도, 복음을 이렇게 듣고 또 이렇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헛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라면 어떻게든 꼭 한 번은 그 거치는 복음을 거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렇게 한 번 받아들인다고해서 그 거리낌이 모두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철저하고 완전할 수가 없고, 우리는 계속해서 처음 회개와 믿음에서 떠내려 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를 향해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만 합니다. 그 거리끼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듣고 반응하고 또 반응해야 합니다. 날마다 이 복음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참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살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 분명하지만, 또한 가장 심각하게 거리껴지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거리낌을 극복해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도 없고, 또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복을 누리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언제나 여러분의 귀에 거리끼는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더 이상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을 때까지 그 복음을 듣고 듣고 또 들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주는 걸림돌이 우리를 위한 신앙의 디딤돌이 될 때까지 순종하고 또 순종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참되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에 이르러 더 견고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