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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39. 여호와께 노래하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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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0-11-07

본문 : 시편 96편




도입 :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 우선이다

회원 여러분, 만약에 절대로 억지로는 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이 있는데, 그것이 꼭 행해야만 하는 명령으로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억지로 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일들이 명령을 주어져 있다면 어떤 순서를 밟는 것이 지혜롭고 효과적일까요? 별 의미 없어도 그냥 해야할까요? 아니면 어차피 필요없는 거 그냥 포기하고 말아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명령이 주어질 때, 그 명령이 가리키는 행동을 먼저 생각하지만 그럴 때는 행동을 먼저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선 자연스럽게 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실은 이 방법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참 유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과 찬양만큼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또 억지로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의무로 주신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있고, 찬양하고픈 열망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 명령들만큼 따르기 어려운 명령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자꾸 억지로 그 분을 사랑하고 찬양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럴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찬양하라’는 명령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자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건 무언가를 명령하고 요구하는 사람의 말투 같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시편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에게 시인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희열입니다, 기분좋은 흥분이고 벅찬 전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글자 그대로 그가 가진 기쁨 때문에 극도로 흥분되어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명령은 바로 그런 마음과 감정으로 하는 명령이고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우리를 향한 시인의 요구라기 보다는 초청장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가장 즐거운 자리, 가장 행복한 자리, 가장 만족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자리로 나아와 자신과 함께 즐기자는 초청을 담은 초청장 말입니다. 시인은 어쩌면 이게 너무 좋은 것이어서 놓치면 절대로 안되기 때문에 명령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는 그러한 그의 감정과 함께 왜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우리를 그 찬양으로 초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지 그 이유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가지인데요. 함께 살피고 묵상하면서 우리들도 시인과 꼭 같은 흥분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동일한 기쁨에 대한 소망을 주시고 또 기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의 이유 1. 과거의 구원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우리를 그 찬양으로 초대하는 첫번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 때문입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모두에게 외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시인이 가장 먼저 찬양하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시인을 구원해 주었던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 일에 무감하시거나 게으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실패하신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셔서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완전함과 충분함은 시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밖에는 세상에 그렇게 완전한 방법으로, 그렇게 완전한 타이밍에 그렇게 정확하고 넉넉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또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들은 정말 기이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자랑거리였으며, 그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찬양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상태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완전히 죽었고, 그래서 그 분께는 도저히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을 때에 그 분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습니다. 그 분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영생이 주어졌습니다. 영원한 구원 말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와 굴곡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싸울 수 없는 싸움을 대신 싸워주시고,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승리를 얻으셔서 우리에게 값없이 나눠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귀챦아 하신 적이 없고, 또 때에 늦으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조급함이 일을 그르치려고 할 그 때에도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도우셔서 우리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과거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억, 그 구원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이 행하셨던 기이한 행하심에 대한 기억은 그가 언제든 돌아가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 그리고 벅찬 흥분을 회복하게 하는 시인의 “벧엘”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2 :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두번째로 바로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알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4절부터 9절까지는 시인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를 잘 보려줍니다. 특히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영광과 권능을 돌리자고 말하면서 두번이나 똑같은 말을 연이어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무 흥분해서 말을 더듬고 있는 것같지 않습니까?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가지게 되었던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절대로 감정을 부축이는 어떤 사실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지신다든지, 치료하신다든지, 그 분은 나의 가장 섬세한 감정과 필요까지 느끼신다든지, 어느 순간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든지 하는,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사실, 혹은 자신에게 감각적인 위로를 주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흥분해 있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흥분해 있는 이유는 4절과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이것이 그가 그렇게 흥분했던 이유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 하늘을 지으실만큼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 때문이고, 둘째는 그가 그 분에게서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이 두 가지 때문에 그 분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흥분해 있고, 그 분 앞에 떨면서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흥분하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것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찬양의 이유 3 :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시인이 살았던 시대라고 해서 그저 평안하고 좋기만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 그런 때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은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큰 고민과 고통거리였고 믿음을 시험하는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께 가장 기쁘고 흥분된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저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세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열방 중에서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기 만민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전혀 기쁘지 않은 현실, 전혀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온 세상을 흔들려고 하고, 또 그렇게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그 세상의 주인과 왕은 하나님이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더 굳건히 세워가시고 더 온전하게 붙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세상이 결코 기초없이 흔들리다가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이 믿음을 가지고 바라 본 곳은 아주 먼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그는 먼저 믿음의 눈으로 당장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의 시력이 회복되어 시간의 끝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영원한 왕좌에서 마지막 판단을 하실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고 완전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든 얽히고 섥혔던 것들이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선언됩니다. 칼날같이 정확한 의로우심으로 그들을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실수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양심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애썼던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선언됩니다. 성도들에게는 그 분의 신실하신 판단이 내려집니다. 언약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 언약을 완전히 이루십니다. 시인은 믿음으로 그 아름답고 의로운 광경을 보며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고, 모든 만물들까지도 그 기쁨에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편은 어떤가?

