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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매일성경 설교 40. 성소에 들어오려면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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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레위기 16장 1-22절




서론 :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예수님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중요한 분이시기 때문에 세속적인 역사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주전과 주후로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역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정말 혁명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거의 유대민족에게만 묶여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유대민족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교적인 사명을 망각하고 선민의식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수님 이전에 는 하나님께서 참된 구원의 길을 누구나 밝히 볼 수 있도록 활짝 열어놓지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아직 이 땅에 오실 때가지 뒤로 미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비유를 한다면 마치 캄캄한 새벽을 뚫고 태양이 떠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 누구나 구원을 받으려면 아무런 보장없이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거려야 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누구나 구원의 길을 훤히 보면서 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가장 중요하고 은혜로운 사건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이었습니다. 그 분이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참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고 있었던 커튼이 찢어졌습니다. 그렇게 지성소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는 ‘시은좌’ 혹은 ‘속죄소’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인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이곳이 ‘시은좌’라고 불리는 것은 거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이고, 속죄소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거기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셔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일년을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는 것도 모두 그 곳이었기 때문에 그 곳은 시은좌라고 그리고 속죄소라 불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의 시작점은 바로 죄 용서의 은혜였습니다. 이 죄 용서의 은혜가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복이든, 현실적인 복이든 간에 지성소 안 속죄소에서 죄용서의 은혜가 허락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주어질 수 없었을 뿐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에는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그것도 대제사장만이 향에 불을 피워 그 연기로 속죄소를 가린 후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사장은 목숨을 잃게 되고 그 제사는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앞에 서는 일,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바로 나답과 아비후였습니다. 성막을 완성하고 처음 제사를 드리는 날, 그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향을 피워들고 아무 때나 자기 마음대로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그 분 앞에 서는 일은 까다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옷

16장을 보면 속죄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어떤 날보다도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날이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고, 그 분 앞에서 그 분의 백성으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날을 지키는 규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모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법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맡은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것들도 마찬가지 무척 까다로웠습니다. 우선 그들은 옷을 주의하여 입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입는 옷은 겉옷 뿐만 아니라 속옷까지도 전혀 달랐습니다. 속옷들, 그러니까 직접 제사장의 몸에 닿는 옷들은 모두 세마포로 만든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아래 위의 내의도 세마포로 만든 특별한 것이어야 했고, 세마포로 만든 띠를 그 위에 착용해야 했으며, 머리에도 세마포로 만든 관을 써야했습니다. 그 모든 속옷들은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에 착용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이런 옷을 이렇게 주의깊게 입어야만하는 이유는 이 옷들이 ‘거룩한 옷’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제사장의 겉옷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 옷 속에는 이렇게 세마포로 만든 거룩한 옷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하나님을 동시에 나타내는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의 대표로 서야했고,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제사장의 옷들도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겉옷이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또 보석들로 장식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저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시거나 제사장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옷은 다분히 그 제사장들의 영적인 권위를 높이고 그래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그 제사장을 우러러 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에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겉옷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했고, 또 그 옷 자체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나타내 주기도 했습니다. 

속옷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속옷은 반드시 세마포로 만들어 입으라고 하시면서 그 옷은 거룩한 옷이기 때문에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맨살에 직접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재료로 허리띠와 관까지 만들어 착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속옷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제사장의 겉옷이 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와 그런 분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면, 속옷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그 분께 용납될 수도 없으며 그 분의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거룩한 옷’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복”에 대해서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복이 없으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예복이 없이 들어가려고 하다가는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의 옷에 대해서 여러 번 말했고, 언제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고 했으며, 요한 계시록에서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흰 옷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거룩한 옷’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옷은 단순히 거룩한 모양으로 만든 옷이 아니었습니다. 이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 그 분의 완전한 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을 때에만, 그 분의 완전한 의를 덧입었을 때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옷’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의가 아니라면 인간은 그 어떤 옷, 그 어떤 공로와 의로 자신을 치장하고 꾸민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더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다 드러나야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스도의 의’라는 ‘거룩한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렇게 모든 더러운 곳을 가리지 않는다면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제사장은 더없이 화려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지만 개인으로 볼 때는 그도 한 명의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의가 아닌 덧입혀 주시는 의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마포로 만든 제사장의 속옷은 바로 그 사실을 제사장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는 시청각 교재였던 것입니다. 


