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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46.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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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2장 1-13절



서론 : 한 해를 정리하며

벌써 올해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올 한 해는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올한해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정말 다사다난,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완전히 어울리는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말했듯이 1년이 한 5년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하고 강력했습니다. 올 한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준 한해였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제 등 뒤에 있는 이 말씀을 표어로 해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라” 이 말씀은 2010년 한 해동안의 장년부 표어이기도 했지만, 실은 이 모든 성도들의 평생의 모토가 되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평생은 결국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을 따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한 해를 모두 마친 것이 아니라 인생전체가 걸리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한 해만큼의 거리를 더 달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이 믿음의 경주를 계속 달려가고, 경주를 마치며 또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은 무척 유익하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큽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지금까지 내 경주를 점검해 보시고, 앞으로 다가오는 또 한 해 동안의 믿음의 경주를 위한 지침서로 삼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

언젠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4300킬로미터를 걸어서 완주한 사람에게 기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 냈는데, 걷는 동안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거창하고 철학적인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산을 오르고, 끝없이 펼쳐진 뜨겁고 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것이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거의 포기할 뻔하게 한 것은 바로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저마다 그것이 이 경주를 힘겹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신발 속의 모래 알갱이’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환경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피치 못할 사건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징계와 꾸지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믿음의 경주가 원래부터 포함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표현한 말입니다. 이 경주는 만만한 경주가 아닙니다. 행복하기만한 여정도 아니고 동네 마실나가듯이 어영부영 따라 나선다고 누구나 다 완주할 수 있는 그런 경주도 아닙니다. 이 경주는 언제나 우리가 참고 견디어야 할 어려운 난관들과 감수해야할 불편함과 손해들 그리고 고통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크든 작든 많든 적든 그 모든 것들을 견디어 내고 넘어서야만 골인지점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경주가 이런 경주이기 때문에 이 경주를 끝까지 마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이 경주에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준비 1 : 영적인 외로움을 떨쳐버려야 한다.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달리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영적인 외로움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의로운 길이 그렇지만 믿음의 경주도 의로운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영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 혼자만이 이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살펴본 대로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가지고 있었던 컴플렉스였습니다. 혼자만이 그 길을 가고 있고, 그래서 너무 외로우며, 그렇게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찾아오면 사람은 허무함에 빠지고, 무기력함에 빠지며, 자신만 손해보고 있다는 분노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 길이 옳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감정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라는 생각은 결코 사실에서 나온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니 외로움은 근거없는 외로움이고 그 뒤에 따르는 모든 감정적인 판단들도 모두 근거가 없는 판단이 되고 맙니다. 성도는 그 어느 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일래야 혼자일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1절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혹시 지금 눈에 보이는 그 경주자는 나 혼자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주장 스탠드에는 이미 같은 경주를 마치고 이제는 자신들이 달렸던 그 길을 달려가는 나를 위해서 환호와 박수로 격려해주는 영광스러운 관중들이 있습니다. 그 경주를 다 마쳤을 때,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증인들’이 스탠드 가득히 매우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경주장이 아닌 다른 경주장에서는 나와 꼭같은 코스를 달리는 다른 선수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경주장에서 수많은 경주자들이 그렇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들도 나처럼 구름같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환호와 격려 속에서 그 경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주를 계속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떨쳐 버려야 할 생각은 ‘나 혼자’라는 생각, 그래서 다 소용 없다는 생각입니다.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경주가 아닙니다. 경주가 끝났을 때, 나에게 주어질 성도들의 축하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칭찬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 2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떨쳐 버려야 한다.