그런데, 회원 여러분, 만약 오늘 우리가 이 시편을 쓴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요? 세 가지 중에서 우리를 가장 흥분시킬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혜일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그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고, 또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아마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도 기뻐할 것도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시편의 두번째 주제와 세번째 주제를 시의 주제로 주고 이런 것을 생각하는 너의 감정을 시의 두번째, 세번째 연으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우리의 시는 어떤 모양이 될까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된 신이시고 하늘을 만드신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흥분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특히 시인이 보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는 어떤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또,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현실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 분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나에게 얼마만큼의 기쁨을 준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것에 대해서 몇 줄이나 내 마음을 담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시는 시로 읽어야만 합니다. 시란 그저 읽고 묵상하면서 그 시인의 깨달음과 감정을 함께 공감하면 됩니다. 성경의 시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 뜨거운 시편, 이 즐거운 시편을 이런 식으로 보아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참된 신앙의 정서와 영적인 감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할 수 있으며, 가장 흥분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으며, 그런 것들 앞에서도 무덤덤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앞에 있도다” 시인이 그렇게 흥분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었습니다.그는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구원 속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묵상하다가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다가오는 시간들 속에서 행하실 통치와 심판 속에서도 그 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영광” 그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시를 지어 읊어드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기뻐하고 즐거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그저 무덤덤하고 애매하기만 한 것들이 그에게는 자신을 흥분하게 할만큼 가장 즐겁고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의 유익

오늘날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서 거의 두 가지의 유익만을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과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고 나중에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거의가 거기서 그칠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믿음은 그저 일종의 영원을 보장받기 위해 가입한 보험처럼 취급되어 버립니다. 보험하나 들었다고 흥분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듯이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면서 춤추며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은 이 소망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하고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지만 대부분은 거기까지 이르지 도 못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신앙이 주는 첫번째 유익도 그다지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을 통해 누리는 주된 유익은 아무래도 신앙이 주는 현실적인 유익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유익입니다. 항상 부족한 우리는 현실의 필요를 채움받아야 하며, 문제도 해결받아야 하고 마음도 치료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은혜는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중요합니다. 절대로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많은 분들이 신앙의 유익이라고 하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고, 그게 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험하나 들어놓듯이 예수를 믿고 구원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이런 저런 현실적인 공급과 도움들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복의 전부일까요? 우리는 땅에서 그것만 알고 누리면 그만일까요? 우리는 혹시 무언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복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의 참된 유익 :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아는 것

회원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원래 역할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피조물의 진짜 복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경험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조금 애매하게 느껴지실지 몰라서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며 깨닫게 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한 것도 아니고 또 개인적인 깨달음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실까하여 말씀드려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성품, 그 분의 어떠하심, 그리고 그 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충만하심, 그리고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나 일, 혹은 되어진 일 속에서 이런 것들을 목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의 참된 만족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목격자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충만한 것을 맛보아 아는 장본인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정의를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이것은 말로 설명하고 알아듣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직접 보아야 하고 또 맛보아야 합니다. 그 영광 속에 들어가 보고 느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좋고 보배로운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오늘 왜 그것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론 : 영적인 미각을 회복하자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가장 큰 복과 특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일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알고 또 누리는 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가장 값진 복이며, 가장 즐거운 기쁨이고 가장 큰 만족이기도 합니다. 오늘 시편 96편이 우리에게 무덤덤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우리가 바로 그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맛을 알려면 맛을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우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현실 속에서 받고 누리는 복들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아는 복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좋은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거기에 가장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미각이 회복되고 그 영광을 맛보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과 간구함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진다면 시인이 가졌던 기쁨, 만족, 흥분, 즐거움... 이런 것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어떤 환경, 어떤 일들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크고 즐거운 복들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기도제목들이 있으시겠지만 거기에 모든 일들,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아는 복을 달라는 제목을 하나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도제목이 1번이라고 써넣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그 동안 내 신앙에서 빠져있었던 가장 중요한 감각이 회복되도록 기도하시고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감각을 되살려 주시고, 또 그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시인에게 주셨던 그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흥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찬양은 우리에게도 가장 기쁜 것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