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35.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있습니다. ,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열왕기상 13장 20-32절


성경이 왜 성경인가? 성경은 피해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에게 성경이 왜 성경이냐고, 왜 하나님의 말씀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성경이 무슨 일이든 도무지 피해가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이 피해가지 않는 책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은 그것이 어떤 일과 어떤 모습이든, 아무리 더럽고 추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든 결코 미화시키거나 생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성경일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들고 읽어보면 금방 우리를 당황케 하고, 이런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거룩한 성경인데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실려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면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들만 기록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내용들도 많고 심지어는 죄인인 우리가 읽어도 거부감마저 드는 표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저 거룩하기만한 책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만 실려있어서 성경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성경인 이유는 이 책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망가져 버린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그리고 그런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감정들, 그리고 약속들... 이런 것들이 충분히 들어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이기 때문에 세상에 단 하나의 신이 주신 단 하나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성경일 수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런 이야기들과 내용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성경의 이런 특징은 우리를 어렵게 하고 괴롭게 하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 그렇지만 그래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더 겸손해 지고 폭넓어지며 깊이를 더해가는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향해 도전해 오시는 하나님의 도전이요,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복이라고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자초지종... 그리고 나의 질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그런 본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모두 읽어보면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도무지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셨는지 알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자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쪽 유다로 향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벧엘에 산당을 건축하고 금송아지들을 만들고 그 산당의 단에서 분향하려고 할 때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단호하게 그 앞에 서서 그 단은 결국 갈라지고 무너지게 될 것이며, 나중에 요시야라는 왕이 나와서 그 단 위에서 그 단에서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을 제물로 삼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올라와서 자기와 먹고 마시자고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왕께서 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거나 이곳에서 떡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고 자신은 그것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하여 유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납니다. 이름없는 나이 많은 선지자였습니다. 그저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로만 기록되어 있는 이 사람은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아 갑니다. 그리고는 나무 그늘에서 지쳐 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자신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너만 선지자냐 나도 선지자다.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당신을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음식을 먹게 하라고 하셨다”고 말하며 그를 속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그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 그를 따라 나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늙은 선지자의 집에 도착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를 많이 의아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한 가지 어겼다고 해서, 그것도 십계명을 어기거나 하나님을 대적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길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자가 그 하나님의 사람을 죽였을 뿐 그의 시체를 먹지도 않았고 나귀를 죽이지도 않았다고 증언함으로써 이것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자의 본능과는 전혀 맞지 않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몰라도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기는 더 심각한 하나님의 금지명령이 얼마나 많고 알고도 저지르는 명백한 죄악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그렇게 수없이 봐 주시면서 왜 저 사람, 저 하나님의 사람은 저렇게 하셨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도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면밀하게 본문을 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서들을 성경 전체의 원리라는 더 큰 틀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서와 교훈들

먼저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한 호칭입니다. 성경이 아무에게나 그 호칭을 붙여주지 않습니다. 비록 이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점에 이 사람의 영적인 실패가 더욱 더 크고 무거운 실패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훨씬 더 커다란 흠집을 내게 마련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뜻을 위해서 특별하게 부르고 세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더럽히게 됩니다. 그는 유다에서 거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는 단 한마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전하며 예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입으로 왕이 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해도 자신은 왕과 식사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성경이 그저 “벧엘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람과 그것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사칭하고 하나님의 천사를 들먹이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속아서 돌아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여로보암 왕이  보고 또 벧엘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믿음 없는 사람, 되는대로 살아가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유다에서 부터 온 선지자가 자기가 지기 입으로 말한 하나님의 명령을 금방 뒤집는 것을 본다면 이것을 본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전보다 더 우습게 여기게 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꼭 같은 잘못이라고 해서 항상 무게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거짓말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을 때는 그저 자기 양심을 어긴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 성도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지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무시당해도 좋은 분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들은 그런 의미에서 더 크고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일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 자신의 불명예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불명예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다는 사람들이 존중하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중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조차 하나님의 명령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가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보다 불분명한 사람의 말을 더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었습니다. 벧엘에서는 식사도 하지 말고 또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선지자를 사칭하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는 이야기였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누구의 이야기를 우선에 두어야 할까요?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벧엘의 늙은 선지자입니까? 물론 하나님까지 거론하면서 하는 이야기이니 쉽게 무시하거나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그것과 다른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여전히 따라야 할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지 그 선지자의 말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전의 명령을 취소하시려면 당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겠습니까? 당장 거절하기 어려웠다면 잠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라도 해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렇게 상식적이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절차조차 밟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을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니까 그저 그대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유용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의 경우에서처럼 정반대가 되는 두 가지가 있다면 어느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울까요? 둘 중에 더 명확한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것보다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짜이기가 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명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원리와 위배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조금 깊은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은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거거나 우리들을 죄로 몰아넣는 명령은 결코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꿈을 꾸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확실하게 여겨지더라도 성경적인 가르침과 반대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보다 앞 설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해 주는 데는 성경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두번째 원리는 대개의 경우, 내게 당장의 유익을 주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유다로 부터 아주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물도 먹지 말고, 음식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얼마나 지쳐 있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며 내가 너를 데려가서 쉬게하고 먹여야 한다고 하는 선지자가 나타났다면 그런 호의를 누가 거절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는 속임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개의 속임수는 이렇게 호의를 가장하고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절실히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을 통해 찾아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속을 리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나를 헤치고 나를 해옵게 하는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 속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탄의 계략에 속지 않으려면 적어도 겉모습만 가지고 상황과 사람을 판단하는 수준은 넘어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분별력을 갖추기 위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기심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장 내게 유익한 것, 내게 편한 것,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것에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살짝 덧입히면 우리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것을 선택하고 판단할 때는 내 눈에 덧씌워신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랜즈를 벗겨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가장 유익하고, 나의 필요를 가장 잘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일이 이 때로는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영적인 실패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그 일에 실패했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서는 32절의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들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라는 그 늙은 선지자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늙은 선지자는 아마도 하나님의 사람의 진실성을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다에서 그것도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 와서 그렇게 말하니 비록 자신도 온전치 못한 선지자였지만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하고자 거짓을 꾸며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그 하나님의 사람의 비참한 최후,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본 본 늙은 선지자의 결론은 그 하나님의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그래서 그의 말은 모두 다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과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증명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었던 그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백한 뜻보다는 불분명한 사람의 말에 더 무게를 둔 그 사람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하나님의 징벌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의 실패가 더 명확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실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결론 : 성도의 거룩한 짐,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의 무게는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습니다. 우리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가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려면 결국 성도됨을 거부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짐은 무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짐은 거룩한 짐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죄인이었던,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에게 결코 맡겨질 수 없었던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 짐이 무겁지만 우리가 그 짐을 기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여기며 기꺼이 지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질만한 짐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 맡겨진 거룩한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그 짐을 지기 위해서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이 분별력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원리를 붙드는 것이고, 그 원리에 따라 이기심과 욕심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내 앞에 놓여진 것들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입니다. 내 생각, 내 마음보다는 이 두 가지를 앞세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실패가 반복되다 보면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기에 묶어 놓아야 합니다. 나는 실패해도 하나님이 실패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진리에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성도로서의 삶의 무게를 잘 감당해 내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