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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37.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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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 19장 1-18절



서론 : 영적인 탈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무슨 일을 당해도 내 믿음만큼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 견고해 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선한 것이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그런 상태가 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저 돌덩어리나 혹은 쇠덩어리라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과는 다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상태도 굴곡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같이 살아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정반대로 영적인 탈진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이유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영적인 탈진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영적인 탈진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이 다른 죄로 연결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일어나게 되는가를 이해하고 예뱅하는 것과 또 영적인 탈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참 많은 유익을 줍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탈진하게 되는 이유와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족하오니 죽여주소서

아시다 시피 엘리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가 3년 반동안 비를 멈췄다가 다시 내리게 했던 일과 소위 갈멜산의 전투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엘리야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두 개의 봉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일이기도 했지만 그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던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말처럼 이 두 개의 높은 봉우리 뒤에는 한 없이 깊게 느껴지는 가장 깊은 골짜기가 놓여져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주는 엘리야의 영적인 탈진에 관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왜 영적인 탈진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는 영적인 탈진을 예방하고 또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그가 그렇게 심각한 영적인 탈진에 빠지게 되었던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을 벌여서 그야 말로 대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처형합니다. 그리고는 아합 왕에게 내 말대로 그 동안은 비가 오지 않았지만 곧 비가 다시 올 것이니 마차가 진창에 빠지기 전에 빨리 마차를 타고 돌아가라고 전하고는 달려가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마차보다 빨리 달려 이스르엘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의 모든 선지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멈췄던 비를 다시 내리게 한 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려가는 엘리야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당하게 앞을 향해 있는 그의 얼굴과 시선, 그 미끄러지듯 불가사의한 속력으로 날듯이 질주하는 엘리야의 모습을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뿌듯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이제 엘리야에게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지켜보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왕비 이세벨의 서슬퍼런 협박이었습니다. “내일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안그러면 내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정말 코메디같은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거기까지 정말 나는 듯이 뛰어온 엘리야가 갑자기 꼬리내린 강아지처럼 광야로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키보다도 더 작고 이파리도 듬성 듬성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충분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는 거기 드러누워서 그냥 잠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천하의 엘리야가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약하고 믿음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엘리야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연약함에 대해서 전혀 나무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아무 말 없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어루만지시며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위로하고 치료해 주시며, 육체적인 필요도 충분하게 채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엘리야가 이런 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물론 그의 약함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셨고, 그것이 그를 많이 힘들게 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엘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더 적당한 기질과 성품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제가 함께 일했던 교역자들과 친구들 중에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사람들도 많고, 그래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한 때 그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왜 훨씬 더 강하고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은 나 같은 놈을 부르셔서 하나님도 고생하시고 나도 고생시키시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한 소리였습니다. 어쨋든 하나님은 저같은 사람도 부르셨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속아서 그러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지만 부르셨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럭 저럭 사용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참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데도,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잘 못할 사람인 것같은데도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훤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연약함을 커버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그것을 그 사람의 짐으로 그대로 남겨놓지 않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짐으로 져 주시겠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며 거기에 우리의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이 문제가 되어도 하나님께도 그것이 똑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실 뿐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연약함을 통해서 가장 큰 영광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연약함은 오히려 그 분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진짜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네가 이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쓰러져서 무기력하게 잠들어 있는 엘리야를 두 번 만져 주시고 또 먹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면 엘리야가 자신에게 맡겨진 길을 다 달려가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셔서 영적으로 위로와 힘을 주시고 육신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영적인 탈진에 빠졌던 것은 그가 그 사실을 잊고 너무 무리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했습니다. 항상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며 그것에 의지해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공급받는 영적인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고 그것이 그를 영적으로 탈진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내가 열심이 특심하오나... 나만 남았는데...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힘으로 엘리야는 40일 동안 걸어서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급해 주신 힘은 그렇게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이번에는 동굴에 들어가 칩거합니다. 그러나, 동굴에 숨는다고 못 찾으실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그 동굴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그 누구보다도 큽니다.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큰 열심을 내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데 그들이 내 생명마저 빼앗으려 합니다.” 하나님과 엘리야의 대화는 정확하게 같은 말로 두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데, 우리는 엘리야의 대답 속에서 그가 영적인 탈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엘리야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의 열심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영적인 탈진의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 물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큰 열심을 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열심을 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열심도 훌륭한 열심입니다. 아무도 나설 사람도 없고 나서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꼭 해야만 하는 일에 헌신하고 애쓰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헌신과 이런 열심은 난관에 부딛히고 고갈되기가 쉽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열심은 자기가 만들어낸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말 그대로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영광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솓아나는 열심이어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런 열심만이 진실로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고 영적인 탈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감이나 상황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오는 열심은 어느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울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그 열심의 진짜 크기보다 부풀려지게 마련입니다. 엘리야의 열심은 어떤 면에서 그런 열심이었습니다. 아무도 없으니 나라도 나서야 한다는 식의 열심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열심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부분을 가진, 자신을 소진시키는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탈진의 두번째 이유는 자기 혼자 남았다고, 이제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엘리야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성도에게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생각보다 무서운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얼마나 쉽게 성도들을 자포자기하게 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소명대로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옆에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만 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순간 손에 힘이 빠집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런 생각이 찾아옵니다.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가 이런다고 바뀌는게 뭐가 있나? 그래봐야 나만 손해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그가 그 거룩한 길을 포기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는 전혀 거룩하게 살아보려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보다도 그런 삶에 대해 더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내내 그를 괴롭힌 것도 이런 생각이었고, 그래서 결국 영적인 탈진에 이르게 하고 자포자기하게 한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나 혼자다, 나 혼자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그를 그런 어려움으로 몰아 넣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탈진의 또 한가지 이유 : 결과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여기까지가 본문에 드러나 있는 엘리야가 탈진한 이유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영적인 탈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더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느꼈던 자기 자신과 자기 사역의 결과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850명이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들을 모두 처리한 후, 말 한마디로 비를 내리고 하고 나서 이스르엘로 바람처럼 달려오는 그의 마음 속에 어떤 기대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대대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세벨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맞닥뜨린 것은 더 악랄해지고 지독해진 이세벨의 서슬퍼런 협박이었습니다. 그 동안 정말 목숨걸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정작 뚜껑을 열고보니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허탈감에 빠진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할 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여기서 그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그런 결과를 자기 사역의 실패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무능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여기까지로 충분하니 더 큰 일을 맡기시려면 이제 더 능력있는, 자기 선조들같은 사람을 쓰시라고 했던 것이구요. 결과가 없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아무런 결과도 만들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고, 그것이 그를 허탈과 영적인 탈진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탈진에 대한 해답들

