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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매일성경 설교 19.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본문 : 민수기 25장 01-15절


도입 : 여전히 희망은 있는가?

회원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우리나라, 그리고 이 땅의 교회에 진정으로 희망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정직하고 흔쾌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현실을 직시한다면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은 지금 이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라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정말 마음 편하게 희망을 품을 정도로 ‘괜챦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문득 문득 아주 가끔씩은 “이제 됐다. 이제 희망을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밝고 희망찬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런 불빛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더 큰 어두움들이 몰려오곤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처럼 크게 그리고 꾸준하게 발전해왔고 또 발전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뭅니다. 규모 면에서만 본다면 우리나라나 교회는 지금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고 기쁜 일이죠. 그렇지만, 그와는 반대로 사회나 정치, 그리고 윤리, 종교는 오히려 그 빛이 희미해져 가고 혼동상태에 빠진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밝은 면들 때문에 그래도 괜챦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힘겨워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구조적으로 그래도 양심을 지키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건강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어 좌절하게 만들고 있고, 윤리적인 기준을 세우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들, 요령없는 꽉 막힌 사람들로 여기는 문화가 팽배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빠르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세상 정치판이나 시장판에서도 보기 힘들만한 일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는 사고방식들이 교회 안에서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빠르게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좋은 것이 선이라는 생각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도 점점 더 진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교회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거꾸로 교회가 사회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그러한 흐름에 거스르며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외롭게만 보이고, 손과 발의 힘도 점점 더 빠져 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우리나라도, 또 이 땅의 교회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닌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회원 여러분, 이런 우리 사회, 이 땅의 교회에도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가 소망을 가진다면 그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이 될 수 있을까요? 

고스비 사건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꼬드겨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 후,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발락의  계획을 무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을 무척 두려워했던 발락은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에 주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을 꼬득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게 함으로써 마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따라다니시면서 나귀가 말하게 하고, 그에게 직접 천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심으로써 발락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을 원천봉쇄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성벽은 이렇게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 안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필요한 싸움을 해서 상처를 입고 낙심하는 일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셨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그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나 들어와서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불을 보듯 분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우리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이유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밖에서 막아주셔도 우리가 긴장을 풀고, 열어주어야 할 것 열어주지 말아야 할 것 모두 열어버린다면 하나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음행은 단순히 부적절한 성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도 확실하게 드러나 있듯이 모압의 신은 바알입니다. 그런데, 이 바알을 섬기는 예식 자체가 바로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신전의 여사제인 성전의 창기들과 난잡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히 여자에게 팔려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탈선은 육체적인 범죄인 동시에 영적인 탈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음행은 처음부터 바알에게 드리는 제사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엄청나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능력을 이스라엘을 향한 징벌로 쏟아부으십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전염병이 돌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손쓸 겨를도 없이 이웃이, 가족이 쓰려져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탈선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오히려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일반백성들은 그런 지도자들을 보고 힘을 얻어 담대하게 범죄에 가담했던 것이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 중에서 이 일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색출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목을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실패,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들의 처형...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감당해 내야 했던 이스라엘은 정말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회막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무릎을 꿇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이스라엘 남자가 한 미디안 여인과 함께, 그렇게 울며 불며 엎드려 있는 이스라엘 회중 앞, 그리고 회막 앞을 지나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버젓이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눈을 비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남자가 시므온 지파의 족장 중 한 사람인 시므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할 당사자인 지도자가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그런 상황에서 정말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악할 수 없는 죄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어두운 상황은 없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헛 것을 보고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에게 또 얼마나 강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지 그저 두렵고 또 두려울 뿐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일에 한 사람이 뛰어 듭니다. 바로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 였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창을 하나 찾아 들고는 시므리의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처치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주 놀라운 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회중을 휘젖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명을 빼앗던 전염병이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물론 이미 2만 4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생명을 잃은 이후였지만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기울어 졌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다시 바로 세워진 것입니다. 전염병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을 색출해서 다 죽이라던 하나님의 명령도 함께 취소된 듯 합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없는 것처럼 여기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싯딤사건의 전말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어야 했고, 또 지도자들이 죽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한 사람 비느하스의 개입으로 일은 완전히 끝나 버렸고, 하나님의 진노는 오히려 비느하스에게 그리고, 비느하스를 통해 백성들을 향한 평화의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의 의미

