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7. 금요기도회 -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사도행전 102)
본문 : 사도행전 17장 22-34절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과 일행들의 전도여행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데요. 사도행전이 그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신경써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그 도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바울이 성령충만했고, 그 누구보다도 능력있고 탁월하게 복음을 전했으니 가는 곳마다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것 같지만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실패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린대로 입니다. 사람의 숫자만 놓고 본다면 실패한 적도 여러 번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그런 식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디서든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떤 도시에서는 정말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난 반면에 어떤 도시에서는 극렬한 반대나 혹은 냉소적인 비웃음이 반응으로 되돌아 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세 도시가 그랬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지만 동시에 심한 반대와 핍박을 받게 되었고, 베뢰아에서는 따뜻한 환대와 차분한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들린 아테네에서는 몇몇 사람만 복음을 믿었을 뿐 대개는 복음을 비웃었습니다.
전해진 복음이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어느 도시에게선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지요. 그런데, 각각의 도시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다른 반응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그 일의 열매를 결정하는 것은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사역을 해 보면 이것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이 앞에 서서, 그 자리에 모인 성도들에게 똑같은 하나의 설교를 전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성도 한 사람에게서 맺게 하는 열매는 너무 너무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그 말씀으로 쑥쑥 크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오히려 영적으로 퇴보하기도 합니다. 씨앗도 같고 씨를 뿌리는 사람도 같은데, 열리는 열매가 천차만별, 극과 극입니다. 그러니, 이런 차이는 그 씨앗이 뿌려지는 밭, 그러니까 듣는 사람의 마음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거쳐 온 도시들 중에서 두 도시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서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고 그래서 맺혀진 열매도 굉장히 달랐습니다. 우선 베뢰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들 중에는 헬라의 상류층 부인들과 남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이미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헬라인 상류층 부인들과 남성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의 상류층 부인들은 대개 세속적인 즐거움과 타락한 문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편은 힘이 있고 부자이고 주로 권력 놀음에 빠져 있었으니 그들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일수록 대개는 자기 고집이 강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을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또 모든 남자들이 다 비슷하지만 헬라의 남성들은 특히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베뢰아에서는 스스로를 바꾸기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놀라운 일이 베뢰아에서 일어난 이유를 살펴 본 적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마음이 너그러웠습니다. 바깥 세상을 향해서 부드럽고 겸손하게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려 왔을 때, 그 복음을 그냥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진리됨에 이끌려서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였으며,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편견 없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그런 놀라운 영적인 부흥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점에서는 베뢰아와 굉장히 비슷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기록만 보면 단지 세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테네어서는 베뢰아에서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17장을 보면 아테네라는 도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두 곳이 나오는데요. 먼저 21절은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아덴 사람들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물론 본문은 그것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지만 아테네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알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이 굉장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진짜인가 해서 날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하고 공부했던 베뢰아 사람들의 기질과 많이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두번째 평가는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는 바울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기 위해서 신전까지 지었던 사람들이니까요. 요즘 표현으로 아얘 핏줄속에 종교적인 감정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그냥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했던 베뢰아 사람들의 심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테네에서는 이상하게도 베뢰아에서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종교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은 이런 측면에서는 굉장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면서도 복음을 들은 후에 그냥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으려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과 종교적이고 영적인 감정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처음 시작될 때, 우리는 결코 종교적인 관심이나 열정만으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믿음이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대해 가지는 막연히 뜨겁기만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변하지 않습니다. 일단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 다음에는 뜨거운 열심과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기독교는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경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굉장히 복잡하고 그 내용들도 굉장히 예민합니다. 때로는 정말 이 모든 것을 알고 지켜내야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나 하는 짜증이 생겨날 정도로 성경은 영혼과 신앙에 대한 정말 세세한 사항들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서는 아얘 그런 말씀들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버리고서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참된 삶이나 신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얘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쳐 보면 그 내용이 조금 복잡해지고 세밀해 진다 싶으면 일단 눈을 감고 깊은 묵상에 들어가시면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아마도 이런 분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는 그런 세세하고 복잡한 것들까지 알아야 하고 또 그런 것들까지 잘 지키고 붙들어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고 그런 것까지 잘 붙들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러려고 최선을 다해서 애써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바로 제 손에 들려있는 이 성경이 그 근거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감정과 종교적인 열정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라면 성경은 이렇게 두꺼워야 할 이유가 없고, 두껍더라도 이렇게 다양하고 세밀한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두껍고 성경에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런 성경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모든 것을 알고 또 지켜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온전한 영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복잡한 모든 것들을 알고 믿고 지켜내야만 하는 걸까요? 왜 예수는 그냥 되는대로 마음대로 믿으면 안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을 가장 쉽게 말씀드리면, 죄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기능들이 다 망가져 버려서 이미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잘못된 프로그램이 입력된 계산기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상적인 계산기라면 1+1이라고 입력하면 항상 2라는 대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잘못된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1+1이라고 입력하면 항상 틀린 답을 내놓습니다. 만약 계산기가 생각을 할 줄 안다면, 계산기는 자신이 잘못된 답을 내놓고 있다는 것을 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계산기는 항상 자기 답이 정답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항상 틀린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인간의 영적인 열정은 항상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해 있을 것이고, 인간의 진리에 대한 추구는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사람의 영적인 열정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의 방향까지도 망가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영 엉뚱한 데로 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바르게 잡아주지 않으면, 또 성경을 통해서 세밀하게 바로 잡아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게 우상을 섬기는 믿음이 되고, 우리는 바로 안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헛된 것을 아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종교적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엄청난 열심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복음이 들려 왔을 때, 그것을 비웃고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열정과 진리에 대한 관심의 방향이 완전히 어긋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감정 자체에만,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에만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열린 마음이 아니라 실은 교만하게 닫힌 마음으로 진리를 들었습니다. 진리를 진리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거부하고 비웃은 자리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성도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참 신앙과 풍성한 신앙을 위한 모든 교훈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참 신앙은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그 능력과 완전하심, 그 분의 사랑과 영광. 이런 것들을 바르게, 그리고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 알고 인격으로 알고 경험으로 알고...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적인 열정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속에는 영적인 뜨거움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열심이 있습니까? 또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힘써 알아가는 과정이 되고 그래서 그 덕분에 내 신앙은 더 분명해지고 더 풍성해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모습들이 있어야 하며 이런 복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면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데 느슨해지고 게을러 집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는 도중에도 그렇게 되고 있지 않습니까? 벌써 제가 드리는 말씀들이 자꾸 나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별로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한 번의 예배, 한 번의 성경공부 속에서도 그래야 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 것들과 싸워서 이길 때, 우리 신앙은 바르고 견고하며 풍성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감으로써 우리 모두의 신앙이 더 바르고 더 풍성한, 분명한 신앙, 하나님이 정말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으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