두번째로 필요한 것은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선수는 자신이 지금 달리는 경주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달리는 구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주는 몸과 영혼을 가장 가볍게 해야만 끝까지 달려갈 수 있는 그런 경주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경주에 관한 설명입니다. 단거리 경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장거리 경주에는 단 몇 그람의 차이라도 경기력의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마라톤 선수의 신발이 100그람 정도 더 나간다고 한다면 그는 거의 세 시간을 그 무게를 더 짊어지고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평생이 걸리는 경주이기 때문에 작은 차이도 결과의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자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서 자신을 경량화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한 가지 입니다. 성경은 죄는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데 그것을 모두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죄가 만들어내는 것들을 짊어지고서는 결코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언제나 욕심과 욕망을 통로로 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과거에 는 후회와 죄책감을 남겨놓습니다. 미래에는 근심과 걱정을 놓아둡니다. 후회와 죄책감은 뒤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적이고, 근심과 걱정은 우리 앞에 놓인 넘기 힘든 장애물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성도들이 이 두 가지에 묶이고 눌려서 효과적인 믿음의 경주에 힘겨워하고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영혼의 무게를 무겁게 하며 우리가 더 이상 정상적인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정상적인 경주를 계속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기 원한다면 어떻게든 이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니까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준비 3 : 힘의 근원을 놓치지 말라

세번째로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일입니다. 어느 경기든지 페이스가 깨져버리면 더 이상 경기가 불가능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페이스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믿음의 경기에 있어서도 페이스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미리 지쳐 버려 경기를 중간에 포기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페이스를 지키려면 이 경기에 필요한 힘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주는 결코 나의 힘만으로, 내 능력만으로 완주할 수 있는 경주가 아닙니다. 경주를 시작할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믿음의 주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그 믿음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해야 합니다. 결승선에서 나를 격려하시며 또 항상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시는 나의 영원한 코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해야 합니다. 경주자는 경주 자체만을 생각해서도 안되고, 그 경주를 하는 자기 자신만을 보아서도 안됩니다. 또 같은 경주를 하는 다른 이들과 경쟁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대신 그 경주의 모든 것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한 힘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면서 믿음의 페이스를 잃어버리지 않고 경주를 마칠 수 있습니다. 


