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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9. 번제와 소제의 규례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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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레위기 6장 8-23절



서론 : 성도는 둘 사이에 끼인 존재다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성도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둘 사이에 끼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의인이면서 또한 죄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결과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 됩니다. 신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실제의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매일 매일을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런 상태는 “죄인인 의인”이라든가 혹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조금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현재의 삶과 영생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덧입혀 주신 의로 영생을 얻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한계 투성이의 몸을 입고서 땅 위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표현대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장받았고 또 그 영광을 바라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영광스러운 삶이 아닌, 오히려 그 영광 때문에 고난이 따를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레위기 안에서도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레위기는 크게 보아서 둘로 나뉘어 집니다. 바로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규정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꾸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부분과 사람들에 대한 부분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 이 두 가지는 아주 칼로 자른 듯이 나누어 집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는 것과 대립될 때가 그런 때입니다. 예를 든다면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친척의 결혼식에 참여할 것인가, 동료직원들과 섞이고 어울리기 위해서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섞이는 일을 포기할 것인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양심을 어길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정직하게 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만나면 하나님과 사람은 첨예하게 나뉘어 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들이 아니라면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부분과 사람을 향한 부분은 두 부분은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위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곧 사람을 위하는 일이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는 일이어서 둘이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 두 가지를 “거룩함”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둘은 결국은 둘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가지는 갈등과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따로 분리해 내시고 특별대우를 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는 내용이 바로 생활과 관련된 율법의 조항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조항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사항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들이 주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도인 자신에게는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 어울리며, 그런 삶이 온전한 삶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주어진 법칙에 순종하려는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런 삶을 완전하게 사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며,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성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거룩을 지키지도 못하고, 또 그 거룩을 더 증진시키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일 때가 많고, 또 뼈를 깍는 노력으로도 모든 율법을 모두 지킬 수는 없다는 현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보려고 애쓰고 또 애쓰지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기 자신만 보게 됩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를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며,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거룩함과 온전함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성도들의 현실 사이의 갭을 매꿔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 쪽에 제공해 주신, 회복의 임시방편인 것입니다. 거룩해야만 한다는 명령과 당위성 그리고, 결코 완전히 그럴 수는 없다는 현실 사이에 끼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 앞에 있게 하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거룩한 삶으로 되돌아 오게 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였던 것입니다. 