문제를 찾았으니 이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연약함을 해결하려면, 그 연약함 때문에 영적인 탈진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충분히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큰 영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언제든 탈진할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들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에너지는 날마다 새롭게 공급되어져야 합니다. 공급받지 않고 일하려고 하다가는 언제 에너지가 바닥날지 모르고, 우리가 영적인 탈진에 빠지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못지 않게 어떻게 계속해서 공급받을 것인가 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이 되어야 우리는 영적인 탈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열심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열심은 상황에 대한 분노나 혹은 단순한 책임감으로부터도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계속 거기에 머물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그 열심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 분의 영광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밝고 건강한 열심으로 바뀌어 제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대한 사랑이 회복되도록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열심을 달라고, 열심을 유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영광을 진실로 귀중히 여기게 해 달라고 더 많이 기도하며 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분노나 책임감이 있던 자리에 사랑이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열심이 오래갈 수 있습니다. 쉽게 고갈되지 않는 풍성하고 생명이 긴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나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저 생각만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인데 혼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느낌이 아니라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 하나만 남았습니다.”라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길 것이다. 이 사람들은 지금까지 바알에게 무릎꿇은 적도 없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춘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추측이고 그의 축 처진 감정의 속삭임을 뿐 결코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안에는 엘리야처럼 영적인 지조를 지키며 목숨을 걸고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칠천 명이나 더 있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진짜 혼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에는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사람들, 그 칠천 명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거룩과 정직을 소망하시는 회원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구석 구석에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며 힘겹지만 여전히 힘차게 걸어가고 있는 그 칠 천 명의 우렁찬 발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더 힘을 내십시오. 지금은 걸음을 멈추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여러분의 발자국 소리를 더해 그 소리를 더 크게 울려퍼지게  해야할 때입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길이라고 여겨진다면 결코 그 길 가기를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만두고 포기한다면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길에서 나 혼자만 낙오하게 될 것입니다.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사탄의 거짓된 속삭임에 속지 마십시오. 칠천 명의 땀흘리는 모습을 보는 눈을 뜨시고, 그들의 발소리를 듣는 귀를 여셔서 그런 거짓된 생각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을, 그 외롭지 않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탈진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과중심의 사고방식, 업적중심의 평가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보이는 것이 보여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그런 생각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영적인 탈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해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술만큼 엄청난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대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땅이 쩍쩍 갈라졌습니다. 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산은 땅 속으로 꺼져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습니다. 세번째는 큰 불이 났습니다. 정말 엄청난 화염이었지만 거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임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엘리야의 귀에 거의 들릴락 말락한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그제서야 엘리야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 작은 소리, 겨우 고막을 울리는 미세한 진동같은 그 소리가 그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자기 얼굴을 가리고 동굴 앞으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 미세한 공기의 진동 속에 그를 떨게하고 두려워하게 할만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할 때, 거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그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돌아오고 이세벨은 굴복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대하던 열매는 없었고 눈에 보이는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알아야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런 바람이나 지진, 그리고 큰 불처럼 엄청난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당신의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어 가심으로써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 진짜 강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바로 그 약속의 말씀 속에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합니다만 실은 겉으로 보기에 그 말씀처럼 힘없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을 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 성경에 귀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 그 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과 세상의 역사를 움직여 가십니다. 아무리 거센 사탄의 방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세하고 나지막한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꺽이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을 바꾸라고 부르신 적이 없으십니다. 소명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결과를 위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정을 향한 부르심이 바로 소명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드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며,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성도답게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저 그 소리를 다시 전하는 목소리의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과와 열매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매는 그냥 그 분께 모두 맡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저 가을을 기다리며 할 일을 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탈진을 막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결론 :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라

여러분에게 영적인 무기력과 탈진이 찾아오거든 오늘 본문을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지금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안에서 답을 찾아 보십시오. 분명히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엘리야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힘을 주시며 끝까지 그의 길을 가게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며 필요를 채워주시고 기다리시고 그렇게 다시 세워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그 은혜에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절한 회복의 은혜를 주시며, 우리를 찾아오는 영적인 굴곡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달려갈 길을 다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