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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45.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느니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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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7장 20-28절



서론 :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하자

제가 대학에서는 무역학을 전공했습니다. 무역학은 굉장히 잡다한 학문이어서 상경계통의 과목들은 적어도 기초적인 것은 모두 다 배웁니다. 그 중에서 경제 경영수학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그 과목을 가르쳤던 교수님께서는 키가 작고 통통한 분이셨습니다. 이 과목의 내용 중에서 ‘선형 대수’라는 것이 있었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정말로 재미 없기 그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수학을 못하기 때문에 더 그랬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께서는 칠판에 문제를 적으시고, 그 문제를 푸시면서 너무 너무 행복해 하고 기뻐하셨습니다. 문제를 하나 푸실 때마다 우리들을 바라 보시면서 “아, 너-무 아름답다고, 너-무 사랑스럽다고, 정말 놀-랍지 않냐고?”하시면서 감탄을 연발하셨습니다. 농담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그 분의 그런 말이 진짜 감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꼭 같은 것을 보면서도 저는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언제 끝나나 시계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거기에 푹 빠져서 감탄하시고 행복해 하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요? 그 분과 저는 어디가 어떻게 달랐기에 꼭 같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분과 저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교수님은 정말 학문적 진리를 사랑하시고 그것을 깨달아 가는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적어도 그 ‘선형대수’라는 수학적 진리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도 꼭 같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히브리서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책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구원자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깊고 풍성한 진리들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이고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게 하며, 그 분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하며, 더 믿고 의지하게 할 수 있는 내용들, 정말 우리 영혼의 든든한 닻이 되어줄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히브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가 어려울까요? 행복해 하기가 힘들까요? 어쩌면 우리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해서 사랑이 부족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놓여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성경이 예수님만이 우리 믿음의 주이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그 분에 대한 가장 깊고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는 히브리서 같은 책들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신앙의 참된 중심을 떠나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신앙의 전부가 되시고 중심이 되어 계신다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더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풍성함이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는 것에 좌우된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그 일을 귀챦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자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너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또 얼마나 알기를 원하며, 알기 위해서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느냐고 물으며 과연 너의 믿음을 떠 받치고 있는 기초는 얼마나 참되며, 크고 단단한 기초냐고 묻는 하나님의 심각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벌써 히브리서 7장에 와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이며 모든 것 되시는 그 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렇게 지나가 버리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이 히브리서 묵상이 다 끝나기 전에 그 분을 더 알고자 하고 더 사랑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견고한 기초 위에 여러분의 믿음의 집을 짓겠다는 열망을 더 뜨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겨울은 그리스도의 계절입니다. 이 연말연시를 그저 분주하게만 보내지 마시고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고 더 사랑하게 되는 시간으로 삼아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를 이 겨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탄선물이라 여기시고 설레는 마음으로 천천히 묵상하시며 할 수 있으시면 연구도 해 보셔서,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시다 : 맹세로 세워진 제사장이시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손 한 번 들어볼까요? 먼저 있으신 분 손 들어 보세요. 그러면 없으신 분... 잘 모르겠다는 분....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확연히 눈에 보이는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참되고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삶의 깊이와 넓이, 여유와 평안함, 기쁨과 소망,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구원에 대한 참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소속을 여기 이 땅이 아닌 하늘로 옮겨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다 내 집이라 여기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 한 평 땅을 더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꼭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서 나의 구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또 우리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어디로 돌아가 그 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확신이 흔들리면 단순히 확신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믿음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을 얻으려고 이미 말라버린 우물 바닥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회복하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대상으로 돌아가 그 믿음의 대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다시 예수 그리스도, 마르지 않는 샘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생각과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회복될 수 있고, 성도로서의 우리들의 거룩하고 풍성한 삶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분만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중보자 역할 때문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모든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그 분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럴 자격과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께로 가야만 했고 또 받아들여져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은 것은 곧 영원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 필요는 절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제사제도였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대신 짐승의 생명을 죽임으로써 불완전하고 일시적으로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직접 짐승을 잡아 안수하여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없으면 제사가 드려질 수 없었고, 그러면 사람들도 하나님께 용서받고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죄를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이 직접 드리게 하지 않으시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그러니까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전히 제사장이 있고, 그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었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한 약속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사장을 세우는 방식이 굉장히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사장이 세워질 때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명령에 따라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저 그 혈통을 따라서 관례대로 제사장들이 세워지게 된 것 뿐입니다. 이 방법의 문제는 언제 무슨 일 때문에 이 전통과 혈통이 중단되거나 없어지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제도가 중단되거나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본의 아니게 이전에 했던 약속을 깨뜨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들과 이번에는 아들의 학예회에 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합니다. 분명히 이전에 그 약속을 할 때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꼭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의사에게 갑자기 급한 수술환자가 들이 닥친다든지, 사업가에게 그 순간이 아니면 큰 손해를 보고 부도가 날 일이 벌어집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서 10중 추돌사고가 나서 고속도로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일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능력이 없고, 예측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일과 약속하는 것들에는 확실한 보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직전에 제사장이 쓰러진다든지, 자기도 모르게 부정한 것을 만져서 스스로를 더럽힌다든지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그 해의 제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만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론의 자손들 중에서 세워지는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제사장이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의 순서’를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들이 세우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맹세까지 하시면서, 확고한 의지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는 분도 아니고, 그 분께는 피치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으십니다. 그 분은 그저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한 마디 말로 세상없는 사람이 하는 그 어떤 맹세보다도 더 확실한 약속을 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는 결코 맹세라는 것이 필요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자신이 직접 멜기세덱의 뒤를 잇는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을 세우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전혀 상황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약속을 바꾸지 않으시며, 그 어떤 약속도 이룰 능력을 가지신 분, 그래서 전혀 맹세할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맹세하셨습니다. ‘멜기세덱의 뒤를 잇는 그와 같은 영원한 제사장’을 세우시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맹세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가 이루어져 오신 분이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언약을 위한 더 나은 보증, 완전한 보증이 됩니다. 그 영원한 중보자가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그 중보자에게 의지하는 한 우리의 죄는 용서될 것이며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시다 : 그 분은 영원한 중보자이시다

