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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기타

2009.12.27. 1부 예배 - 인간이 되신 하나님



본문 : 요한복음 114-18


오늘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에 신앙을 하나의 생명을 가진 생명체로 가정한다면, 신앙은 것은 과연 어디에 집을 짓고 살아갈까요? 너무 막연하니까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1) 우리의 감정 2) 우리의 의지 3) 우리의 이성 4) 세가지 모두... 답이 무엇일까요? 아마 모두들 4번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 맞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 가지 모두를 자신의 집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아우르는 전인격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답은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혹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서 세 가지 중의 한 가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답은 세가지 모두가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왜 나에게 있는 신앙은 내 삶 전체를 움직여 갈만큼 큰 힘이 없을까? 내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신앙적으로 살지 못할까?하고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신앙을 지, , 의 셋 중의 하나나 혹은 두 가지에만 묶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모두를 합해야 비로소 내 삶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 항상 전체를 움직여 가기에는 힘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정은 단기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가장 큰 힘을 발휘합니다. 감정 속에는 충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것은 변하기가 가장 쉽다는 게 문제입니다. 밤에 편지를 써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 편지 아침에 보면 절대로 못 보냅니다. 밤의 감정과 아침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순간적인 힘은 세지만, 지속력이 가장 약합니다. 그에 비하면 의지는 비교적 지속력도 있고 힘도 있지만, 확고한 근거가 없을 때는 흐지 부지해 지기 쉽습니다. 의지에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내용이 있고 이유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하고 지속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료가 되는 내용과 이유는 감정이나 의지 자체가 아닌 이성적인 부분에 속합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신앙이 처음 생겨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신비이고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도 우리들, 그러니까 지성과 이성과 의지를 지닌 인격체인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보면 이 세 가지는 신앙에 있어서, 특히 좋은 신앙, 견고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항상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파악해야 하고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 부분에 신경을 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는 비어있고, 약해져서 어느 순간엔가는 허무하게 기초를 다 드러내게 됩니다. 특히, 내 삶 전체를 움직여 가기에는 턱없이 힘이 부족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 , 의 이 세 가지 중에서 우리나라 성도들이 특히 취약한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지적인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지식적이기만 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아는 양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이유와 진짜 내용을 아는 질적인 부분은 많이 부족합니다. 명백한 진리는 물론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왜 진리인지를 여러가지 통로를 통해서 생각하고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유를 아는 것은 믿음의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처럼 이미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유를 아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한층 견고하게 해 주고 바르게 하는데 꼭 필요하고 큰 도움이 됩니다. 흔들릴 때 다시 세워주는데 무척 유용합니다.


겨울은 그리스도의 계절입니다. 다른 계절도 그렇지만 겨울, 그것도 12월의 끝자락은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는 좋은 절기입니다. 이 계절에 주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차분해 지고, 어느 정도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절이 바로 겨울, 그리고 연말이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가 거의 항상 그렇지만 오늘도 제 설교는 재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밝혀 드립니다. 그렇지만, 이 계절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서라도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바로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 바로 그 분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요한복음 서문의 결론부분에 속하는 곳입니다. 어느 책이나 그렇지만 서문은 앞으로 그 책이 무엇을 이야기할지 그 방향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의 서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어떤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면 바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됩니다. 이 서문 부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 그러니까 한계투성이이며 언제나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언제든지 죄로 인해 부패할 수 있는 연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이 되셨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그 육신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속에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담아놓으셨는데 우리들, 그러니까 성도들은 바로 그 영광을 보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분 속에서 발견하는 차고 넘치는 은혜와 진리는 그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약속하셨고 또, 베풀어 오셨던 것이 이제 가장 풍성하고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그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감격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결코 고갈되거나 낡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지루해 지거나 진부해 지지도 않습니다. 그 은혜는 항상 더 해지고, 항상 새로워집니다. 새롭게 주시는 은혜가 이전에 주신 은혜 위에 이전보다 더 풍성하고 새롭게 더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고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항상 풍성함을 알고 누릴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분 안에서 그 영광과 은혜, 그리고 진리를 보고 그것을 받아누리지만,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내세울 것 없는 한 사람, 그것도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정신나간 한 사람만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직분을 담당했던 모세도 하나님 보기를 그렇게 원했지만, 그러면 죽게 된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뒷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 분이 이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것입니다. 한 명의 인간이 되셔서, 그 연약한 그릇을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자에게만 보여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그 모든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영광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언제나 풍성하고 새롭게 받아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분의 모든 영광을 보며, 그 영광으로 부터 언제나 새롭게 흘러넘치는 은혜와 진리를 받아누리려면 한 가지 꼭 먼저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바로 그 영접을 통해서 그 분은 숨겨져 있던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와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분을 하나님을 믿고 영접하는 방법은 그 분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으며, 또 그렇게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맨 처음에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가지고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그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분이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인간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라고 짧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한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야만 하셨던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예수를 믿으시다가 이런 질문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야만 하셨는가? 그 방법 이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 없으셨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냥 그 능력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해 주시면 안되었는가? 그저 용서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분명히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죽는 방법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이 방법을 택하셨다면 하나님은 일부러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한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 됩니다. 다른 방법을 놔두고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그런 식으로 희생시키셨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없었습니다. 그게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오늘은 그게 왜 그런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누군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해 줄 말들을 준비해 놓으라고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 우리 조차도 설명할 수 없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우리 믿음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이 자기도 모르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믿음의 내용과 이유를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서 기분 나빠합니다. 자존심 상해 하구요. 그렇지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밖으로 부터 오는 구원,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고,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시면서 정하신 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법이기 이전에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고, 지속되게 하시는 분이신데 죄라는 것은 그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그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의 결과와 형벌은 당연히 죽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으려면 목숨을 그 대가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그렇게 죽어서 용서를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결코 자기 힘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이유이고, 하나님 자신의 일이 될 수 밖에없는 이유입니다.


