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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장년 2부 여름수련회.아멘하여 영광을 돌리느니라(1)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 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있습니다. ,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고린도 후서 1장 15-22절




서론 : 나의 이야기

제가 몇 주 전에 장년부에서 설교를 하면서 제가 목사가 된지 12년째인데, 요즘 예수를 완전히 다시 믿고 있다고,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참 많이 억울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라는 것이 결코 완성에 이를 수도, 완전해 질 수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목사가 되어서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솔직히 무척이나 부끄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은지 30년이 넘었고, 교회에서 교역자로 섬긴 것이 16년이나 되었고 여러분에게 성경을 가르친지 6년이나 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 동안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을 뒤집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제가 가르치고 선포한 모든 내용들이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가짜도 아니었습니다. 완전하진 못했어도 나름대로 정직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했고, 또 많이 힘썼습니다. 최소한 그 정도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많이 부족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족함은 제 신앙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고, 영적인 무식함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힘듭니다. 

참 많이 부끄럽고 또 잘못하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은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였습니다. 저는 그 때 마치 함께 사막을 헤매다가 먼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의 심정이었습니다. 어찌 여러분에게 그 사실을 알려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서야 불안과 근심, 걱정이라는 영적인 갈증을 해갈할 수 있는 샘근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찌 저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의 영적인 갈증과 믿음의 갈등을 알고 있는데 목사가 되어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요즘 계속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저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는 은혜를 주십사하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믿음의 수준이 높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인가 하는 믿음의 종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참 묘해서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비유로 말씀드리면 아래 계단에 있을 때는 그 위 계단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아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전부인 줄 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믿음이 가진 능력, 믿음이 가진 풍성함이 자기가 아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믿음을 아는 은혜를 얻기 전과 얻은 후의 저의 느낌을 글로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글이어서 부끄럽기도 하고 또 이해하시기 어려움도 있으시겠지만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전에는 믿음 성장을 아랫 계단에서는 윗계단에 뭐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었다(물론 윗계단에서는 아랫계단에 뭐가 있는지 다 보인다). 그런데, 그 생각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요즘 거기에 무언가 덧붙여야 비로서 맞는 설명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앙은 그렇게 위로 올라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옆으로의 지평도 그런 식으로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신앙은 단지 수준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닫힌 세상이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지며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과 연이어 넓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요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나의 믿음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고, 그래서 채워지고 더해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없는 믿음을 있는 믿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계신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신다. 그리고 이 지식은 진실로 내 믿음의 비어있는 곳을 채워가고 있으며, 그 빈 곳이 조금씩 채워질 때마다 나를 울게 하고 흥분하게 한다. 너무 억울해서 울고 너무 바보같아서 울지만, 또 너무 기쁘고 충일해서 흥분되기도 한다. 


    믿음의 성장은 단순히 높이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넓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지금 내가 있는 방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더듬 더듬... 그 방의 탐험이 다 끝나갈 때쯤 벽들 더듬는 내 손에 그 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그리고 그 방에 있는 줄도 몰랐던 문고리 하나가 손에 잡혔다. 문고리가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머무는 방 뿐만이 아니라 그 문을 통해 그 방과 연결된 다른 방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을 열었다. 


    세상에...

지금껏 내가 전부인 줄 알고(물론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밖에 무엇이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그 방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는 공간의 전부였다) 그 안에만 머물렀던 그 방은 내가 열려진 문을 통해 다른 방으로 한 발을 내딛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 열린 방, 내가 들어선 방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제 또 다시 방은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전의 방에 대한 탐험도 모두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그 방을 포함하는, 그 방을 흡수해 버린 그러나 이전의 방과는 전혀 같지 않은 탐험의 공간이 열려진 것이다. 이제 나는 하나의 방을 탐험하면서 두 개의 방을 동시에 탐험하는 셈이 되었다. 


   새로운 방, 이전의 방과 하나가 되어버린 그 방은 또다시 내가 들어온 문 밖에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넓디넓은 결코 완전히 탐험하지 못할 공간을 내보여주면서 다시 보이지 않는 문을 찾아보라고 그렇게 '믿음의 지평'을 넓혀보라고 초청한다. 


