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0.03. 새벽예배 - 내가 시험하리라(출애굽기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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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16장 01-12절
마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 문제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시고 꾸중하시는 대신에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엘림이라는 곳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곳은 참 놀라운 곳이었습니다. 거기는 샘이 열 두 개나 있었고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거기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홍해 곁에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부터 오늘 본문까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이 이야기들이 하나의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려운 일 다음에 좋은 일, 좋은 다음에 다시 어려운 일,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어려운 일…
우리는 어려운 일은 아주 조금만 일어나고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만 이어지기를 원하고 반대로 좋은 일은 굉장히 자주 있고, 그것이 대부분의 인생을 채워주기를 바라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기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죠.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바랄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차분하게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의 숫자보다는 행복하고 기쁜 일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그 기간도 훨씬 더 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는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서도 기쁨과 만족, 그리고 은혜는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는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이 번갈아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이런 패턴이 훨씬 자주 찾아옵니다.
우리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삶도 이와 닮은 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가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그저 우연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율해 가고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일단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는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신앙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마라다음에 엘림이 왔습니다. 쓴 물 다음에 열 두 샘과 칠십 종려나무를 만났습니다. 이제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 지 아시겠지요. 적어도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 보다는 그와 반대되는 일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우리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나온지 두 달 하고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 동안 고기라고는 입에 댄 적이 없었고 배불리 먹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이런 생각이 들자 그들의 못된 비관주의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너무나도 악한 원망을 쏟아 놓았습니다. 차라리 고기며 음식을 베불리 먹었던 애굽의 종으로 살았던 그 때 하나님의 손에 죽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았으리라는 불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불평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일용할 양식을 아주 좋은 것으로 날마다 내려 주시겠다고, 그러니 날마다 아침이면 그 날의 양식을 거둬 들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주간의 여섯째 날 그러니까 안식일 전 날이 되면 그 날 아침에는 두 배의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안식을 지키는 일 때문에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는데요.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놀라운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둘로 가르시고 그 가운데서 애굽의 군대를 궤멸시키시는 하나님은 정말 정말 놀랍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하루치 양식까지 정확하게 계산하시고 또 거기에 따라 정확하게 양식을 공급해 주실만큼 세밀하고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한 주간의 여섯 째 날에는 이틀 치를 완전하게 맞춰주실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라 때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영적인 훈련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분이신지를 다 보여주신 후에, 바로 그렇게 공급해 주신 식량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시험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슨 시험이 될까요? 언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부족한 경우에야 그들이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는지,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지를 시험할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충분하게 주신 일로는 무슨 시험을 할 수 있을까요? 얼핏 보면 시험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이 경우에도 똑같은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시험의 모습은 다릅니다. 넉넉하게 주셨기 때문에 적어도 원망이나 불평이 생겨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러나 넉넉한 경우에 주어지는 시험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에 대한 시험입니다. 없을 때는 원망과 불평이 고개를 들지만 사람이 많은 것, 충분한 것 앞에 있을 때는 욕심이라는 놈이 고개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한데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많이 쌓아놓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도 속모습은 원망 불평과 똑같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과하게 욕심부리지 않고 엿새째 날 아침에는 딱 이틀치만 거둬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평안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런 믿음이 없을 때는 그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더 많이 남도록 쌓아 놓은 양식에서 평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이상의 것을 탐내게 되고 쌓아놓으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경우의 시험이란 바로 이런 시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게 우리에게는 참 불편하고 힘든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부족하나 많으나 모든 상황이 시험입니다. 우리를 달아보시고 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절대로 모르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미 성경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모자란다고 생각되는 경우와 그리고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를 만나면 무조건 ‘또 시험이 시작되었구나!’하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험을 최선을 다해 서 치러내면서 우리의 영적인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부족할 때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고 넉넉할 때도 욕심부리지 않을 수 있는 실력을 길러가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족한 줄 안다’는 의미에서 ‘지족’이라고 말합니다. 부족하고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또 넉넉하다고 여길 때, 욕심을 부리거나 교만해 지지 않을 수 있는 경건의 능력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사도 바울은 이 ‘지족’이 있어야 경건은 비로소 유익이 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이 ‘지족’이란 현실을 초탈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생겨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급자가 되어 주시고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게 채워주신다고 정말로 믿으면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 때문에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당한 신앙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모두가 다 지족할 줄 아는 수준에 이르러서 항상 변함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평안과 능력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위해서도 우리를 훈련하시고 풍족함을 통해서도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족’할 수 있게 되니까요. 삶 속에서 이 ‘지족’의 훈련을 열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상황 때문에 믿음이 요동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든든히 서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