이제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가 하는 진짜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사실만큼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 그리고 은혜가 되는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갈등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가 만족될 때만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100만원짜리 물건을 10만원에 줄테니 가져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라만 너무 좋아하면서 빚을 내서라도 구입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무 잘 샀다고, 정말 횡재했다고 기뻐하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100만원짜리는 최소한 100만원을 주고 사셔야만 마음이 편하신 분이시고,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렇게 제 값을 주지 않고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고 또 정직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싫다고 떠난 인간이고 그것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구하시고 살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살리려면 인간의 생명만큼의 무게를 가진 생명이 대신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만족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는 인간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은 물건 중에도, 생명체 중에도 전혀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신하는 방법만이 의로우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방법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는 첫번째 결론은 사람만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다른 인간을 대신해 죄의 값으로 목숨을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가 죽는다면 자기 죄 때문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놓으려면 그는 죄 없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듯이 이 세상에, 아담 이후에 태어난 사람 중에는 죄인 아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죄를 세상에 가지고 들어오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버린 아담의 혈통에서는 결코 죄 없는 인간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아담의 혈통이 아닌 다른 혈통을 따라서 태어나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되 죄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여자에게서 태어나면서도 동시에 남자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구원자는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 잉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게 되는 두번째 결론은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은 죄없는 인간이어야 하기에, 그는 자연적인 출생의 방식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잉태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그렇게 성령님으로 잉태되기만 한다면 누구나 다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죄 없는 한 사람이기만 하면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온당한 거래가 아닙니다. 그건 1억원짜리를 10원에 사는 것보다 더 공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생명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수님 이전의 성도들, 그리고 그 분 이후에 그 분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면 그 모든 성도들은 모두 몇 사람입니까? 정말 셀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과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모든 생명을 저울에 단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 지겠습니까? 당연히 많은 사람 쪽입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그저 성령님에 의해서 잉태된 단순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 분은 결코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을 대신하셔야만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이 세상에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고 그 생명들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 분으로 부터 그 무한한 생명으로 부터 각자의 생명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하나님이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다시 저울질을 해 보겠습니다. 한 쪽에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어디로 저울이 기울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 쪽입니다. 사람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어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무게는 비교할 수 조차 없습니다. 무한 앞에서는 유한이 아무리 크고 많더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세번째 결론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생명을 대신하려면 그 모든 생명을 대신할만큼 무게나가는 생명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려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시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셔만 하셨을까요?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면 안될까요? 창세기는 세상과 인간의 처음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 첫 구절인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정말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 구절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와 상관있는 하나님이시게 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절부터 3절을 보면 이 구절을 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창세기도 첫 구절에서 창조를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도 첫 구절에서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그러니까 성자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첫 구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자 하나님이 곧 성부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의 창조는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들을 종합해 보면, 창조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행하신 성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구원,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죄 때문에 죽은 생명을 살게하는 것이니 새로운 창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 또한 첫번 창조 때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하실 수 밖에 없으셨고,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원래 무언가를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항상 그 일을 이루시는 일을 감당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그 두 분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였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이 아닌,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실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 대신할 수 밖에 없고, 그것도 죄없는 사람의 생명, 모든 인류 전체의 생명보다 무거운 생명이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밖에 없었으며,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일이었기에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로 인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것도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는 것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셔야만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처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죄값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만 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완전한 무능함...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하나님은 충분히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을 대신해서 생명을 내어주시면 됩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에게는 우리들을 구원해야할 아무런 의무도, 필연적인 이유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기억해고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도 충분하시고 방법도 아셨지만, 우리를 반드시 구원할 이유도, 의무도 없으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그 분의 선하신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그 분이 꼭 하셔야 했기 때문에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본문은 예수님을 일컬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독생했다는 말은 원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말리시면서 "네 아들 네 독자"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와 꼭 같은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인 이삭을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준비하신 어린 양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양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셨지만,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고, 그래서 그만큼 귀한 그 아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포기하셨다면 결코 그러실 필요가 없었지만, 구원하려고 하셨기에 독생자를 인간으로 이 땅 위에 보내시고, 그 아들의 무한한 생명, 그래서 결코 죽음에 처해질 수 없었던 한없이 귀하고 무거운 성자 하나님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시는 일조차 서슴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사랑이, 그 분의 성육신의 은혜가 그토록 크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고,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흙덩어리로 만든 자신의 피조물과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사랑에 빠지신 바보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기로 결정하였기에 끝까지 그 사랑의 언약을 붙드셨던 어리석을 만큼 우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직접 인간이 되시고, 그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그 언약을 이루신 우리가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크기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사랑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틀 전에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철지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그 날의 상기된 감정들은 이미 빛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꼭 남아 있어야 할 것, 영원히 남겨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그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만큼은 우리 안에 언제나 남아 있어야 합니다. 꼭 그러실 이유도, 의무도 없었지만,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만큼은 사라져셔는 안됩니다.


오늘은 사람이 되신 성자 하나님, 그 분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고, 그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이유 있는 은혜 위에 여러분의 신앙이 든든히 세워져 가시길 축원합니다. 또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성육신의 은혜와 감격이 항상 넘쳐 흐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렇게 고백했던 것 처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감격하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외치며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