     아참...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새로 열린 방은 이전의 방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분명히 다른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이지만 그 빛나는 광채가 다르고, 그 향기가 다르며, 그로 인한 충만한 만족감과 그 만족이 주는 능력이 다르다. 평생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믿음 안에 진짜, 그것도 이 땅 위에서 이런 만족과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참,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이전에 내가 있던 "하늘의 소망"이라는 방을 열어주시고 그 방으로 들어가게 하셨을 때도 나는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있었던 이전의 방과 지금 나에게 새롭게 열려진 이 방은 원래 하나였던 것 같다. 어떤 쪽에서 접근하던, 어떤 쪽에서 문을 열던 그 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결국하나가 되는 그런 방 말이다.)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아니 확신한다. 

그 방 안으로 단 한 걸음만 들여놓았을 뿐인데, 기독교의 신앙 안에는 비록 땅에 살아도 근심과 걱정을 넘어서는 능력이 진짜로 있음을, 있고 소유할 수 있음을, 그렇게 이미 허락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그 세계로 향한 문이 열렸고, 그 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눈부시게 기쁘고 충만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은 어디있을까?

아직 두 걸음도 나가지 못해놓고 또 다른 문이 기대되는 것은 왜일까? 보이지 않아도 그 문이 있음이 믿어지는 것은 또 왜일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장애인입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계실지 모르지만,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인식이 장애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분명히 아픈 것은 잘못이 아니고 아픈 사람은 오히려 그가 앓고 있거나 혹은 이미 앓은 질병과 사고의 후유증의 피해자인데 이런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올바르지를 않습니다.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고, 그 연약함을 무시와 놀림의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힘든 것은 기회의 박탈입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기회가 거의 주어지질 않습니다. 법적으로는 장애인 고용비율이 정해져 있지만 그 법률을 지키는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벌금내고 말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처음 전임사역자로 지원했을 때, 스무 장이 넘는 이력서를 보냈지만 연락이 온 것은 단 두 곳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큰 교회에 지원했던 것도 아니고, 또 다른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제 추측이고 억측인지 몰라도 그것도 제가 장애인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해는 갑니다. 충분히 건강한 사람 데려다가 사역하게 할 수 있는데, 몸이 건강치 못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롭고 효율적인 선택이 아닐 수도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런 차별이나 불이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40년을 살아온 제가 그런 삶 가운데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의 어려움입니다. 어려서부터 항상 남들보다 불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그런 불이익 속에서 살았던 저는 항상 ‘나는 나중에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함 속에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 근심은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 살, 두 살 나이가 더 먹어가고 이제 담임목회지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 가까와 오자 그런 근심과 두려움은 더더욱 커졌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시기에 제가 만사태평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제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연 어떤 교회가 나같은 장애인을, 그것도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담임목회자로 받아 줄 것인가? 정말 내가 갈 곳은 있을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래도 순적하게 인도해 주셨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가도 막상 또 생각나면 또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했습니다. 만약 몸이라도 건강하다면 나중에 갈 곳 없어져도 몸으로라도 떼우며 살 수 있을 텐데 몸도 건강하지 않으니 그것 또한 저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그야 말로 현실을 위해서는 철저히 무능한 상태가 될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그런 생각이 찾아오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사실 이런 근심과 걱정은 제가 평생 안고 달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며, 또 이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저의 마음과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근심과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참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과 싸우려 들거나 혹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정병윤 목사님의 책꽂이에서 그 동안에도 거기 계속해서 꽂혀있었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제 손에 들려있는 “장래의 은혜”라는 책입니다. 그 이전에도 관심을 가졌던 책인지라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권의 독서가 바로 제 신앙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책이 그런 이야기를 해 줄줄도 모르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저를 이렇게 만족하고 평안하게 해 주었고, 이제는 정말 은혜에 기대어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삶을 출발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저는 이런 모든 변화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감히 이 책이 저에게 던진 영적인 메시지들이 제 삶과 신앙을 완전히 뒤흔들었고, 또 바꾸어 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이런 믿음에 이르신 분들에게는 이런 저의 고백이 아주 초보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들리실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실에 대한 걱정을 넘어서지 못하고 언제나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믿음 없는 목사였던 저에게는 이런 변화는 제 남은 삶을 정말 여러 방향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는 엄청난 능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 귀하기에 저는 평생 이 은혜를 붙들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서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이 믿음을 주신다면 목숨을 가져가셔도 좋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만큼 이 은혜와 이 은혜를 가져다 주는 믿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보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도 주지 못하는 만족을 이 은혜가 공급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며, 예수 믿는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혹시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노후걱정, 건강걱정,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 죽을까봐 걱정, 너무 오래 살까봐 걱정, 자녀의 현재에 대한 걱정,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 손주가 없어서 걱정, 또 있어서 걱정, 정치 걱정, 경제 걱정, 나라의 안보 걱정... 혹시 이런 셀 수 없는 수많은 걱정과 근심 때문에, 그 속에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두려움이 여러분에게서 평안을 빼앗아가고 세상에 속한 것들에 욕심부리게 하고 집착하게 하며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과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사는 일에  큰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원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과연 그런 삶이 성도의 정상적인 삶일까요? 그런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전부일까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안에 담아놓으신 능력의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어찌 세상의 것들로 인한 우리 근심과 두려움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믿음이 세상을 이길 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공염불에 불과한 말 그대로 듣기 좋은 헛소리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믿음은 정말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럴 능력이 믿음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믿음을 갖기를 소원하십니까? 정말로 정말로 소원하십니까? 내 삶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며,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믿음을 알게 하시고 또 갖게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살피기 전에 잠깐 함께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1. 우리 안에 참된 믿음, 참으로 능력있는 믿음을 향한 소원과 갈망이 되살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 

