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3.13. 주일오전 -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에베소서 11)

장유진 2016. 3. 14. 12:28



20160313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1장 18-19절





지난 주일에는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하게 그리고 끊임 없이 기도하고 있었던 첫번째 기도제목을 살펴 보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다음, 두 번째의 큰 기도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세 가지 은혜를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순서로 기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가 우선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시고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제대로 인격적으로 깊게 알아야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그런지는 한 가지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인색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뭔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진짜로 준 것일까, 이게 빚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인색한 사람이 준 것이니 넉넉한 마음으로, 좋은 것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받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하게 기뻐하고 행복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사람, 아주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았다면 어떨까요? 더 작은 것을 받아도 훨씬 더 기뻐할 것입니다. 더 감사할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이 꼭 알았으면 하고 기도했던 세 가지 은혜인데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 가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은혜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인지 감이 오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복과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력은 처음부터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비슷하고 보면 됩니다. 아기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그 때는 그저 어렴풋한 형체와 음영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엄마 아빠는 아이가 자기를 본다고 좋아하지만 그런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가 정말 보려면 아이의 눈 속으로 빛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빛이 밝고 분명해 질수록 아기는 더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이런 이치가 우리의 영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요. 처음부터 밝고 분명하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떠진 눈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춰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보기 시작하고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받은 놀라운 복과 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지만, 애석하게도 제가 그 은혜와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느낄 수 있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설교자로서 느끼는 좌절과 한계이지만,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저는 그저 바울을 따라 그 복이 무엇인지, 제가 알고 깨닫고 누리고 있는 정도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바울처럼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래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가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기도를 드렸지만, 오늘은 앞 쪽에 나오는 두 가지만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게 된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성도에게 주는 소망’, 그리고 ‘그 부르심 안에 들어있는 소망’입니다. 성도는 바로 여기에 자신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도들을 죄와 죽음 가운데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부르심만이 성도들의 참된 소망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대통령이 선출되고 나면 대통령은 자신을 도와서 나라를 꾸려갈 관료들을 임명합니다. 거기 선정되고 부름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 자리를 영광스러워하고 황송스러워 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계속해서 마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이런 사람들을 설득할 때 대통령은 어떻게 말할까요?  당신 아니면 안된다고, 꼭 도와달라고 설득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기만하면 내가 뒷 일은 다 책임지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 앉혀 놓지만, 대통령은 끝까지 그 사람을 책임을 져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꼭 대통령이 무책임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책임을 지고 싶고, 또 책임을 지려고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습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강아지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만두야!’라고 이름을 부르면요. 어떤 때는 좋아서 쪼르르 달려 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만두야!’ 하고 불러도 저 멀리서 고개만 살짝 돌리고 그저 쳐다만 볼 때도 있습니다. 더 심할 때는 아무리 불러도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모르는 척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제 저 놈의 개까지 날 무시하나 싶어서 욱 하지요.  