속죄제물과 번제물

옷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려면 먼저 두 번의 제사를 드려야만 했는데, 이것 또한 우리에게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수송아지로 속죄제물로 드리고, 숫양을 번제물로 드러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나아가서 자기 가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절차였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고, 또 그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그는 비록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를 용서받은 후에야 그는 하나님께 용납받은 사람으로서 비로소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존귀하고 거룩한 신분과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사람에 불과합니다. 죄를 용서받아야만 하는 하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용서와 받아주심이 없다면 단 한 순간도 그 분 앞에 설 수 없고, 또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이라는 가장 놀라운 은혜를 받게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그런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그러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속죄소, 회막, 지성소, 제단도 속해야 한다

그런데, 제사를 통해 깨끗해져야 하고 속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백성들과 제사장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백성들과 제사장 뿐만 아니라 회막과 지성소, 제단, 심지어는 속죄소까지도 다시 정결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성소에서 나온 후에는 제단을 위해서 속죄를 해야 합니다.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다가 바르고 손가락으로 피를 뿌려야 합니다. 죄가 완전히 속죄되도록 일곱 번이나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지성소는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 그 지성소 안에서도 속죄소는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임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땅 위에서 그곳보다 거룩한 곳은 그 어디도 있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거기까지도 속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직접 제사가 드려지는 제단까지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회막은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 안의 지성소는 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 지성소 안의 속죄소는 더할나위 없이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회막은 하늘나라에 있지 않았습니다. 용서해 주어도 용서해 주어도 다시 죄를 짓고 그래서 다시 속죄함을 받아야 하는 죄를 가진 이스라엘 중에 있었습니다. 비록 땅 위에 마련된 하나님의 보좌였으며, 그 분의 영광이 직접 임하는 가장 거룩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더러움과 죄 속에 있는 한 그것 때문에 더럽혀질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제사가 드려지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다시 속죄를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속죄제의 절차가 가지는 의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매년 속죄일마다 그 은혜를 새롭게 받고 또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제사장과 제사장의 가족들이 먼저 죄사함을 받고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구석 구석이 다 다시 깨끗해 져야 했습니다. 제단이라고 예외가 아니었고, 그 거룩한 속죄소라고 해서 열외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다시 깨끗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제사는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죄의 용서라는 은혜를 가져다 주었지만,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들과 하나님에 대한 아프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죄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 죄는 얼마나 집요하고 광범위하게 세상과 거룩함을 더럽히고 있는지, 그리고 또 그렇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은 실은 그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심각하게 여기시는지를 다시 보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도 속죄를 받아야 하고, 심지어는 성막의 속죄소까지도 더럽히는 죄를 바라보면서, 죄 앞에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속수무책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것또한 다시금 확인하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 : 지금, 속죄제를 바라보기

지금 우리는 아주 복되고 은혜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년에 단 한 번 그 해의 대제사장만, 그리고 온갖 까다로운 절차와 복장까지 다 갖춘 후에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곳에 이제는 믿는 자라면 언제나, 그리고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매년 반복되는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이 항상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단번에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소의 휘장을 찢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설이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믿음을 가지고 활짝 열리진 은혜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용서와 은혜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대로처럼 열려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로서는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무 쉬우면, 또 너무 많고 풍성하면 그것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한 줄모르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좋은지 모르게 되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특히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까다롭고 어려웠던 경험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니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좋은지를 제대로 아는데 있어서는 훨씬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 은혜의 크고 풍성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가 더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부러 멀리하는 듯한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설마 그러실리가 있겠느냐구요? 확실히 하나님께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그저 제가 그렇게 느꼈던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저는 한동안 꽤 오랫동안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20년 전쯤된 것 같은데요. 저는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과 더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에서 느껴지는 하나님과의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혹시 특별히 이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오래 되어서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때의 답답함과 영적인 좌절감 만큼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멀리하신다, 나만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제가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하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아무 때나 다가갈 수 있다고 해서, 그리고 항상 열려있다고 해서 그 문이, 그리고 그 길이 원래부터 그렇게 열려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서, 그리고 지금도 열어 놓으셔서 그렇게 활짝 열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혜를 지키고 누리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이 크고 놀랍도록 풍성한 은혜가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망각하는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언제나 우리를 회복시켜 줄 영적인 고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은혜됨을 기억하고, 그 은혜의 은혜됨을 지켜내지 못하면 그 은혜의 풍성함 까지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가는 길이 아무리 넓게 열려져 있다고 해도, 그 은혜가 아무리 풍성하다고 해도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잊지 않으며, 그 은혜를 은혜로 지켜냄으로 언제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