    다. 

  1. 내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믿음 속에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이길 힘이 있음을 진정으로 믿게 해 달라고 

  1. 오늘 말씀을 듣는 동안 내 안에서 믿음이 생기게 해 달라고, 성경이 말하는 그 믿음이 내 속에 생겨  

   나서 내가 오늘 들려오는 말씀에 진정으로 믿음을 더해서 성경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는 그 믿음의    

   참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먼저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제가 어느 가정에 심방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두 분이 이런 저런 걱정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가 본문을 읽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성도님, 이 말씀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진실로 가능할까요?” 여자성도께서 주저없이 너무 자신있게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이네요. 성경이 되지도 않는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항상 기뻐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일,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가능할까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뿐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도,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일들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일은 가능한 일일까요? 여러분 자신에게도요?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자꾸 그 말씀이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또 들으면서 속으로 “말이야 맞는 말이고, 성경도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게 될까? 그건 이상이지 실제가 아니야.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은 현실적인 책이 아니라 이상적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이상적인 책으로만 보이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온전치 못한 세상에서 온전치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그러지고 불완전한 입장에서 보니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그저 이상적인 것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정상적인 것을 이상적인 것, 그래서 애초에 불가능하고 가능하더라도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으로 여기게 해서 그 길로 가지 못하게 막고, 오히려 정상적인 것에 대한 불만과 거부감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사탄의 계략을 알아차려야 하며, 그래서 그것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고 앞으로도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시면 항상 듣는 내내 “저 믿음은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저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믿음이다. 내 믿음이 아니라 저 믿음이 믿음의 실제다.”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저 믿음은 가능하다, 가능할 뿐 아니라 저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믿음이다, 지금 내 믿음이 아니라 저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그러면서 그런 말씀들에 믿음을 더하게 해 달라고, 그 말씀이 참으로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배경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의 성도들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로 간다고 해놓고 중간에 가지 못할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회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을 고린도의 성도들이 알고는 바울을 오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변했다고, 원래부터 바울은 고린도로 올 생각이 없었고, 그저 건성으로 입으로만 ‘그래, 그래 갈께’라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바울은 자기들보다 다른 지역 교회 성도들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오해를 풀어주려고 오늘 본문을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그는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간다고 해놓고 안 간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은 개인적으로 변덕을 부려서 그랬거나 그저 건성으로 대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갑자기 조금 뜬금없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함이 없노라.” 갑가지 끼어든 듯한 이 말은 원래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이 확실하듯이 우리의 말은 예인 동시에 아니오가 아니다.” 신실함이란 일관성이 있는 것이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한 결정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 안에서 정해진 것이지 적당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바울과 실루아노 그리고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예인 동시에 아니오가 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불분명하거나 변덕스럽게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분과 그 분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것들은 언제나 예스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이 그들의 참된 유익을 위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포함한 사역자들도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언제나 그 원칙 안에서만 일했습니다. 그 어떤 일도 개인의 호불호와 이익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가장 유익한 것들이 무엇일까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또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예스만 되는, 참으로 유익이 되는 일만 결정하고 또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며 고린도 교회의 오해를 풀어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말 엄청난 구절, 너무 위대하고, 너무 풍성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성경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20절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을 바꾸고 저를 다시 예수 믿는 길로 인도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아마 갑작스럽게 대한 구절이라 여러분에게는 별로 큰 충격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어쩌면 성경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믿음이 우리 삶을 위한 실제적인 능력이 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어떤 구절보다도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모든 선언은 그 선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선언이 말하고 있는 은혜와 복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그렇게 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보장하고 있는 복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약속이 믿어지는 사람, 그리고 이 약속을 믿으려하고 또 그래서 믿게 된 사람들만이 이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정말 믿어지는 복을 주시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희에게 한 모든 약속에 대해서 이미 ‘Yes!’라고 했다. 단 하나도 ‘No!’라고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도 ‘No!’라고 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No!’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모든 약속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Yes다.” 