준비 4 : 이 경주의 과정이 하나님의 징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이 경주의 성격에 대한 완전한 이해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평생을 달려야 하는 최장거리 경주이되 평탄한 경주가 아니라 장애물 경기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달리는 이 경주의 진짜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올바른 길, 의로운 길을 가면 가는 길이 평탄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경주 자체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난관의 계속입니다. 계속해서 크고 작은 신발 속의 모래가 나의 경주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도전해 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생겨날 때, 하나님께 그 의미를 물을 수는 있지만, 왜냐고 이유를 물어서는 안됩니다. 각각의 모래 알갱이가 가지는 의미는 다를 수 있어도 이유는 항상 꼭 같고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첫째로 신발속의 모래 알갱이가 경주자의 경주를 향한 의지의 검증하는 도구가 되듯이, 난관과 고통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를 검증해 줍니다. 우리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서 진짜로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무릅쓰고 그 길을 믿음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 때문에 우리 믿음이 심히 흔들리고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 믿음이 이미 중병에 걸려 있음을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은 바로 그러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거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되는 것은 아무런 과정없이 그냥 어느 순간에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반드시 징계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훈련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굳이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이미 악이, 반칙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바로 거기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거기서 거룩하고 정직하며 순결한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두가 반칙을 사용하는 경기장에서 규칙을 모두 지키며 승리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은 항상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손해를 보고 오해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 과정 자체가 죄와 악과의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과정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징계의 형태로 경험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선을 선택한다면, 그런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해 낸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마지막 준비...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자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기 위해서 필요한 큼지막한 준비는 얼추 다룬 것 같습니다. 그 준비는 네 가지였습니다. 한 번 복습해 볼까요? 첫째로 경기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경주를 먼저 마친 수많은 영광스러운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른 경기장에서 달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둘째로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경기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그 근원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경기가 어떤 경기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경기는 하나님의 징계, 그러니까 힘든 훈련으로 이루어진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마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렇게 했을 때 성도의 영혼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얻는 것 또한 이 경주의 큰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준비 한 가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이 준비가 빠지면 앞의 준비는 모두 소용없어지고 맙니다. 앞의 준비는 중간에 무기력해지고 맙니다. 왜 그런 손해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주를 계속하고 마쳐야만 하는지 그 진짜 이유는 아직 모르는 채로 그 경주를 계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금매달이 없다면 그렇게 많은 선수들이 온 인생을 걸고 노력하겠습니까? 단순히 자신과 경쟁하기 위해서, 경주에 참가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 전체를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하나의 빛나는 메달이 있기에 가능성은 거의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메달이 없다면 그 모든 경기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향방없는 달리기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왜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가장 크고 참된 목적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나의 진짜 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목적을 아는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맡겨졌던 그 믿음의 경주를 완수하게 해 주었던 준비였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수 있으셨던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믿음의 영웅들, 그 허다한 증인들이 그들의 경주를 마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신앙과 그 신앙 때문에 겪게되는 어려움과 감당해야 할 손해들을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어려움과 손해들을 신앙을 ‘위해서’ 부담해야할 ‘비용’이라고, 그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으니 감내해야할 ‘순수 하고 고귀한 희생’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신앙에서 ‘순수한 희생’은 없습니다. ‘순수한 포기’나 혹은 ‘숭고한 내려놓음’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신앙이,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자기 의를 요구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이 아닌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단지 투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더 큰 영광, 더 큰 만족, 무한한 기쁨을 위한 투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2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해 놓고 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그 엄청난 치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내실 수 있으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그 분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저주를 견디어 내게 했습니까? 단순히 그 분이 가지고 계신 희생정신이었습니까? 인내심이었을까요? 우리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까? 물론 이런 모든 것들도 중요한 이유가 되기는 했겠지만, 히브리서는 그 직접적이고 가장 큰 이유를 그 분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는 그 분이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영원한 즐거움 보다 크고 확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바라는 것도 없었고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이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으로 인해서 느끼는 만족이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넘어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경주를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고, 또 오늘 메시지 전체를 아우를만한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 놓았습니다. 이제 계속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떠나라고 해놓고 ‘그 방법은 네가 찾아라’라고 하는 무책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죄가 주는 만족을 대신할만한 것이나 그보다 좋은 것은 주지 않으면서 그냥 죄를 떠나라고, 그 만족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죄를 떠나라고 할 때는 이미 성경 속에 그 방법이 있고, 또 죄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가장 좋은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죄가 주는 쾌락과 허무한 만족대신에 약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앞에 있는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죄를 떠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 그러니까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이었고 수많은 성도들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그 믿음으로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 믿음의 능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다 빼앗겨도, 협박을 당하고, 굶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어도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 모든 손해와 고통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믿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약속, 하늘의 그 풍성하고 다함없는 기쁨에 대한 약속을 단순히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느끼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주는 만족이 죄를 벗어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믿음을 완전히 단 한번의 곁눈질이나 실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죄와 싸우고 그 죄를 떠나는 일은 불가능하기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 앞에 있는 즐거움, 약속된 기쁨은 더 선명해 질 것입니다. 더 무겁고 소중해질 것입니다. 결코 죄가 약속하는 만족과 바꾸려 들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은 이 세상 전체가 주는 기쁨보다도 크고, 심지어는 그것이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죄가 너무 강해서 우리가 죄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약속된 기쁨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죄를 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전혀 가지지 못했거나 턱없이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눈에 보이는 고통보다도 더 선명하고 확실한 것으로 보고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확고하다면 죄의 유혹이 있어도, 감당해야 할 손해와 고통이 있어도, 혼자라는 영적인 외로움이 사무쳐 오더라도 인내하면서 그 경주를 마칠 수 있습니다. 그 경주를 영광스럽게 마치게 해 주는 능력은 바로 그런 종류의 믿음에만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좋은 믿음에 있어서 성도들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만, 그리고 히브리서의 성도들에게만 주시고 우리에게는 나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누구에게나 허락하십니다. 참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믿음 안에서 참된 만족과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고정하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믿음을 허락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사모하고 또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이 믿음이 소중함을 진정으로 깨닫고, 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시는 성도들로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 어떤 것에서 보다 이 믿음에 진보가 있으시고 또 이 믿음에 부요해 지시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앞에 있는 기쁨을 확실히 바라보며, 그 기쁨 때문에 살고 그 기쁨으로 승리하는 모든 회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