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37-22장 16절
오해 때문에, 한 마디 변명을 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맞아죽기 일보직전에 있었던 바울은 로마군사들의 손에 구출되었고, 안전한 로마군대의 영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영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바울은 헬라어로 대화를 좀 할 수 있겠느냐고 천부장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천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천부장이 놀랐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요. 첫째, 그는 바울을 헬라어를 전혀 못하는 유대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예루살렘에서 큰 소동을 일으킨 후에 추종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탈출했던 애굽인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과 길리기아의 다소라는 대도시의 시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백성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한 번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바울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 정확하게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지요?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아람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서 또 그것 때문에 놀랐습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소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참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는 헬라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냈고, 유대인들에게는 아람어로 이야기를 걸어서 자신이 유대인들과 동질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니까요. 그가 말한 내용을 들어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부장에게는 자신이 다소의 시민이라는 점을 말했고, 유대인들에게는 말을 걸면서 ‘부형들’ 그러니까 ‘아버지와 형제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도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바울이 이런 지혜를 사용하면서 까지 유대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던 것은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변명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는 참 이상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의 행동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금방 그들의 손에 붙들려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맞아 죽기 직전에 겨우 빠져 나왔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빨리 영내로 들어가 피신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 앞에 멈춰서서 그들에게 굳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다니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들려준 자기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니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들려주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바울 자신의 이야기는 그저 그릇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그 그릇에 담아서 유대인들에게 주려고 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도 너희와 똑같이 율법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였던 가말리엘 아래에서 혹독한 율법교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야 말로 기죽이기 작전이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최고의 율법교사라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결박하여 옥에 가두도록 넘겨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나도 너희들과 똑같다, 아니 너희들 이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나는 실제로 사람을 죽게 만든 적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궁금증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런데 왜 지금 바울은 저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곧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 때 바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소환하라는 공문이 들려져 있었구요.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다메섹입니다. 시각은 햇빛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정오쯤 되었었구요. 그 때 갑자기 바울의 머리 위에서 너무 밝아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내리 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밝은 빛도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그 빛을 잃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던 그 빛은 태양빛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 바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빛은 얼마나 강렬한 빛이었을까요?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바울은 그냥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습니다. 그는 그 순간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랬겠지만 바울이 알고 있는 성경은 태양도 빛을 잃게 하는 그런 빛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때 바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박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2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혼란스러워 하면서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 때 이런 대답이 들려 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성도 여러분, 그 때 바울에게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씀이 있었까요? 그 동안 자신은 모든 것을 걸고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일 때문에 이단이라고 확신했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네가 나를 핍박하였는데, 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두 가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첫째,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박해했다는 것. 그리고 둘째, 그가 이단의 괴수로 알고 있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늘에서 내리쬔 강렬한 빛,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바울만 들을 수 있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그렇게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나도 너희와 똑같고 똑같았었다. 나도 너희들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 열정 때문에 지금 너희들처럼 사람을 헤친 적도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이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복음’을 들려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다메섹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보았을 때, 과연 그는 눈이 멀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눈을 뜨게 된 것일까요? 둘 다였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뜨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던 눈, 율법에는 달인이었고, 그 율법을 지키는데는 흠이 없다고 여겼으며,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게 해 주었던 ‘육신의 눈’은 그 때 멀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빛 덕분에 그는 정말로 떠야 할 눈은 뜰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잘못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눈,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며 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은 활짝 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호소한 것입니다. “너희들도 예전의 나처럼 지금 너희가 너희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며, 그래서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진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너희들도 예전의 나처럼 눈이 멀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도 나처럼 눈이 멀어야 한다. 그리고 눈이 뜨여져야 한다. 뜨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육신의 눈’은 멀게 되어야 하고, 여전히 감겨 있는 ‘영혼의 눈’은 떠야만 한다. 그래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예수가 실제로는 여전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그 분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구원자시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너희가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 나처럼 눈이 멀고, 또 나처럼 눈을 뜨기를 바란다. 그 일을 위해서는 너희들도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너희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바울을 해치려고 했던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뜨고 있어야만 하는 눈은 감고 있지만, 자신을 착각과 오류에 빠지게 만드는 눈은 뜨고 있는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고 살아가지요. 그래서, 그저 자기 자신만큼은 모든 것을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본다고 확신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언제나 암흑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암흑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확신입니다. 우리는 바울도 유대인들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진리를 분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런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고, 또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바라볼 때, 영혼의 눈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릇된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서 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꼭 한 번은 해야 합니다. 아니 믿음생활을 하면서 두고 두고 반복해서 그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빛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눈이 멀 정도의 강렬한 빛으로 찾아와 자신을 비춰주시는 빛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빛으로 닫혀져야 하는 눈은 닫혀지고 뜨여져야 하는 눈은 뜨게 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한 번 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또 우리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제대로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얼마나 어그러진 것이었고, 괜찮다고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모습 속에는 얼마나 온전치 못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저 심상하게 생각했던 우리 주님이 실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얼마나 놀랍도록 풍성한 분이신지를 볼 수 있고, 그제서야 우리 신앙은 우리 주님을 제대로, 그리고 온전하게 섬기며 사랑하는 그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그의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육신의 눈과 영혼의 눈을 모두 뜬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비로소 온전히 볼 수 있는 온전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적인 눈은 한 번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감겨져야 합니다. 바르게 볼 수 없는 눈, 겉모습에 너무 쉽게 속는 눈,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게하는 우리 육신의 눈은 반드시 한 번은 완전히 감겨져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우리 영혼의 눈이 열려진 후에 다시 열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이 열리지 않은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눈을 감고 길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빛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뿐만이 아니라 거듭 거듭 찾아오셔서 우리의 영혼의 눈을 열어주시고, 육신의 눈은 새롭게 해 주시시는 귀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열린 눈의 성도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