비느하스의 행동이 전염병이 그친 것과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불러서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설명 : 하나님의 질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분명히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당황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질투는 유치한 감정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은 질투나 하실만큼, 그리고 그 질투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실만큼 유치한 분이신가? 하며 하나님에 대한 큰 오해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질투에 대한 기울어진 생각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질투는 결코 그것 자체로 부정적이거나 유치한 감정이 아닙니다. 물론 이 질투가 나보다 능력이 탁월하거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질투는 버려야 마땅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질투가 인격체 사이의 신뢰가 깨어져서 생겨나는 감정이라면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 또 아내가 남편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은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독점적인 사랑과 헌신, 그리고 신뢰의 관계 속에 누군가가 끼어들고 그것 때문에 질투가 생기는 일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는 독점적인 관계입니다. 그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들의 남편이시며, 우리들하고만 언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께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 사이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위치시킨다면 그래서 하나님께로 가야할 사랑과 신뢰, 그리고 마음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다면, 우리만 알기로 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남편이시며 또 우리와 영원한 언약관계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저버리고 신뢰를 저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질투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깊은 사랑도 아니고 완전한 사랑도 아닐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개념은 설명하기도 조금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고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잘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하기도 해야하겠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번째 설명을 들으시고 어쩌면 ‘그래 그런 것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질투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을 그렇게 가차없이 죽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래도 그 질투가 올바른 것인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충분히 생각하실 수 있는 질문이고, 또 반드시 대답되어야만 할 질문입니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런 당황스러운 모습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오해, 그러나 풀릴 수 없는 오해를 갖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질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제로 해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오래 참으시는 것도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분을 죽게 하셨으며 그 결과 우리를 구원한 것도 다 그 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들이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고 은혜가 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마지막 목적은 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세세히 설명드리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모든 진리 중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최고이신 분이십니다. 능력도 지혜도 사랑도 지식도 신실하심도... 그 어떤 것에 있어서도 그 분을 능가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고 최상되심을 지키지 못하시면 이미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견딜 수 없어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그 대신 다른 신을 택하는 것은 절대로 참지 못하십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반역한다면 그 피조물은 이미 자신이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근거를 부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피조물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랑 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그 분의 사랑의 영광을 가장 충만하게 드러내고, 그 분의 영광을 버린 우리들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분의 자녀들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하심은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이 부인되고 깨어지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일컬어 ‘하나님의 질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질투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되심을 지켜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실 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질투’ 그리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질투는 그 분께 너무 당연한 것이고 또 선한 것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노를 돌이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말씀이 잘 이해가 가시죠? 그러니까 이 구절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인 것은 그 마음이 겉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비느하스의 마음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비느하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발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진노를 거두어 들이실만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평화의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비느하스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는, 그의 혈통을 통해 제사장들이 이어져 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질투로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였고 그 질투를 통해 이스라엘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마음을 가진 제사장들이 비느하스의 혈통을 통해 계속 이어지게 할 것이며, 그 제자상 직분을 통해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속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두움에 더 짙은 어두움,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어두움이 더해졌습니다. 시므리의 범죄는 벼랑끝에 매달려있는 이스라엘을 밀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상황을 뒤집는 일, 그 이스라엘을 다시 살게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 질투를 가진 한 사람이 일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속죄의 언약,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원한 평화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금송아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일에 쏟아부어질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레위인들의 중보가 필요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크게 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모든 백성들을 다 죽이고 모세로 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렇게 하면 애굽사람들이 하나님을 악한 신으로 오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중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재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무시 무시한 뜻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형벌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 레위인들이 모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하나님 편에 서서 우상숭배에 가담했던 자기 동족들을 처형했을 때, 하나님은 그 진노하심을 거두어 들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스비 사건은 새로 생겨난 속죄 원리가 적용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고스비 사건도 바로 원래부터 있었던 이러한 속죄의 원리가 적용된 또 하나의 은혜로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게 그 분의 평화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질투하는 사람들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영원한 제사장 언약을 주셨습니다. 비느하스의 뒤를 잊는 제사장들에게 맡겨진 일이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의 중재는 일시적이었고 임시적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주어지는 속죄는, 비느하스를 통해 주어진 용서처럼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 효력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셔야만 했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는 유일한 백성들 조차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현실 속에 그 분은 그야 말로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셨고, 완전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고도 완전하게 풀렸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평화의 언약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보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과 그 세상 속의 교회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눈과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기대하고 소망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대로 이전보다 그리고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인류가 지나온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에서 조차 학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자신을 믿는 것, 그리고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이성적인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범죄의 양상은 상상을 초월하게 극악해져 가고 있고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점점 이런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보다도 교회가 더 어둡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비난해도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과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핏대를 올리며 비난할 수도 있고 한탄하며 한숨을 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좌절스러워서 저주하며 아얘 고개를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비느하스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질투하며 열심을 낼 수 있는 사람, 오늘날에도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의 언약을 위한 중보자가 될 작은 제사장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누군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서고,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 서는 것입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 그 아픈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고 이 세상을, 그리고 교회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결론 : 아직 희망은 있다, 비느하스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설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는가?”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네. 여전히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 이 세상을 위한 비느하스가 남아있고 교회를 위한 비느하스가 남아 있다면 언제나 희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며 또 다시 기회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많이 어둡습니다. 교회도 생각만큼 정결하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그렇다고 한숨만 쉬고, 한탄만 하지는 마십시다.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비느하스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세상과 우리들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품으셨던 그 마음을 닮아가고 회복하는 일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며, 그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한 그 분의 긍휼을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죄악의 자리, 어둠의 자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자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를 닮은 비느하스의 마음으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과 하나님,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의 도구가 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