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0.24.금요기도회 -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사도행전 81)

장유진 2014. 11. 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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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3장 13–25절




 사람들은 ‘새출발’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합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후회하지 않거나 그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그 열매로로부터 실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가 실망스럽고 부끄럽거나 혹은 상처가 많을 수록 사람들은 아얘 과거를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리기를 원하며 그런 상태에서 새 출발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새출발이 진짜 새출발다운 새출발이 되려면 그 새출발은 반드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거를 기초와 출발점으로 해서 시작하는 새출발이어야 합니다. 그 실패와 실망, 그리고 상처를 다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에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선은 그렇게 과거를 무시하고 망각한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나는 그런 과거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니까요. 그리고 특히 과거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처들을 무시하고서 새출발을 하면 결국 그것들이 우리 속에 쓴 뿌리로 남아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아 버립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새출발을 온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가 없는 새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다니자’는 권면이나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라는 요청과 함께 신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물론 이 말 자체가 잘못된 말들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 말들 속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의 과거에 대한, 혹은 그 복음을 들을 당시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알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부터 하면 거부감이 생겨난다는 이유로 복음 전에 반드시 들어야 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삶이 ‘새 출발’을 하지 못합니다. 그 새로운 출발의 출발선인 과거가, 그리고 그 과거가 만들어낸 지금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별다른 감격이나 감사도 느끼지 못하고, 그 복음이 만들어낸 변화도 경험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 복음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도 가지지 않으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새 출발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 나중에 심각한 부작용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나 회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듣기 싫어지게 되고 복음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에는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그런 분들에게는 이미 한 참 온 길을 다시 돌아가서 새롭게 새출발을 하라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할 기회를 얻게 된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들으라”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 “들으라”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신명기 6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그 말씀은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항상 강론하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렇게 중요하게 강조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출발하게 하고 또 존재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거기 모인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을 향해서 ‘들으라’라고 했던 것은 지금부터 들려줄 복음이 그 사람들에게 그 옛날 쉐마처럼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처음 역사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들려준 모든 과거의 역사들은 단 하나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기에 자랑스럽거나 기분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스스로를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아브라함을 포함한 네 명의 족장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그가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그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 또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이니까요. 


 요즘 어떤 분들은 ‘믿음의 가문, 믿음의 명문가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문 전체가 하나님을 믿는 가문이 된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일종의 계급이 되거나 자랑거리가 되면 안됩니다. 만약 그런 구호들이 그런 영광을 누리자는 주장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 정말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었던 이유가 단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은혜로 선택하셨듯이 어떤 가문이 믿음의 가문이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은혜로 그 가문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그 가문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지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서 신앙은 절대로 자랑과 특권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저 감사와 겸손의 이유만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랑하고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 잘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출발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그다지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랑거리가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니까요. 


바울이 그 다음에 들려준 이야기는 바로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도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들의 공로나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곧 바로 그 뒤를 이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렇게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간의 불순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 대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은혜를 경험하고도 40년 동안이나 일관되게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그 40년 동안 참고 또 참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하나님은 참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시고 출애굽 1세대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사실 엄밀하게 한다면 죄의 결과는 즉각적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40년이 지나면 한 세대는 다 죽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자연사이지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40년 동안 몸만 광야에 있었을 뿐 고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굶주리거나 목 마른 적이 없었고, 신발과 옷이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40년 동안이나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런 기적 속에서 살았다면 그것은 벌이라기 보다는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 자격은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광야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벌이라면 벌이겠지만 나머지는 오히려 특권 중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며 고집만 부리는 이스라엘의 소행을 참으셨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당하는 어려움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혼날 때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불순종한 일들을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만약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일히 그렇게 대응하신다면 우리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징계 조차도 우리의 불순종과 믿음없는 모습에 비한다면 정말 커다란 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대를 참으신 후에 그 다음 세대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직접 가나안의 막강한 일곱 족속을 쫓아내시고 그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까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건지시고 또 그들을 인내하신 시간이 무려 450년 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해서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속을 잊기도 하고 또 자기 입장이나 이익에 따라 이리 저리 약속을 바꾸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400년이 아니라 4000년이 걸려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때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믿으면서도 마음 든든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저처럼 변덕이 죽끓듯 하시거나 혹은 쉽게 포기하시는 분이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항상 불안할 것이고 두려움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의 인내와 신실하심 덕분에 한 것도 없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복을 얻게 되지만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간인 왕이 필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국 사무엘 시대에 다른 이방나라들 처럼 강한 나라를 만들어 줄 인간 왕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심각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데, 그것이 부족하다고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왕으로 달라고 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주셔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너무 심각한 불신앙으로 인해 그의 가문을 폐하시고 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다윗에게 이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하셨으며 그 약속을 지키셔서 결국 그의 혈통에서 이스라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게 아무리 좋고 아무리 능력있는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복이 어마 어마해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때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형편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사람을 왕으로 삼고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원죄를 가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만 빼고는 그 무엇이라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 돈, 권력, 지식, 능력, 심지어는 자기 직업까지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의 왕이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려 주셔야만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뿌리깊은 죄의 문제를 직접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해결해 주시고 그렇게 우리의 왕이 되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기 전, 모든 사람의 삶의 흔적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똑같습니다. 그가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의 삶은 항상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 싫어서 거부하며 불순종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절대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지금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려질 때까지 참고 참고 또 참으셨으며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고, 또 다른 것을 왕으로 삼고서 살았던 과거의 삶과 그 삶의 흔적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일이 먼저 이루어 져야 비로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나의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어 주시는 일의 진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을 온전히 나의 왕으로 모셔들이기 전의 나의 역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됨과 부족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도 그렇게 부족했고, 또 지금도 이렇게 부족한데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 그 백성됨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게만 복된 소식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의 우리의 상태나 여전히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우리의 옛 모습에 대한 메세지를 들을 때, 그래서 나에게 복음이 복음이 필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복음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언제나 복음의 은혜 가운데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복음의 능력 속에서 겸손하고 기쁨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모두가 항상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그 가운데 기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참 이스라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