우리는 예수 믿는 일을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일, 그리고 조금 더 나가면 기도해서 응답받으며 살아가는 일, 좀 더 나가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일로 이해합니다. 물론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이 속에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과 부요하심에 대한 이해가 빠져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 일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풍성하고 만족스러우며 그래서 아름다운 일인지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믿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모든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성취를 믿게 하는 완전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실 것이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약속만큼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지키시기 어려운 약속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약속을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셨다면 나머지 약속들, 그것에 비교해 보면 너무나 작은 것들, 너무나 쉽고 하챦은 약속들을 어기실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 우리에게 다른 것을 아끼실까요? 우리의 유익을 위한 약속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셨다면, 그 분이 우리 삶의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약속을 어기실리가 없으며, 그 분이 우리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모든 일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깨뜨리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그 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심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 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한 약속의 온전한 성취이자 확고한 보증이신 그 분을 바라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그 분을 붙들고 있는 손만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온전한 믿음으로 되돌아 가 그 안에서 든든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 분의 모든 약속에 대해서 “YES!”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약속도 NO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모든 약속은 선합니다. 지극히 선합니다. 단 하나도 우리의 삶에 해를 끼치는 약속이 없으며 손해를 보게하는 약속이 없습니다. 그 분은 항상 우리 삶의 참되고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시고, 또 모든 것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해 모든 것에 대해서 영원히 YES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과거에 대해서 YES하라

회원 여러분, 그런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삶 속에는 지금까지 NO가 없었다. 전혀 없었다. 네 과거 삶 속의 모든 일은 모두가 다 나의 YES였다. 그 어떤 일일지라도 너를 향한 나의 선한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들이었고, 그 중에서 단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은 없었다. 너도 나의 이러한 YES에 대해서 YES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서 “내 이름 아시죠?”라는 찬양이 있죠? 한 번 같이 불러볼까요?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눈에 흐른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늘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참 은혜롭죠? 정말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중간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우리는 모두 이 부분을 부를 때 마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우리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면 누가 이 사실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누가 이 부분을 온전한 감격 속에서 부를 수 있을까요? 그건 바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내 삶을 어떻게 섭리해 오셨는지를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한 분이시고 변덕이 죽끓듯하시는 분이시며, 전지하시지도 않고 전능하시지도 않다면, 아들을 내어주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그 분이 나를 안들, 그리고 나의 삶을 처음부터 붙들고 계셨던들 그것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감사하겠습니까? 

