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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01.09. 새벽예배(매일성경)


본문 : 시편 129편


우리의 삶은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을 셋으로 나눕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과거라고 부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부르며,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시간을 현재라고 부릅니다. 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우리 인생의 전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세 가지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의미있고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시간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시간의 영역들을 잘 다룰줄 알아야만, 잘 활용하고 선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그런 시간들로 우리의 인생을 채워갈 수 있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루어져 있지만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우리가 즐거워 하거나 기뻐하는 것, 행복을 느끼거나 불행해 하는 것, 고통을 당하거나 복을 누리는 모든 일들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결코 자기 혼자서 스스로가 어떤 시간이 될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 철저히 과거와 미래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태도로 대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과거는 그냥 과거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 때는 좋았지만 지금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여깁니다. 둘째 과거를 후회와 동경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성공적인 시간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하며 과거만 못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한 시간에 대한 기억은 후회와 자기연민의 이유가 됩니다. 그 과거 때문에 현재가 이렇다는 생각에 묶여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현재를 현재답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미래도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같습니다. 물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니 실패한 미래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연민이나 후회란 있을 수 없지만 나머지 태도는 과거를 대하는 태도나 비슷합니다. 첫째 반응은 똑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에 아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무관심합니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허황된 기대를 가집니다. 근거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뿌리는 거기에 걸맞는 씨앗도 없습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전부입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경우에도 사정은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씨앗이 자신이 바라는 열매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걱정과 두려움을 해결하느라고 전전긍긍하면서 현재라는 시간을 탕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막상 삶이 이루어지는 현재를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의 삶을 든든하고 온전하며 또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의 적절한 사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알고 연습할 때 단지 현재를 살아갈 뿐인 우리들의 삶은 더욱 풍성하고 든든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 과거와 미래의 적절한 사용법을 배워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에는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들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정말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때로는 죽음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갔던 그런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모두들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뚫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고 또 꿋꿋하게 신앙생활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과거를 생각할 때 이런 과거로 부터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어려움과 위기들이 막상 그것을 당할 때는 우리를 죽게 만들 것 같았고 완전히 쓰러져 버리게 만들 것 같았지만 그런 것들 중에서 단 하나도 우리를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쨋든 결국 이긴 것, 견디어 낸 것은 우리들이지 우리들을 못살게 굴었던 상황들과 어려움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편안할 날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이유야 어쨋든 끊임없이 힘센 나라들의 괴롭힘과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나라가 완전히 망해서 거의 모든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끌려간 경험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과거의 어려움과 고통을 넘어서서 ‘지금’은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며 노래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희가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밭 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과거는 죽을만큼 괴로웠습니다. 정말 악인들이 이스라엘의 등짝에 밭고랑을 만들었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될만큼 힘겹고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며,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복주심을 기대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가 바닥을 모르는 골짜기였다면 현재는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산봉우리 위에 서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과거는 언제나 어두웠지만 현재는 환한 빛 가운데 있었고, 과거는 항상 탄식했지만 현재는 항상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악한 나라들은 수없이 이스라엘의 등에다 밭을 갈아댔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 줄을 끊어주셔서 어둡고 무거운 과거로부터 밝고 가벼운 현재를 선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살아있고 또 기도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당했던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이기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줄, 그 고난과 고통의 줄을 끊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과거의 은혜 덕분에 이런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과거의 올바른 사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과거는 동경과 후회, 그리고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의 올바른 사용법은 그 과거를 의로우신 하나님, 그러니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우고 확신하는 교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그 과거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은혜와 구원을 기억하는 신앙을 위한 추억의 장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후회할 일도 많을 것이고, 지금은 망가뜨려 버린 동경할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여기,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노래하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우리 믿음의 기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믿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아야 합니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줌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리라” 과거를 살펴보니 당장 죽을 것같고 괴롭힘을 당했던 것은 자신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었지만 결국 사라지는 것은 악인들과 악한 나라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은 지붕 위의 풀과 같아서 당장은 그 기세가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처럼 싱싱하고 푸르르지만 금새 매말라 버리고 그 누구도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반복되는 과거의 경험 속에서 배운 귀중한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법칙을 과거를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법칙을 미래를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법칙을 오늘 본문에서처럼 미래를 향해 선언하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가 이스라엘의 믿음의 근거였다면 미래는 그 믿음이 바라보는 목표였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미래는 과거를 통해서 얻은 믿음을 확장하고 적용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과거와 미래는 있는데 현재가 없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확신은 있는데 현재가 어떻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바른 사용법만 알면 현재는 저절로 새로워지고 견고해지며 평안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믿음의 근거로 삼고, 미래를 그 믿음을 펼칠 무대로 삼는 법을 배운다면 결코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견고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없이 반복되는 은혜의 경험을 선물로 주십니다. 물론 그 은혜만해도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운 것들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게했고 지금이 믿음의 자리까지 오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진짜로 놀라운 것은 그 은혜들이 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평안한 삶의 비결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지 마시고 나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과거의 은혜를 통해 당신의 미래를 바라보세요.”라고 말입니다. 미래는 그렇게 해서 허황된 기대나 무관심, 근심과 두려움의 대상에서 더 큰 믿음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힘들고 아프고 괴로울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삶 전체가, 신앙이, 그리고 우리의 마음 전체가 뒤흔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과거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통해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과거는 후회와 아쉬움 동경의 대상에서 벗어나 참으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해석된 과거는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망원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은혜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 은혜로 나는 승리할 것이지만 대적들은 사라져 갈 것이라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의 흔들리지 않는 증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계속해서 의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이라는 기나긴 길을 걸어가는 여행자들입니다. 그 여행이 어떤 여행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다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믿음의 눈으로 이미 지나온 길 위에서 베푸셨던 하나님의 반복된 은혜를 묵상해야 하며, 그것을 미래를 내다보는 확신의 망원경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 보고 또 미래를 내다 보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은혜를 노래하며 걸어가는 행복한 여행자들이 될 것입니다. 진짜 평강을 아는 순례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마지막 미래가 현재가 되는 그 날, 하나님께서 믿음의 순례자들에게만 주시는 영원히 영광스러운 칭찬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하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앞으로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하나님 안에서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바른 사용법을 익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변함 없었던 과거의 은혜 속에서 여러분의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 분을 신뢰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런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기를 바라는 삶이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그 기쁨 가운데 함께 기뻐하는 충만하고 견고한 우리 모두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