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5.08. 금요기도회 -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사도행전 105)

장유진 2015. 5. 1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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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7장 24-29절




지금 백주년 기념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이재철 목사님은 예전에 스위스 제네바 한인 교회를 섬기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그 스위스에는 라브리 공동체라고 굉장히 잘 알려진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 공동체는 사실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이나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대로된 기독교의 진리를 알려주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많이 일어났고,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스위스에 있다보니 거기 가려던 한국 사람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제네바 한인 교회에 들르곤 했는데요. 그 때 이재철 목사님께서 그런 분들에게 왜 여기까지 오셨느냐, 왜 거기에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대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구요.”라고 말이죠. 


또 이건 제가 경험했던 일인데요. 제가 일산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 일입니다. 한 번은 장로님 한 분이 지금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어버린 ‘사랑의 동산’이라는 수련회 다녀 오셨습니다. 저도 억지로 가 보라고 하셔서 한 번 다녀오기는 했습니다. 만 제 기준으로는 기독교 수련회라고 하기 힘든 그런 점이 참 많아서 거기 가 있는 삼일 동안 정말 불쾌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우리 교단에서는 이단이라고 규정되어서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는데요. 아무튼 그 장로님께서는 거기 다녀오셔서 아주 커다란 감명을 받으셨습니다. 가면 엄청나게 잘 해주고 높여주고 하니 거기 감동되신 것을 하나님을 만났다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거기 다녀오신 장로님은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목사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에게도 그 내용을 들려 주셨는데요. 내용인 즉, “목사님, 저는 사랑의 동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도 꼭 참석하셔서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과 또한 그 만남에 대한 기쁨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참 순수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두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대한 굉장히 커다란 오해가 숨어 있습니다. 그 오해란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장소,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곳에만 계시고 그래서 그 곳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면 특정한 기도원에 찾아가기도 하고, 특별한 교회나 혹은 집회에 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만나려는 노력들이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행동들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오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살던 삶의 자리를 잠시 벗어나서 조용한 곳으로 가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집중적인 기도의 교제를 나눌 수도 있구요. 그렇지만 그것이 만약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런 장소로 가야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 가면, 그 교회에 가면 은혜가 있다고, 뜨거운 체험이 있다고, 그러니 거기 가야 하나님이 계시는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런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혹시 그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찾아갈 때의 마음가짐이,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 마음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더 간절하고 더 절실한 마음, 더 헌신되고 열린 마음으로 그 곳에 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사실 목사로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합니다. 설교를 하다 보면요. 목사는 똑같은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거나 변화되는 정도는 다 다릅니다. 각각의 교회가 다 다르고 각각의 성도가 다 다릅니다. 무슨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 생각처럼 어떤 교회와 그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많이 함께 하시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과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의 열정 때문입니다. 제가 보면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성도들은 아얘 처음부터 태도가 다릅니다. 저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반드시 듣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그 눈길은 초지일관 설교자를 향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기 때문에 민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행해지는 내내 얼굴표정이 수시로 바뀝니다. 무표정하다가 지루한 표정으로, 그리고 다시 졸리운 표정으로...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깨달음, 뉘우침과 은혜를 얻었다는 표시가 역력합니다. 설교내용에 따라서 표정도 함께 움직입니다. 이런 성도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예배를 마치고 나면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성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이 살다온 사람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서와 그 시간 동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더 확고한 믿음과 깨달음을 얻으려고 안깐힘을 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평상시의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그 사람이 예배당 안에서 예배시간을 통해 얻고 누리는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습 좀 해 볼까요? 바울이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했던 사실이 무엇이었죠? 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 안의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또 왕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지난 금요일에 살펴 보았습니다. 대략이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창조자와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은혜롭고 능력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님으로 소개한 바울은 그 다음에 그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온 우주와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전,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든 그게 예배당이든, 아니면 성전이든 간에 그 안에만 계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예루살렘 성전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운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기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 계시지 못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소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가 나오는데요. 솔로몬은 정말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어놓고서 기도하는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비록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부, 그리고 이 우주 전체라도 감당치 못할만큼 크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도 그 거처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할 정도로 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예배당 안에 머물러 있듯이 그렇게 여기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만 계신다거나 혹은 여기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그런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상들이나 이방신들처럼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분’이시니까요. 