회원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섭리해 오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선한 것이 그 분으로 부터만 나오는 모든 선의 근원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어둠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빛만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세상과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진정한 필요와 마음과 생각, 영혼의 모든 상태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또 그 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선하신 뜻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일에는 결코 실패함이 없으십니다. 또 막고자 하면 막지 못할 일도 전혀 없으십니다. 게다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소유주이십니다.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또 소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부요함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극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장 아끼는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누가 우리의 삶을 처음부터 붙들고 계셨으며, 그 안에서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YES”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무엇하나 악한 것이 없고, 무엇하나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무엇하나 모르는 것이 없는 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서 YES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져 온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 분의 언약에 대한 그 분의 YES 안에서만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런 우리의 삶 속에 부정적인 것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삶 속에 우연이란 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나 해가 되는 것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실수가 있었을까요? 그건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악함 때문에 우리 삶 속에 끼어든 악하고 부정적인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YES하셔서 우리 삶에 들어온 일들입니다. 그 일이 끼치게 될 악한 영향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선한 결과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YES하신 일들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도 NO가 없었고, 그래서 사실은 결코 우리에게 해될 수 있는 것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우리의 시각으로만, 지금 당장의 행복과 만족이라는 기준에서만 바라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 없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 속에 들어있는 은혜를 느끼고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일의 유익이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만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와 왔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온전하고 얼마나 더 풍성한 삶이 되었을까요? 얼마나 은혜넘치는 삶이 되었을까요? 

제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너의 모든 과거와 그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YES했다. 너는 어떠니? 너도 나의 YES에 대해서 YES할 수 있겠니?”라고 질문하셨을 때,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저의 전체 과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YES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큰 교만이며 또 불신앙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갖 피조물이 창조주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 배푸시는 지극한 사랑과 은혜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 분의 YES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YES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것보다 크고 엄청난 교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회개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이제는 저의 과거에 대해서 NO했던 불신앙을 버리고 YES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런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과거를 바라보니 정말 말 그대로 무엇하나 선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엇하나 하나님의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저의 과거는 찬란한 빛과 풍성한 은혜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꼭 같은 과거가 전혀 다른 과거가 되어 버리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장애인이라 담임사역지를 찾는데 이미 많이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하는 셈입니다. 사실 평생 아픈 다리 때문에 불편해 왔는데, 일생 가장 중요한 일도 그것 때문에 방해와 손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사실 마음 속에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의 과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YES라고 말씀드리자 그런 생각이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저의 장애는 저의 큰 장점이요 유익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약간의 불편함이 있는 하나님의 정말 희안한 선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시죠?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면 언제나 무엇보다도 제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씁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런 필요가 있느냐고 충고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인생에서 제가 가진 아픔을 빼고는 도무지 저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의 자기소개서를 읽는 교회는 제일 먼저 제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저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목회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좋은 교회일까요? 또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저에게 딱 맞는 교회일까요? 이것이 제 눈이 바뀌자 바뀌기 시작한 저의 약점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 저에게 딱 맞는 제일 좋은 교회를 주시려고 저에게 그런 아픔을 선물로 미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 얼마나 놀라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제는 정말 두둑한 배짱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교회가 나타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니 제 아내도 그래서 만나게 된 듯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지금 제가 저의 아내와 만난지가 12년 반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아내와 저는 단 한 번도 싸움 같은 싸움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이해할 수 없어하고 또 믿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그렇다고 싸우지 않은 것을 싸웠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말이죠. 속이 상하는 것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저를 칭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은 제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기 때문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아니라 제 아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팔불출이라고 흉보실지 몰라도 저도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는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내로 만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도 제가 다리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편견없이 사랑하고 또 평생의 배우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닐까요? 이기적인 다른 목적이 있어서 혹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참 괜챦은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제 아내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저에게 그 아픔을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저는 제 아픈 다리 때문에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복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놀랍게도, 그리고 정말 억울하게도 지금까지 그걸 전혀 몰랐습니다.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복을 주셔도 복인 줄 모르고 그 안에 있는 그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이라 느끼며 감사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동안은 그 풍성한 은혜를 전혀 맛보지 못하며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원망과 불평 가운데서 말입니다. 

