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9. 새벽예배 -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애굽기 68)
본 문 : 출애굽기 19장 16-25절
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기적같은 은혜라는 것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실 하나님 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당부하셨고, 함부로 시내산을 오르지 않도록 조심시키시고 또 조심시키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시키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단순히 인간과 그 인간이 섬기는 신의 만남이 아니라 백성들과 왕의 만남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왕으로 맞이하고 또 모셔들이는 절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또 나팔소리가 울릴 때 시내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나와야 한다는 요구는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굉장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생각과 마음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항상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분명히 그렇게 하는 일에는 엄청난 특권과 복이 따라오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고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하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하는 책임도 짊어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한 분 밖에 없는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선택이 아니라 가장 큰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셋째 날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빨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자신들을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산 위의 풍경은 저절로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꼭데기를 온통 뒤덮었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행차를 알리는 우렁찬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기뻐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영혼은 항상 떨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또한 둘째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현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나팔 소리를 듣고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행차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러 나갔습니다. 산 기슭에 서 있는 그들은 다시 한 번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시기 전에도 산 위에는 빽빽한 구름과 우레와 번개가 있었는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순간이 되자 나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하나님은 활활 타오르는 불 가운데 임재하시는데, 산은 온통 빼곡한 연기 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웅장하고 든든하다고 여기는 산도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하지 못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모세를 산 꼭대기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부르시는 곳으로 올라 갔습니다. 거기 오르자 마자 모세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걱정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저는 이렇게 걱정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문득 처음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 때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에 대해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때는 비록 하나님은 창조주셨고 인간은 피조물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항상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사이였고, 만나고 또 만나도 그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그런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무리 이전처럼 우리를 만나 풍성하고 거리낌 없는 교제를 나누고 싶어하셔도 그러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었고 인간은 언제든지 그 불에 살라 없어질 수 있는 떨기나무 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날 모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아마도 많이 슬프셨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거리낌 없이 만나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셨으니까요. 죄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원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죄들도 똑같은 역할을 합니다. 죄는 어떤 죄인든지 똑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두려운 일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것을 원치 않고 하나님도 그것을 원치 않아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죄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옷을 빨고 스스로를 성결케 하는 준비를 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삶 속에서 소소하게 여겨지는 죄일지라도 그 죄와 열심히 싸우며 우리 삶 속에서 죄들을 몰아내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서는 일이 두려운 일이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지극히 선하시고 풍성하신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우리의 왕이 되기를 원하시며 또 왕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풍성함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를 쌓아 올리면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혜택과 복을 대부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산에 경계를 정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멀리하고 싶으시고 거리를 두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심은 그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이 아무런 경계 없이 교제하며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들에게 한 없이 풍성한 은혜를 제한 없이 부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어제 함께 묵상해 보았듯이 이미 경계는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지성소의 휘장을 둘로 찢으실 때, 그 때 그 경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활짝 열려진 휘장 사이로 난 길이 우리의 죄 때문에 다시 가려지고 좁아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로 부터 흘러나오는 그 풍성한 은혜의 물줄기가 약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기꺼이 죄와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과 순결의 싸움을 계속한다면 우리 앞에는 항상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이 활짝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거리낌과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교제를 누리며 사는 복을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