인간 중보자가 가지는 두번째 한계는 그들이 죽고 사라지는 존재,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구약 제사장들의 역할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제사를 지내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라는 의미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과 은혜의 통로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제사장들이 가지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항상 다른 제사장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은 다음 제사장이 중보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이전 제사장에서 다음 제사장으로 바뀔 때 그 공백이 길어지면 큰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또 그 분의 백성으로 사는 일에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단 한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런 은혜들을 하나님께 용서받고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풍성하게 누려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용서를 받고 은혜를 받는 일에 중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이런 중보자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바뀔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의지해서 살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을 심히 불안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제도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와 불안함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에 비해 왜 그리스도는 언약의 더 좋은 중보이신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대개 우리를 구원얻게 하는 은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그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알려줍니다. 25절은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이유,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이유가 “영원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기도하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 그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기에 우리 구원은 확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를 믿습니다. 성도는 끝까지 견고하게 자기 믿음을 지키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우리 구원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왜 확실한 교리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교리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게 되는 능력은 우리의 힘이나 인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영원히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기도에 있습니다. 그 분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중보자이시고 그 분의 기도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고 또 완전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분의 우리를 위한 기도, 우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기도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변하지도 않습니다. 또 우리 삶의 그 어느 구석도, 우리의 약점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단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완전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분이 영원한 분이 아니며 그래서 그 분의 기도도 영원한 기도가 아니라면, 바로 그 불완전한 부분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할지도 모르며, 우리는 중간에 낙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가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며 그래서 그 분의 우리를 위한 중보와 기도도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충분히,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장 탁월하고 완벽한 구원의 중보자가 되시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시다 :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진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확고하게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중보자로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기도하시기 때문에 더 좋은 중보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 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완전히 적합하신 분이시기에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제사장이라도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도 죄인이고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하며, 그러기 전에는 제사장의 직분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 서고, 그 분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항상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가 받아들여졌을 때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다른 이들의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감당하고 있는 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 주는 통로이기는 했지만 확고하고 견고 한 보증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실은 자기 자신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며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셨습니다. 하늘보다 높이 되셨다는 말은 그 분의 삶과 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완전하게 그리고 흔쾌히 받아들여졌고,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늘보다 높아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일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27절은 예수님께서는 인간 제사장들과는 달리 반복되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고, 그 분이 드리신 제사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 제사는 멜기세덱을 승계하는 영원한 제사장이 흠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인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에 대한 그 어떤 중보보다도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비교할 바 없는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불안함과 의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이런 대제사장이 있음을 알자. 그리고 그를 의지하자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 이런 중보자가 항상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확고한 맹세로 세워졌기 때문에 전혀 불안해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중보자, 영원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 단 한 번에 자기를 드려 우리를 위해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중보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구원의 완전한 보증이 되어 주시는 중보자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 구원의 확신을 얻기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확고한 영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내가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에 따라 사는 성도의 확고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중보자, 더 나은 언약의 보증자를 통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나 대신 제물이 되시고, 나를 위해 영원히 간구하시기 때문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이 믿음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또 그 믿음을 온전케 해 주시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구원을 생각할 때, 항상 이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닻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리시기 바랍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분께 여러분의 소망을 묶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중보자, 부족함이 없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언제나 이 예수를 붙드시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늘나라 백성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회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