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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3. 모든 성경은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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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 후서 3장 10-17절



서론 : 기독교는 성경의 종교이다. 

우리가 믿는 장로교는 개신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개신교는 자신을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개혁교회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개혁교회가 기존 교회의 신학적인 부패를 개혁함으로써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개혁교회라는 명칭 안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해 있는 개혁교회들은 원래 “항상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교회가 항상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들여와서 환골탈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개혁교회의 개혁은 사실 개혁이 아니라 돌아감입니다. 성경의 교리, 성경이 말하는 교회, 성경이 말하는 성도, 성경이 말하는 신앙...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기준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기준들에 맞추어 가고, 그 동안 그 기준에서 멀어진 모습들이 있으면 다시 고치면서 항상 그 온전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진짜 교회의 모습, 진짜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얘 자신의 이름을 개혁교회라고 부르면서 그 사실을 스스로 거듭 확인했던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심지어는 성경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관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성경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생각, 성경에 대한 믿음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가 증거하는 것에 의해서 항상 바로잡아져야 하고 그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에 대한 생각도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을 우리 믿음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실용적인 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대로 믿어지고 또 사용되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도 바른 신앙, 온전한 신앙,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이 될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이 제대로 나타나는 능력있는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메시지 1 :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번째 편지를 쓸 당시 에베소에는 이단들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단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타락한 요구에 영합해서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복음과 구분이 잘 안가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지만 껍데기만 흉내낸 거짓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아직 어리고 약한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었고, 진정한 복음에 지대한 방해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처방은 우선은 “그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고, 두번째 처방은 “이미 배운 것들을 견고하게 붙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단과 싸우다 보면 이전투구 하게 되기 쉽고, 그러면 오히려 싸움 때문에 복음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디모데가 “이미 배우고 확신한 일”을  더욱 견고하게 붙잡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진짜라는 확신이 있어도, 사람들이 그 길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따라오지 않으며 반대로 거짓된 것에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가 나고 또 좌절하기 쉽습니다. 이 때 가장 취하기 쉬운 해결방법이 그 거짓된 것과 직접 싸워서 진짜의 진짜됨을 증명해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싸움으로는 진짜의 진짜됨을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은 이미 진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진짜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둘 다 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 싸움을 자기들 끼리의 싸움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오히려 잘못하면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일종의 염증을 느끼게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정말 극악한 이단들이 참 많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비교적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이단들이 그것도 아주 심하게 설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던 교인들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교단마다 이런 이단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절치부심하며 때로는 그들과 정면대결을 벌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들은 꼭 필요한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모습을 살펴보면서 거꾸로 현재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교회는 쇄퇴하는데 이단은 세를 얻어갈까?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그리로 넘어갈까?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제가 얻은 잠정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지 못하고, 성도가 참으로 성도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들이 가짜와 구별되는 참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가짜들이 그렇게 득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이단은 있어왔고 때로는 무척 큰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 이단이 아닌 정통이 그 때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짜라는 가짜와 구별되는 진짜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구나 보는 눈은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속아도 끝까지 속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단설에 혹할 수 있어도 그게 가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진짜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결국에는 그 이단을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빛을 찾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참빛을 향해 나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개인이, 심지어는 교회 전체가 이단의 침입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 믿는 바를 삶으로 증명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니 빛을 가장한 어둠이 더 큰 빛으로 행세해도 그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단은 항상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단과 싸우기도 해야하지만 사실 우리만 바로 서 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이 제자됨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확대해 적용해 보면 진리에 헌신해서 살아가는 참된 모습은 진짜가 진짜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되며, 그래서 사람들을 진짜로 향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진짜라고 주장해도 우리가 그것을 진짜로 증명해 내지 못하면 우리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진리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서 그 진리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진리를 진리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적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메시지 2 : 그러려면 성경진리의 진짜 가치를 알아야 한다. 

진리에 진정으로 헌신하여 그 진리를 진리로 드러내는 삶을 오늘 본문에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순간적일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원래 거하라는 명령은 “계속해서 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단 한 번 순종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번, 두 번 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아예 사람이 집을 짓고 살듯이 그 진리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무척 어려움 일임에 분명합니다. 아니 우리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얻기 까지는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에 거하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삶의 목적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어떤 핍박을 당한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디모데는 바울의 삶의 살아있는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바울이 어떤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어 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댓가를 치르며 살아왔고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그가 평생 가르친 교훈의 중심이었고, 무엇이 그의 행실과 삶의 목적까지 바꾸어 놓았으며 무엇이 그를 그런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오래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했을까요? 그에게 그런 인격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또 그에게 그런 댓가를 기꺼이 치르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였습니다. 그를 바꾸어 놓은 것도, 그로 하여금 그런 대가를 오히려 기뻐하면서 감당하도록 한 것도 모두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였습니다. 