그 동안도 선하시고 실수 없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믿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그렇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데서 그쳤던 것 같습니다. 내 삶의 모든 과거와 그 속의 모든 사건들과 경험들... 내 약점들과 부족함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 가운데 주어진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진실로 기뻐하며 만족하며 받아들이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픈 다리에 대해서 그런 눈이 열리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제 삶의 과거의 모든 일들과 그 속에서의 경험들도 실은 모두가 다 그런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들의 모든 유익들을 제대로 다 찾아누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족함과 결함투성이인 저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전혀 실수 없이, 부족함이 없이 이끌어 오셨다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만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저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며 만족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불행했던 과거, 실수들, 부당하고 불의하다고 여겨졌던 나를 향한 대우와 차별들, 실패의 경험, 과거의 질병, 사랑하는 가족과의 헤어짐이나 사별, 자녀들의 질병이나 불행, 심한 가난 등...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에는 감사할수도 기뻐할수도 만족할수도 없다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내 권리라고 까지 여기는 그런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내 권리도 아닙니다. 비록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발생했던 일이고 나는 그저 그 일의 피해자 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는 참 악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완전하셔서 실수가 없으시며 나를 최고로 선하게 대해주시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일이 나에게 어떤 경험을 가져다 주었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던 간에 실은 그 모든 일들이 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편이었고, 나의 삶에 최고의 유익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도구들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내 과거의 일들이 나를 힘들게 했고,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모든 과거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YES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YES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NO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진실로 YES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우리의 NO는 그 분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지극히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대한 거절이요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우리를 향한 가장 선한 언약들과 그 풍성하고 충분한 언약의 보증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재에 대해서 YES하라