하나님은 항상 그리고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실 수 없는 곳이나 어디건 그 분이 자리를 비운 상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고 또 어딘가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이 여겨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디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힘있게 일하시고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지 어디는 계시지만 어디는 전혀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어느 한 곳에만 갇혀 계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어디에는 더욱 더 충만하고 특별하게 임재하시겠다고 결정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장소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 안, 어떤 기도원의 심지어는 어떤 자리에서는 기도가 더 잘 되고, 더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나님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경험이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예배당 안이나 혹은 그 기도원의 특별한 자리에 묶여 계신다는 뜻인데, 그러면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도 아니고 언제 어디나 계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가거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분명하게 인식하며 믿는 것이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우리의 삶 전체를 아우르면서 힘을 발휘하는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힘이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이 부분 부분 나눠져 있고 그 부분들 중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신앙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만 다른 부분들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좋구요. 그런데 교회 문을 나서면 신앙은 이내 힘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의 논리와 요구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일도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를 따라 이루어 집니다. 성경이 답이 아니라 옆집 아줌마가 답이고 뒷집 언니가 답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능력이고 나의 능력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과 말이 기준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자, 세상을 이기자, 지역을 변화시키자’라는 이야기를 수십년 동안 해 왔고, 수없이 그렇게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변했습니까? 성도들이 세상을 이겼습니까? 교회들이 자기가 서 있는 그 지역을 새롭게 했습니까? 애석하게도 저만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그런 소식을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제 귀에는 성도들이, 그리고 교회들이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려 왔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가 그렇게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오히려 나타난 결과는 그와 반대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이 실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만큼도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결심을 하고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욕심도 못 이기는 연약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도 바꿔내지 못하는 믿음이 이 세상을 새롭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이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왜 항상 이렇게 약한 채로만 남아 있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 분의 계심을 감당하지 못할만큼 무한히 크신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가두어 두었고,  그저 하늘에만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해 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실 수 없는 분으로, 하늘의 하늘,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분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온 세상 어디나 계시며, 내 삶 구석 구석에 없는 곳 없이 계시며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는 분으로 정말로 믿고 살았다면, 분명히 세상을 바꾸게 해 달라는 그 기도와 세상을 새롭게 하자는 그 구호는 우리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현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을, 너무나 커서 하늘 위나 스올 밑바닥이나 바다 끝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온 우주를 구석 구석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치는 그 크고 충만하신 하나님을 교회 안에만 계시게 하고, 내 삶의 지극히 일부분에만 그것도 아주 미미한 영향을 미치는 분으로 한정하며 살아왔으니 아무리 기도하고 또 구호를 외쳐도 이 세상은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며 믿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 광대하신 하나님, 그래서 절대로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실 수 없는 그 크신 하나님, 온 세상 어디나 계시고 온 세상 구석 구석을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그리고 내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만 한정시켜 놓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실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해 가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존재가 가족을 새롭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잠가 두었던 여러분의 삶의 모든 구석 구석의 모든 방문들을 모두 다 열어 젖히시기 바랍니다. 열어 젖혀서 하나님께 내어드려 언제 어디나 계신 하나님,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거기까지 들어오셔서 거기서도 하나님이 되게 해 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누추한 인생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존재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사는 내 삶의 자리를 새롭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을 그 크신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로 내어 드려서 언제 어디서나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이제 하나님을 언제 어디나 계신 분으로 믿게 하소서.
  2. 내 삶의 구석 구석을 어디나 계신 하나님,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겨서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