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1-16절(읽기 : 7-16절)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는 항상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한 때 중동지역이 무척 위험해 졌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 선교사들에게 거기 계속 남아있는 것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되었지요. 그 때 교회에서 그 지역으로 파송한 선교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그 선교사에게 당장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소속 선교단체에 연락해서 그 선교사를 빨리 귀국조치하라고 했습니다. 주파송교회가 그렇게 나오니 선교단체에서도 그 선교사님에게 귀국을 권유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그 당사자 되는 선교사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변에 있던 선교사님들 중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분들도 있었지만 그 선교사님은 만약 자신이 그 곳이 조금 위험해 졌다고 해서 거기서 도망쳐 나온다면, 자신이 나중에 거기로 돌아가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후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과 제가 조금 친분이 있어서 알지만 처음 그곳에 갈 때부터 사실 사람들은 그 일을 만류했습니다. 그 때도 여전히 그 곳은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선교사님은 그 곳으로 갔고, 그 나라가 많이 위험해 졌을 때도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명, 그러니까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교사님을 그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지만 그 곳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거부할 수 없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만류하는데도 그 나라로 갔고, 그 곳이 훨씬 더 위험한 곳이 된 이후에도 그 곳을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어떤 면에서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어떤 부르심 안에는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 고집스럽고 독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당사자도 그것을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소명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 번 소명이 주어지면 그 때부터 소명은 ‘이것 아니면 안된다’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참된 소명을 지닌 사람은 그 소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소명에 사로 잡히게 되고 그 소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포기한 적이 있었고, 그가 이방인들을 상대로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유대인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 아니 하나님의 요청이 너무 강해서 더 이상 그 일을 연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은 잘 알고 있지만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통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던 동료들과 바울의 앞날에 대한 계시를 받은 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가면 안된다고 만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사실 해결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바울이 당할 어려움을 알게 해 주신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싸인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바울은 바울대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 이유 또한 바울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구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바울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표현하자면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소명이 바울을 삼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일들은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조화시켜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경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예상되는 분명한 어려움과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어려움과 위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일까요? 아니면 넘어서야만 할 장애물일까요?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극적이고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그 일을 포기하는 이유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진취적인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꼭 넘어서야 할 장애물로 삼고 심지어는 더 높이 뛰어 오르는 발판으로 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선택하는 것을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인간의 성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고, 성향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 자체가 옳고 그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바울의 결정이 옳으냐, 아니면 성도들의 결정이 옳으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어떤 결정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그렇게 한 것이고, 이유가 없지 않은 판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 개인적인 이유에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우선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한 쪽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 바울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합니까, 가지 않아도 됩니까? 가야만 합니다. 왜 그렇지요? 그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기로 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동료들과 성도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무엇이지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이 당할 위험을 알려 주신 것은 그저 하나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이것 자체로는 그러니까 바울을 말려야 한다 아니다, 가야한다 말아야 한다를 결정할 수 없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동료들과 성도들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을 만류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다른 사람들 중에서 누가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선택을 한 것일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를 통해 알게 해 주신 것 은 이런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손에 붙들려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방인들, 그러니까 로마 당국자들에게 넘겨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바울은 정식 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로마로 가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뒤쪽에서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장 원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단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그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그 바울이 이제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가택에 구금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그 마지막 장면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놀라운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이 일을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일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도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왜 해야 하는가 이유를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이루는데 장애물이 있느냐 없느냐, 그 일이 쉬운 일이냐 어려운 일이냐도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야 한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바울에게는 사도로서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소명이 있었듯이 우리들에게는 성도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직분과 일을 감당하는 것도 우리의 소명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소명은 바로 성도로서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물론 완전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할 때도 많을 것이구요. 방해도 있겠고 손해도 있을 수 있고 오해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무관심해져야 할 일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결국 바울의 동료들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은 바울을 따르게 됩니다. 일단 그 어떤 이유로도 바울을 말릴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바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지금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이 선하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있거나 어떤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요. 여기 서 우리는 이 일행에 가이사랴의 성도들 중 몇 사람이 더해졌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일어날 위험한 일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곧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서 성도들 사이의 깊고 풍성한 참 사랑의 모습도 발견했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믿었고, 그 뜻이 선하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말리던 그들이었지만 그 위험한 동행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분별하려고 애써야 하고 또 그 뜻에 순종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 일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지금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면, 그 거울에 지금 나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비추어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해야할지 하지 말아야 할 지 판단이 서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판단이 100퍼센트 완전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여전히 틀릴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분별한 후에,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향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믿음으로 격려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본능이나 경험을 따르지 않습니다. 소명을 따릅니다. 소명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눈 앞의 일들을 바라보고 또 분별합니다. 때로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확실하지 않더라도 소명과 믿음을 통해서 모든 일들을 분별하고 또 선택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렇게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성령충만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소명과 믿음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