성도 여러분,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부름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부른 사람을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개 한 마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부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calling,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는 그렇게 불러낸 목적과 결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부르심은 그 부르심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그 ‘사람’을 부르는 방향으로, 부름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그러는 것인데, 부르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그 목적지점까지 부름받은 사람들을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냥 부르심이 아니라 ‘효력있는’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렇게 능력있는 부르심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말씀’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과 허무 속에서 천지 만물을 만들어 내신 능력이며, 또 그 모든 것들에 질서를 주신 능력이고, 그 모든 것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또 살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바로 이 능력이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그대로 일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부르심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소망은 그저 ‘바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소망을 이렇게 노래 합니다. ‘다 잘 될거야.’하고 말입니다. 듣기에는 대단한 소망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또 다시 불안해 지고 절망이 찾아옵니다. 이런 종류의 소망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고 보장할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망은 참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얻은 소망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그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이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말씀드리는 그 능력있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그 결과가 눈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200퍼센트 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소망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특징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부름받은 성도의 삶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삶은 그 중간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가장 복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살면서 일어나고 경험하는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성도에게는 그것이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중간에 일어나는 일 때문에 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 떨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 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건지셨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었고,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우상숭배에도 빠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본다면 분명히 불안해 지고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정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을 정말로 얻을 수 있을까 불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이미 우리를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불안과 흔들림은 잦아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하고 넘어지고 연약해 지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넉넉한 부르심과 우리를 부르신 주님만 바라보면 결국 우리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고 힘입니다. 이 소망이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믿음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두번째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게 될 상속물이 있는데, 그게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풍성한지 꼭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될 약속이 있지요? 그리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될 약속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성도에게는 그 두 가지가 확실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궁핍한 자들이 되거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료하게 지내는 그런 사람들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그 나라의 왕같은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을 물려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곳을 우리 주님과 함께 다스리고 관리하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 세상을 채우며, 나로 인해 더욱 더 아름다워지고 영광스러워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지켜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한가하신 분이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계산해 보았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니 한 쪽 성벽의 길이가 2400킬로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넓이로 계산해 보면 지금 인도 땅덩어리보다 더 큰 셈인데 거기다가 높이도 2400킬로미터이니까 정말 어마 어마한 크기의 성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왜 이런 계산을 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가 거기서 살게 될 집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계산해 보고 너무 기뻤다고 합니다. 자기가 살게 될 집의 평수가 그야 말로 어마어마하게 넓을 것이라는 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좁은 집에서 사시는 분들은 기뻐하고 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그런 집에 사셔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엄청나게 넓은, 보석으로 치장된 대저택에서 사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내가 사는 집이 넓고 화려하다고 행복해 하고 자랑스러워 하며 살겠습니까? 내가 살아생전에 옆집에 사는 김집사보다 한 일이 많아서 그 나라에서는 김집사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멘션에서 산다고 그게 그렇게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그러면 지금도 나보다 좁은 집에 사는 김집사는 거기서도 기죽어서 불행하게 살겠네요? 바울이 과연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속물이 그렇게 영광스럽고 부유하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도,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우리의 영광도 정말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의 마음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하늘의 상속물에 대해서 아얘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상태가 되거나, 기껏해야 우리가 받게 될 상속의 영광과 풍성함을 이런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사람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영광과 풍성함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영광과 풍성함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그 영광스럽고 완전한 나라를 물려받아 그 나라의 관리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섬기게 될 것이라는데 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산다는 것은 참 힘드는 면도 많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얻게 되는 기쁨 또한 굉장합니다. 내가 가장이 되어서 책임지고 돌보는 나의 가정이 평안하다고 느껴질 때, 아내는 나로 인해 행복해 하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늘 없는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볼 때, 그 때 느끼는 기쁨은 정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고 우리의 가정이 완벽하고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자신이 그런 가정의 가장이라는 자체를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맡기신 곳을 돌보며 다스릴 때, 그러한 나의 섬김으로 인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더 분명해지고 찬란해져 가는 모습을 볼 때,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이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고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전히 회복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도의 진짜 풍성함과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정말 매력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해지고 즐거워집니다. 아마도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과 즐거움일 것이고 가장 달콤한 행복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그 순간 영원히 멈춰버리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비교할 수 없이 좋고 행복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행복을 느끼고 또 이런 갈망을 품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 안에서 우리를 그렇게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말이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정말 완벽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모든 선한 것들을 완전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한정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장 조화롭고 균형있게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과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알고 누리는 관계 속에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 하나님은 그 때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바로 분이십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살리시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독생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사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빠짐 없이 나의 모든 것을 붙들어 주셨고, 지극한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분이십니다. 그렇다면요,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알게 되고 또 완전하게 누리게 된다면, 그 때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과 만족은 얼마나 클까요? 우리가 그런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면, 그래서 그 분을 완전히 누리게 된다면 그런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필요하고 무엇 때문에 갈증을 느끼겠습니까?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영원히 노래부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이 풍성하고 영광스럽다고 말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 또한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영광스럽고 풍성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광과 풍성함은 지금 여기서 사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겠느냐, 그저 소망과 바람으로 끝나는 일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이런 풍성함과 영광은 지금 여기, 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과 상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분명한 상관이 있습니다. 이 영광과 풍성함이 그저 확실한 소망이 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미치는 영향 말고도 아주 실제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지금 여기서도 그 영광과 풍성함을 보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1장 14절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증이라는 말은 계약금이라는 말인데요. 이 계약금이라는 것이 앞으로 있을 거래를 보증하는 역할을 하지만 계약금 자체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실재입니다. 아직 거래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 계약금을 가지고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사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은 우리가 성령님과 의 관계 속에서 그 분과 교통하며 살아가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된 모든 복과 은혜들을 맛보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충만한만큼 더 생생하고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와 성령님 사이의 교통이 거의 끊어져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지 그렇지 않은지 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도 전혀 맛보거나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해 야하고 항상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현실에 덧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은 열쇠입니다. 그냥은 잠겨져 있어서 아무도 열 수 없고,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손입니다. 그 안에서 거기 있는 것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는 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이루어져 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지금 여기, 현실 속에 있는 것들만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있는 은혜와 복들을 이 땅에서 누리며, 즐기며, 그 능력으로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너희의 부요함과 풍성함이고 그것이 너희 삶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아직은 감겨 있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구원의 확실함, 이러한 기업의 풍성함과 영광을 지금 이 땅에서 확실히 보고 누릴 수 있는 은혜가 바로 그렇게 뜨여진 믿음의 눈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주시지 않고는 그런 것들을 보고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참된 소망, 성도의 참된 부요함과 영광은 지금 여기서 사는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은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진 사람들은 그것을 볼 것입니다. 눈이 열려진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도 그 풍성함과 영광 속에 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영광스럽고 충만한 복들을 놓치지 보고 누리며 사는 그 삶을 바라보며 그 소망을 향해 나가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하늘의 풍성함과 영광을 지금 이 곳으로 끌어 당겨서 보고 누리며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복과 은혜를 소망하게 하소서. 
  2.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눈을 밝혀 주셔서 지금 여기서도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3. 품고 기도하는 분들을 위해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참 믿는 자로 삼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