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 시편 2편
제가 예전에 길에서 전도하시는 분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전도지를 쥐어주면서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면서 하는 수 없이 전도지를 받아들기도 했고, 어떤 분은 ‘저 교회 다녀요.’라고 미소지어 주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분들 중에 아마도 시장에 가는 것 같아 보이는 한 분이 작은 수레를 끌고 인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분도 전도하시는 분을 지나치게 되었죠. 전도하시는 분은 그 분에게도 똑같이 전도지를 건네면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길을 내려오던 분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전도하시는 분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면서 이렇게 또박또박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수 같은 거 안 믿습니다.”라고 말이지요.
누군가 저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한다면, 저는 그렇게 대답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정중하게 사양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전도를 해 보면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고 그저 너무 무례하게만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입니다.
아시다 시피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본래 자신이 왕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살아가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틈만 나면 하나님께 반기를 듭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확대되어져 왔습니다. 쌓여가는 지식은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그래서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인간들은 그 힘과 지식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당신은 그저 하늘에나 머물러 있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제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땅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행할 권리 뿐만 아니라 모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까지도 인간에게로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해진 윤리와 도덕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정해져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지켜온 상식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해진 윤리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이 정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인권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사랑, 가정, 성별마저도 그 기준을 자기마음대로 하려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렇게 세상은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 자기 자신이 자신의 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지는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라고 함께 외쳐왔으며 계속해서 그 일을 진척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처럼 이 반란이 성공적인 경우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와 별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마음껏 이야기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식사기도 한 번 하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아직도 어리석게 하나님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듯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런 눈초리가 따갑고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대세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상황이 이쯤되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앞으로 나서셔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계신지 안 계신지, 이런 일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고 계시는지 그냥 내버려 두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 때문에 불안해 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화를 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서 시큰둥해진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땅 위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인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좀 올려다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이 있고, 들려오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선언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온통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고, 이미 사람이 왕노릇하며 사는 땅 위에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인의 눈에 어느날 그런 땅의 사람들을 가소롭게 바라보시며 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불호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 왔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까불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나를 밀어내고 왕이 된듯이 설쳐대도 내가 세운 왕은 따로 있고, 그 사실은 영원히 변경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한 마디가 그들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불호령이었고, 또 시인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시원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악인들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 세상을 살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왕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또 세상의 왕노릇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세상을 맡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미 시온에 세우신 왕을 한 순간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왕좌는 항상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우신 영원한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여러분,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약속대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변화산 위에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복음은 ‘땅끝’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의 세력은 끝장이 났습니다. 한순간에 마치 쇠몽둥이에 얻어맞은 항아리처럼 박살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마지막 승리는 아직 남아있지만 말입니다.
이 왕에 대한 이야기, 이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도 이 시편을 읽고 묵상했던 성도들은 이 시편을 통해 오실 영원한 메시야,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왕을 만날 수 있었으며, 비록 그들의 삶 속에서는 아무 것도 증명된 것이 없었지만, 이 시편을 통해 사람이, 악인들이 왕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편 2편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는 시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모두 다 똑같다고 말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랬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영원한 왕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항상 사람이 왕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왕들은 항상 자신이 더 왕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왕은 언제나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우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통치해 오셨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더 이상 어리석은 가짜 왕 노릇을 그만두고 그의 아들 앞에 무릎꿇고 진짜 왕께 입맞추라”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힘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그것이 복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군왕과 관원들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악한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사실상 그렇게 되어져 가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리심을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니까, 우리에게 답이 없으니까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해결되고, 살만해 지면 사는 데 별다른 근심이나 걱정이 없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 버리려고 합니다. 이제는 좀 편하게 믿자, 고상하게 믿자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그 분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입니다. 그 분에게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 더 단단히 묶이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 단단히 하나님께 묶이고 더 확실히 하나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지하고 더 많이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들은 항상 아들에게 입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손에 입맞추는 자리, 그 아들을 사랑하고 그 아들 앞에서 떨며 기뻐하는 사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입맞추시기 바랍니다. 아들에게만 입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 분께 다가가고 그 분께 더 열심히 피하십시오.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 더 단단히 묶이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서 그 분께 입맞추며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복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