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0장 22-24절
오늘 설교제목은 ‘밀레도에서(6)’이지만, 부제를 ‘성령에 매여…’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께 매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이 주인공입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그 때부터 복음은 그 다락방을 부수고 나와서 온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워낙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대개가 사도행전을 성령님의 기적같은 역사를 중심으로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삼 천 명, 오천 명이 한꺼번에 회개한 이야기,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이야기,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 이야기,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게 되는 이야기, 환상을 보는 이야기 등등. 성령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크고 놀라운 일에 집중하면 그것 때문에 작지만 더 중요한 일들을 놓치듯이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도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성령충만한 사람의 중요한 특징과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20장 3절에서도 보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만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위험한 여행을 강행했을까요? 모두가 안된다고 하는데도 말이죠.
바울은 그렇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께 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동아줄로 묶인 것처럼 묶여 있고, 죄수가 묶인 것처럼 묶여 있고, 노예가 주인에게 묶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이고 또한 성령충만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께 매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하게 됩니다. 저에게도 여전히 그런 생각이 남아있지만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구할 때, 거의 항상 우리는 성령충만해진 다음에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하던 어떤 놀랍고 능력있는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기적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건 믿음으로 넉넉하게 이기며 살아가는 모습이건 간에, 그 중심에 여전히 자기 자신이 놓여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이런 잘못된 동기로 성령충만함을 원하게 되면 그가 막상 성령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전보다 더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 그리고 교만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성령님께 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온전히 묶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소원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가 되는 것.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십니까? 혹시 성령충만에 대한 저의 설명이 여러분에게 무겁고 부담스럽게 들리시나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마도 ‘묶인다’는 말 때문에 그러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그 부담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고 또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항상 무언가에 묶여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묶여 있고, 감정에 묶여 있고, 과거의 기억이나 상처에 묶여 있고, 막연한 꿈이나 소원에 묶여 있고, 돈에 묶여 있고, 성공에 묶여 있고, 건강에 묶여 있고, 자녀들에게 묶여 있고,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시선에 묶여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묶어 있고, 그게 깨질수도 있다는 근심과 두려움에 묶여 있고, 심지어는 자신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그 생각에 묶여 있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인간은 정말 별의 별 사소한 것들에 스스로를 묶어놓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무언가에 자신을 묶어 놓지 않으면 절대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다가 보면 성도들이 무언가에 묶여 있는 것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것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기 묶여서, 그 묶인 끈을 풀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마저 무관심해지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만 붙들려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만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고 고상하고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고, 참된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묶어놓지 말아야 할 것, 붙들어 줄 수 없는 것에다 자신을 묶어 놓고서 그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조차 고집을 부리는 인생은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굉장히 무겁고 비장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성령님께 매여 있는 바울은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요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체포되고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것 자체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 그리고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것이 성령님께 매였던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는데요.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만 나오면 굉장히 심각해 지고 비장해 지기 쉽습니다. 물론 서로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 곳의 분위기가 마냥 가볍고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도 바울의 마음도 슬프고 무겁고 비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사람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십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우리가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때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소원은 누구의 소원이 될까요? 계속 우리와 상관 없는 하나님의 소원으로만 남아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의 소원이 될까요? 그것은 결국 우리의 소원이 됩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소원, 그리고 우리가 이루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의 소원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임재해 계실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령충만하게 되고, 성령님께 매이게 되면 성령님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 성령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이 하나가 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소원을 우리 자신의 소원으로 삼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이루는 것을 그 어떤 일보다도 기뻐하게 됩니다. 힘들고 무겁지만 말이지요.
저는 오지로 때로는 사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을 볼 때, 이 사실을 거듭해서 확인하곤 합니다. 누가 보아도 위험한 지역입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그런 곳입니다. 또 가기만 하면 정말 극심한 고생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말립니다. 가지 말라고, 가면 안된다고, 왜 굳이 그런 곳으로 가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파송예배를 드리는 날은 잔치집이 아니라 장례식장에 더 가까운 분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곳으로 떠나는 당사자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그런 선교사님들의 표정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떻든가요? 평안합니다. 너무나 평안합니다. 이제 자기 자리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흥분과 기대감마저 얼굴에 감돕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분들 속에 두셨던 하나님의 소원이 이제는 성령님 안에서 그 분들의 소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얼굴 속에서 불안도 두려움도 슬픔도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한 번 그런 분들을 못 가게 붙잡아 보십시오. 오히려 더 불행해 하고 더 불안해 합니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 제대로 사로 잡힌 사람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성령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숨 이야기가 나오니 또 비장하게 들리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이 말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바울은 지금 걸기 싫은 목숨을 내걸고 전쟁터로 끌려나가듯이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인 즉, 오히려 그만큼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루는 것은 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남자가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도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거나 힘겨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 소원을 이루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만큼 간절하게 이루기를 바라는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사도로서의 사명을 받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묶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만족할만한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다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목적이 생겼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한 의를 덧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며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 그러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주변과 연관된 것들 이구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울이는 관심이 부족해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기 자신에 몰두해서 살고 있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묶인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유도, 평안도 만족도 모르는 가난하고 목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하고 쉽게 흔들리고 또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너무 강하게 우리의 삶과 자아라는 굴레에 묶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묶여서 자기 자신과 주변에 대해서 너무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렇게 이 몸을 입고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충만해져서 우리를 성령님께 매어 놓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우리를 약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주변의 공격들로부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령님께 매어 놓으면 우리 인생의 목적과 중심은 나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이동하게 되고 그러면 나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내가 가장 기뻐하는 나의 소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매인 사람은 정말 자유롭습니다. 성령님께 매인 사람은 자신을 이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능력 또한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매인 사람은 고상하고 영광스럽게 살아갑니다. 성령님께 매인 사람만이 자신을 묶고 있는 구차한 것들로 부터 자유로와져서 아름답고 고상한 참된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무엇인가에 매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다가 여러분의 인생을 매어놓으시겠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매어 놓으십시오. 그 분께 여러분을 꼭 붙들어 매어 놓으십시오. 그렇게 되는 것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으시고 성령님께 나를 매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담아 간구하시고 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순전한 소원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날,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가장 기뻐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성령님께 매이는 큰 복과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