아무리 가치있는 것이 있어도 진정으로 그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결코 그것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면 성경의 진리가 아무리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그 무엇보다도 값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헌신하고 그것을 위해서 대가를 치르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 신앙이 의무가 되고, 억지춘향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최대의 비극입니다. 물론 신앙에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래 신앙 자체가 인간의 당연한 의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거나 요구하실 때는 그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중요하지도 않은데 무조건 억지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그것을 위해서 충분히 그런 대가와 노력을 기울일만한 하기에, 그렇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충분히 넘어서는 실질적이고 영원한 유익이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결코 억지춘향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왜 힘들고 어려워도 디모데도 그 길을 꼭같이 따라오며 꼭같은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바울이 성경에 대해서 흔들림 없이 확신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그를 흥분하게 하고 그의 전 삶을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일에 쏟아붓게 할만큼 그의 삶 전체를 움직였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지혜를 공급해 주는 하나밖에 없는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아침마다 운동삼아 오르내리던 집 앞 동산이 실은 엄청난 금광이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다음 날도 그 동산을 여느 때처럼 그냥 운동삼아 오르내리면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슨 땡빚을 내서라도 일단 나의 소유로 만들고 보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을 다시 보니 성경이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해 주기에 충분한 지혜를 담고 있는 유일한 책이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그리로 인도해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야 말로 성경이 세상이 무너져도 붙들고 전해야할 보배로운 진리의 보고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며 그것을 전하는 삶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핍박을 각오해야 하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이 점점 더 악해져만 가는 세상에서 그 세상과는 정반대 방향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의 진리가 우리를 믿음을 통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기에 그렇게 사는 삶만이 우리를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이 그런 가치를 지닌 책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성경을 그저 동네 앞산 바라보듯 할 수 있겠습니까? 운동삼아 구경삼아 오르내리면서 거기 잔뜩 묻혀있는 영원한 보화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회원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왜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삶의 원리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옳은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입니다. 성경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해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책,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금맥을 따라가는 힘든 수고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 뭍힌 금이 얼마나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교훈에 헌신하려면, 그 어려운 말씀 속에 즐겁게 거할 수 있으려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지혜와 방법은 우리를 구원의 문턱에도 데려다 줄 수 없지만, 이 책만이 우리를 넉넉한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한 지혜를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진실로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책이 말하는 삶의 원리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할 수 있게 되고, 그 진리와 그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 기쁘게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일으키는 변화

그렇다면 이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 줄까요? 도대체 성경이 우리 삶과 영혼에 어떤 일을 하길래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이르기에 적합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 줄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원래는 하나님의 숨결로 부터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숨결은 생명입니다. 태초에 인간을 살아있는 영이 되게 했던 바로 그 생명이며 혼돈과 공허를 품어 만물이 되게 하셨던 그 성령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영입니다. 마른 뼈가 많은 군대가 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성령님을 말씀과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그 능력과 생명을 고스란히 담아 우리가 지금 읽고 묵상하는 이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과 생명이 숨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이 성경이 성도들에게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바른 교리, 그러니까 신앙과 삶에 대한 바른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비어있는 영혼을 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 책망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엄하게 경고하며 따끔하게 혼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책망은 단순히 부끄럽게 하거나 잘못을 깨닫게 하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책망은 반드시 그 잘못으로부터 돌이켜서 바르게 되도록 합니다. 스스로 그런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성도를 의로움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양육해 갑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또 묵상하기도 합니다. 더러는 그 긴 성경을 손으로 배껴쓰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시면서 그렇게 성경을 가까이 하고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그 이유는 성경만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만이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변화, 우리를 참으로 살게하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빠져있던 우리를 새로운 하늘나라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가르칩니다. 이전에는 잘못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도 몰랐던 그 길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길인지를 알려주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기에 그렇게 배우고 책망받은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꿉니다.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목적을 바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인으로써 성숙해 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또 설교를 들으면서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또 기대해야하는 하나님 말씀의 참된 역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닙니다. 일시적인 위로나 확신을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경의 진리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의 변혁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기적이 우리 삶에 일어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새로운 마음과 생각으로 교훈하며, 책망하며, 그래서 바르게 하고 여러분을 의인으로 양육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우리의 잘 변하지 않는 마음과 완고한 생각, 그리고 의롭지 못한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강력한 능력과 생명이 이 성경 속에 있다고 진실로 믿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또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진리가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것을, 그 속에 성령님의 모든 능력과 충만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능력과 생명이 나를 새롭게 하고 온전케 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잡아지고 새로워지며 또 변해야 한다는 절실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의 진리만이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면서 성경을 대할 때, 비로소 성경은 우리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지 못하고 모든 일을 행하기에 준비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그런 믿음과 나의 참된 변화에 대한 절실한 추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변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너무 만족한 것이며, 너무 행복한 것이며, 너무 평안한 것이며, 너무 든든한 것입니다.  말씀이, 그 진리가 만들어 내는 변화는 참된 생명으로의 변화이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으로츼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사탄이 우리 속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유익과 만족을 방해하려고 우리 속에 심는 거짓입니다. 


결론 : 성경의 값어치로 성경을 대하라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어 냈으며 경건한 자, 말씀을 지키며 소중하게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핍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넉넉한 지혜를 공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만큼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 무엇보다도 가치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그 보배로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의인으로 양육되어져 가는 과정을 밟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풍성한 지혜를 공급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그만한 값어치로 성경을 대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를 온전케 변화시키는 은혜를 부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에는 언제나 믿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말씀은 그 말씀이 약속하는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시키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설명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다시 만들고 온전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그 보배로운 말씀의 무한한 가치를 제대로 아는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 안에 살며, 그 말씀 안에서 만족하며, 그 말씀 안에서 온전해져 가는 그 지극한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에 믿음을 더하며, 그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어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