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5.10.3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욥기 31-33장)

장유진 2015. 10. 30.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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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욥기를 계속 읽다가 보니 참 부러운 사람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욥기의 주인공인 욥입니다. 제가 욥을 부러워 하는 것은 그가 받은 복때문이 아니고 그가 받은 고난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는 욥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말들을 읽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짓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으며, 또한 그런 노력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를 다시 보게 되었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물론 욥이 자신은 죄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기는 지었겠지요.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두드러진 죄를 그것도 의도적으로 지은 적은 없었습니다. 욥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부분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이 일부러 죄를 지은 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정의를 위해서 나서야 할 때, 뒤로 물러선 적은 없었고 또한 선을 행해야 할 때 그 의무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거룩과 의로움을 위한 욥의 헌신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는 그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의를 행했고 또 선을 행했습니다. 적어도 의도적으로는 그런 의무를 저버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이전에 죄만 안지으면 된다, 죄짓지 않는 것만도 대단하다, 그 정도면 참 잘하는 것이다, 충분하다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정도 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고 욥의 삶은 성도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비록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적극적으로 의로운 편에 서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바울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소극적인 선, 그러니까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적극적인 선, 그러니까 우리가 선한 일에 헌신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의 욥이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면 자기 안에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욱 더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은 비록 그가 율법 아래서 살아갔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훌륭한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수로 저지르는 죄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고의로 죄를 짓는 일은 최대한 줄여야 하겠고, 또한 선을 행해야 할 기회가 있을 때, 그것을 모르는 척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도 한 가지 잘못은 있었고, 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욥이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런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머지, 하나님을 그렇게 의로운 자신에게 벌을 내리시는 불의한 분으로, 적어도 자기 보다는 의롭지 못한 분으로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욥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엘리후라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욥과 다른 친구들 보다 나이가 많이 어렸습니다. 엘리후는 다른 사람들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잘 찾아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어린 자신이 듣기에 욥도, 다른 친구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는 커녕 영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엘리후는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이라” 우리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나머지 세 사람들은 나무라시면서도 엘리후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로 그가 한 말이 다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야기를 시작한 동기만큼은 하나님께서도 옳다고 인정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굉장한 재난이 일어나거나 혹은 환란을 당하게 될 때, 사람들은 대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도대체 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저런 일을 당하는가?’하는 생각과 ‘저런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저 사람들은 그만큼 큰 죄를 지었을 거야’라는 생각입니다. 앞쪽이 그런 재난을 보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부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뒤쪽은 직접 고난을 그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죄와 연결시켜서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생각 모두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후의 분노는 정당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람이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서도 전부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회교국가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적은 나라 사람들이 커다란 재난을 당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거꾸로 어떤 나라가경제적으로 부유한데, 그런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나라는 예수를 믿어서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과하다 싶으면 그런 일을 행하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또 어떤 사람이 큰 복을 받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서 그렇다고 너무나 단순하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은 그런 단순한 틀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틀에 들어맞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고,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일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이러니까 저렇다’고 단정지어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조심스럽게 참고와 교훈 정도로 삼는 수준에 머물러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다 설명하려고 드는 대신에 그 분의 선하심을 믿으며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겸손한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옳다 하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