나의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진심으로 YES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일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히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역시 우리의 현재 삶에 대해서 YES하시는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도 YES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삶에 대해서 YES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우리의 과거에 일어났던 그 어리석은 불행들은 현재에도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의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 특히 당장 나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결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거나 혹은 선한 인도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의 삶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 중의 어떤 것이건 그런 삶 속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를 진실로 알고 누리는 흘러 넘치는 풍성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나의 모든 과거에 대해서, 처음 부터 하나님의 선하신 손 안에 있었던 나의 삶에 대해서 진심으로 YES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 믿음은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그렇게 과거를 바꾸었듯이 현재를 바꾸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 믿음은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게 하며, 그래서 현재의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불평과 불만은 사라집니다. 힘들고 어둡게만 여겨지던 삶도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삶이 됩니다. 궁핍하게만 여겨지던 현실도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풍성한 현실로 여겨집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와 복이 주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하십니다. 어제 우리에게 완전한 은혜를 배푸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완전한 은혜 가운데 넣어두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변함없으신 분이시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것은 저절로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꽉 찬 만족이 내 속 사람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어제의 하나님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다면 오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쏟아부어주신다고 해도 그 은혜를 받을 손이 없는 우리는 그 은혜의 부요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거의 삶에 대해서 진실로 YES한 사람은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기쁘게 YES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YES하신 나의 삶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YES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바로 열등감이 치료되기 시작합니다. 현실에 대한 짜증나는 불만과 분노가 치료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족함이나 결함들에 대해서 무척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또 불편하며 챙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괴롭히는 열등감이 없습니까? 여러분을 괴롭히는 피해의식이 없습니까? 짜증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현실은 없습니까?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은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면 이런 것들은 결코 당연한 것들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 동안 이런 것들과 수없이 싸워왔을 것입니다. 성공하셨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비교의식과 열등감, 자격지심, 그리고 그런 것들로 부터 나오는 위선과 허세,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불평과 절망들.... 여러분은 이런 것들로 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지셨습니까?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진실로 그런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조차 믿기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는 그런 것들로 부터 우리를 아주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정말 많은 부분 자유롭게 해 줄 만한 능력이 믿음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온 제가 그것으로 인한 열등감과 피해의식, 좌절감과 분노로 부터 이제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면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과거에 대해서 YES하신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진정으로 YES할 수 있으며, 그래서 나의 현재에 대해서 YES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도 어느 시점까지 도저히 은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만성질병입니다. 더러는 심한 눈병이라고 하고 더러는 간질병이라고도 하는데 그 병이 무엇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질병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때로는 그 병 때문에 설교를 하다가 쓰러지기도 할 정도로 그 병때문에 무척 고통을 당하고 난처한 일을 겪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아시다 시피 그 질병의 문제로 하나님 앞에서 세 번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 번이라고 말할 때는 단순히 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목숨 걸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여러 번 정말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응답은 아주 뜻 밖의 하나님의 대답으로 주어졌습니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무슨 청천벽력같은 응답입니까? 이것도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기껏 고쳐달라고 목숨걸고 기도했더니 그게 내가 너에게 준 은혜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니 말입니다. 막 화가 날려고 하는 바울에게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흥분하지 마라. 나의 능력은 너의 약한 것을 통해서 완전하여 진단다. 너는 나를 섬기며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의 연약함이야 말로 나의 영광을 더 풍성하게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면 그건 너에게도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 이 때 바울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자신의 현실과 그 현실 속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 부족함, 연약함, 나약함... 이제 이런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반대로 너무 기쁘게 나의 질병을 자랑할 수 있다. 이제는 설교다하다가 쓰러져도 좋고 그것 때문에 때로는 사역이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그걸 자랑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가장 온전하고 강하게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목숨걸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질병이 그의 과거에 가져다 준 부정적인 경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과거의 경험은 그의 질병이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할만큼 심각한 문제라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연약함, 그 질병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에게 머물게 해주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더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더 이상 그의 질병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질병을 오히려 기뻐하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목숨걸고 기도할만큼 심각한, 꼭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였는데, 그게 한 순간에 최고의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되었으며 자랑거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YES하신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온전히 YES라고 대답했을 때 일어난 기적 중에 기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아마 지금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고 좌절하게 하며 기죽게 하고 분노하게 할만한 현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 질병, 성격이나 기질, 무능력함, 가난, 자녀의 실패나 부족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완악함이나 의도적인 범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의 그런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 YES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YES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것 때문에 내 능력이 완전하여 지고, 그것 때문에 내 능력이 너에게 머무는 것이다, 내 은혜는 너의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더 영광스러워지고 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기죽고 좌절하지 말고, 열등감과 분노 속에 있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라, 오히려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의 과거를 한 번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실수와 범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은혜가 너를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풍성하게 인도해 왔는지 한 번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정말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 그 일, 심각한 결함이었다고 생각했던 그 일, 하나님의 재앙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그 일이 오히려 지금의 너를 위해서 얼마나 완벽하고도 선한 도구가 되어 있는지 한 번 돌이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해 준 일들 중에서 그래서 부족하고 그래서 온전하지 못했던 일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약함과 부족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놀라운 복과 능력의 이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그 수많은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너를 여기까지 복주고 인도해 온 내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 YES, 그 변함없고 풍성한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흔쾌히 기뻐하고 만족해 하며 YES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YES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의 전지하심도, 그 분의 전능하심도, 그 분의 신실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심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이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일까요? 그 믿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도 못하는 믿음인데 말입니다. 믿음은 믿느냐는 사실보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과연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그런 믿음이란 바로 현재의 나의 모든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YES에 대해 YES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믿음의 근본을 들추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짜 문제는 문제가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알면서도 환자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그래서 치료방법을 처방해 주지도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위한 영혼의 의사로서, 저 자신도 최근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병인 줄 알게 되었고, 또 치료받기 시작한, 여러분 안에 있을지도 모를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YES하지 못하는 불신앙”이라는 심각한 영적인 질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에 대한 처방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불신앙과 더불어 싸우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과거로 부터 옵니다. 과거의 풍성한 은혜에 만족하며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에도 동일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기쁘고 즐겁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YES는 우리가 구원얻는 참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은혜로 누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이 YES라는 대답을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은혜 또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가져다 주는 그 놀라운 변화와 풍성함을 전혀 모르고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영적인 손해와 궁핍함은 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합니다. 


회원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YES에 대해 이제 여러분의 YES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그런 믿음이 없으십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우십니까? 괜챦습니다. 그렇다고 슬퍼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다시 시작하시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이 없다고 기도하십시오. 믿음이 없으니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나에게도 하나님이 이미 YES하신 나의 모든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기쁘고 만족스럽게 YES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주실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지금 나의 현실과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까지라도 YES할 수 있는 든든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영원히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그 믿음 달라는데 거절하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거쳐 현재까지 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래입니다. 미래의 불신앙은 근심과 걱정의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진실로 YES할 수 있는 믿음은 그 근심과 걱정도 이겨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 속에 답이 들어있는 것같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돌아가서 내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이기고 싶으신 분, 그 실마리라도 얻고 싶으신 분은 내일 장년부 모임에 꼭 참석하십시오. 열린 마음과 믿고자 하는 열망만 가지고 오십시오. 무슨 약장사 같지만 오늘은 이렇게 해 놓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