레위기에서의 본문의 위치

레위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1장에서 7장, 제사장에 대해서 기록하는 8-10장, 음식법과 정결규례에 대해서 기록하는 11장부터 15장, 대속죄일 의식에 대해서 기록하는 16장 그리고, 성결의 삶을 위한 실제적인 권면을 담고 있는 17장에서 마지막 27장까지로 나뉘어 집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제일 앞부분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번제와 소제의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레위기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주신 규례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는 우리가 흔히 성막이라고 부르는 것을 회막이라고, 만남의 텐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회복이며 만남의 지속이고 만남의 발전입니다. 결국 모세가 만남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받은 여러가지 규례들은 그러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필요하고, 그 만남을 지속하고 또 더 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규례들 안에는 제사의 규례도 있고, 정결에 대한 규례도 있으며 실제적인 삶을 위한 규례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사규례의 의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분을 만날 수도, 그 분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하나님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온전함을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움직여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아무리 온전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거룩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실수는 조금씩 조금씩 더 쌓여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려면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죄와 온전치 못함을 치워주시고 처리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시고 임시로 죄를 가려주시고, 또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그 만남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 만남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비록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과 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에 제사규례만 있지 않고, 삶을 위한 구체적인 규례들도 있었으며, 특히 정결함과 관계된 여러가지 규정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원리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신분에 걸맞는 거룩한 삶을 요구받았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된 우리에게 그러한 우리에게 걸맞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 요구는 실제로 구약백성들을 향한 요구보다도 훨씬 더 강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떠나지 않으시고 상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심으로써 도우시지만 우리가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그 강력한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에 대한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시간적으로 본다면, 제사와 삶 둘 중에서는 삶이 제사보다 앞서야 합니다. 제사란 결국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고 부족해져서 생겨난 온전치 못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위기를 보면 실제적인 삶을 위한 규례들보다도 제사에 대한 규례와 그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들에 대한 규례가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레위기의 구조는 어찌보면 차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레위기의 구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가르쳐 줍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원리입니다. 바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의 은혜의 우선성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결단도 아니고 우리의 거룩한 삶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해도 절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의 백성됨을 누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은 결코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같은 죄인들이었던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후에 그렇게 그들을 받아주신 후에,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로 주신 것이 바로 거룩한 삶에 대한 규례들이었습니다. 로마서도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가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께 받아들여질만한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그 분 앞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일 때, 하나님께 대해서 죽은 자이며, 너무 연약해서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때 그렇게 전혀 가망이 없었을 때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 있었고, 그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고 또, 그 분 앞에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 사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받으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기에 우리가 성도로 살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거룩한 삶이 있다고 하여고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덕분이지 우리의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입니다. 그 분의 덮어주시고 용서하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그 분 앞에 설 수 없을 것이고, 그 분의 붙들어 주시고 또 참아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그 분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속에 거룩한 소원을 두고 이루어 가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한 그 분과의 더 깊고 풍성한 교제 속으로 들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을 요구하시기 전에 제사를 요구하심으로써 그들이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의 눈 앞에도 언제나 십자가를 놓아두심으로써 우리에게 진정으로, 그리고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때의 제사가 지금의 예배가 되었다면 예배의 의미도 제사의 의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제물로 다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에는 놀랍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섬김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풍성한 은혜의 식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부르시는 잔치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그 분이 차려놓은 갖가지 은혜를 부족함이 없이 누리고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의지해서, 그 은혜로 회복되어서 다시 거룩한 삶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의 결단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애씀도 하나님의 그러한 은혜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없는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의 자리로 부르시고,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면서 바로 그 사실을 알려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무엇을 하던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의 규례보다는 항상 제사의 규례가 앞섭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과 섬김보다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더 앞서고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넉넉히 만족시키고 힘을 줄 때라야 우리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도, 그러한 삶을 통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도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번제와 소제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번제에 대한 부분이고 두번째 부분은 소제에 대한 부분이고 마지막 세번째 부분은 아론과 그 자손을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날에 드려질 특별한 소제에 대한 부분입니다. 번제 다음에 소제가 오는 이유는 그것이 제사를 지내는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소제는 독립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번제 다음에 와서 번제를 완성하게 되는 그런 모양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번째 부분은 제사장 임명시의 소제는 일반적인 소제와 달라야 했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신 부분입니다. 번제는 속죄제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a만을 구하는 예식이었습니다. 다시 용서해 주시고, 다시 받아들여 주시고, 다시 백성으로 대해주시기를 바라며 드리는 화목제였습니다. 그 제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바로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사를 통해 제사자는 다시 용서받고, 다시 용납되고, 다시 회복되는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소제는 그렇게 번제가 끝나고 나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예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린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넘치는 은혜에 대한 일종의 기쁜 답례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그렇다고 소제가 그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고서 그저 기쁨으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제 또한 하나님께서 명하셨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죄와 회복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누림의 표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제가 드려져야만 비로소 죄용서를 위한 번제는 끝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 값진 것을 지키는 데는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도 있고, 부서질수도 있습니다. 상할 수도 있고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게 넘치도록 부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실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너무 값진 것이어서, 한 없이 값진 것이어서 결코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특히 사죄의 은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은혜는 인간 쪽에서 보면 절대로 불가능한 은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은혜를 전적인 은혜로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은혜의 은혜됨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이 은혜를 은혜로 알고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데서 끝내시지 않고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은 사람 편에서의 기쁘고 즐거운 헌신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그 은혜를 갚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빚을 갚는 채무상환이 아니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정말 갚을 길 없고 되돌려드릴 방법이 없기에 그거 감사를 표시하는 것, 그렇게 작은 것을 드림으로써 그 은혜를 기뻐하고 그 은혜가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소제였습니다. 

은혜는 항상 은혜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혜는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그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부작용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번제, 속죄제의 은혜를 은혜로 남아있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번제를 통해서 사죄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그 은혜에 대한 기쁜 반응으로써 소제를 드렸고, 그렇게 하면서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얼마나 기쁜 것인지,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인 동시에 사람에게는 더욱 유익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지키고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누리며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게 하는 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 뒤에는 반드시 소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번제 뒤에 반드시 소제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은혜를 받을 때, 그 은혜를 통해 유익을 누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은혜 자체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 은혜가 주는 유익만 생각할 뿐,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내가 그 은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도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신지를 잊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번제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제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우리의 만족이 되시고, 의지가 되시며 또 모든 것이 되심으로써, 우리들로 부터 그런 마음의 표현을 받으시고 또 우리가 더욱 그 분만을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은혜는 참된 은혜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은혜로 사는 삶

우리 모두는 둘 사이에 끼인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 시간과 영원, 그리고 거룩한 삶에 대한 명령과 그렇지 못한 삶이라는 현실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 갭을 매꾸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이에서 경험하는 괴리와 마음의 혼란을 이겨내게 하며,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받아주시며, 다시 우리에게 성도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시는 은혜를 공급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또 버림받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남아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그 은혜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소제’입니다. 우리는 소제를 통해 우리에게는 그 은혜가 꼭 필요하며, 그 은혜를 받았고, 그 사실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만족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그 은혜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는 마르지 않고 우리의 영혼과 삶을 항상 넉넉하게 하고 능력있게 할 것이며 또 우리의 삶을 거룩으로 이끌어가는 안내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항상 은혜를 은혜되게 하십시오. 갚으려고 하지 말고 누리시고 감사하면서 더욱 은혜에 의지하십시오. 거룩한 삶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명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이기에 당연한 삶으로 요구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온전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