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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44.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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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3장 7-19절



서론 : 신앙에 있어서의 체험의 역할

우리나라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신앙도 그런 측면이 무척 강해져 있습니다. 그 하나의 증거가 바로 우리 나라 교회 안에서는 진리보다도 체험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설교도 진리 자체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설교보다는 체험적인 설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성경본문의 진리를 밝히는 것과 거의 상관이 없는 설교라도 감동적인 간증이 들어있다면 그 설교에 많은 점수를 주기도 합니다.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은연중에 더 큰 체험을 한 사람일수록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에 있어서 체험은 무척 중요합니다. 유익하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혹시 이런 체험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과대평가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적인 체험이 우리 생각처럼 정말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신앙적인 성숙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지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신앙에 있어서 체험 자체의 역할이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다면 이런 체험 위주의 신앙은 결국 우리를 길잃어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한 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체험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하실 만한 신앙이 되게 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에 대하여

오늘 부터는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되는데요. 히브리서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하며, 그 진리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풍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면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전부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시작도 그리스도시고 그 신앙을 붙들어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시고, 그 신앙의 중심이 되시는 분도 그리스도시며 성도들의 신앙의 모범이 되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며 그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심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 말고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본문의 설명,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패의 이유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가 이런 그리스도에 대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을 일단락 한 후,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실패의 역사를 예로 들면서 성도들을 권면하고 또 경고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경험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완벽한 함께하심과 보살피심, 그리고 공급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모든 일들의 혜택을 전부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은혜를 받은 그 자리,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시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그들의 마음이 미혹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참된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 길이 얼마나 복되고 확실한 길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된 안식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모두가 광야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신앙적인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했고,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그런 안타까운 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믿으면서 크고 작은 영적인 체험을 하곤 합니다. 특히 예수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부할 수 없는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기도 하고,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거나 도저히 답이 없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기도 합니다. 살 수 없을 것 같은 곤궁함 속에서도 이상하게 계속 이어지는 딱 떨어지는 은혜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바로 우리가 겪는 출애굽의 경험이며, 광야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일 것입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이런 체험들, 이런 놀라운 경험들이 우리 신앙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런 은혜를 체험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주변의 경험이 그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거나 혹은 대다수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우리 주변을 보면 그런 엄청난 은혜의 경험을 하고 나서도 아얘 신앙자체를 저버리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온 세상 예수 혼자 믿는 것 처럼 믿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이 병만 치료해 주시면, 이 어려움만 해결해 주시면 평생 정직하게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약속하고서 막상 그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되지 않아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이런 사람들의 현재 상태가 곧 그런 사람들이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들은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했던 과거의 사건이 우리의 믿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고, 또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회원 여러분, 이스라엘은 왜 실패한 것일까요? 왜 많은 성도들이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과거의 신앙적인 체험의 진짜 사용법을 몰라서 입니다. 모든 것에는 그것에 맞는 바른 사용법이 있게 마련입니다. 잘못 사용하거나 마음대로 사용하면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익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유익은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앙적인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인 체험은 그것 자체로도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실은 그것은 또 다른 목적,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들이 과거의  신앙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은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가만히 살펴보면 추억거리나 혹은 자랑거리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은혜, 신앙적인 체험의 진짜 용도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의 믿음을 위한 기초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은혜의 체험, 그 체험이 알고 깨닫게해 준 하나님의 능력과 모든 성품에 대한 지식은 그 위에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믿음의 집을 지으라고 주신 기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적인 체험을 주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는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지 누리고 즐기게 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추억하라고 그러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고 사랑이 많은 분인지, 그 분의 능력은 또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지, 또 얼마나 부요하신 분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가 충분히 알았다 싶으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물으십니다. “다 보았지? 느끼고 다 누렸지? 그렇다면 이제 넌 이런 나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겠니? 이제 내 약속을 믿고 내가 지시하는 길로, 내가 바라는 길로 나를 따라올 수 있겠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의심이 많고 더디 믿는 자들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을 제시하십니다. 우리 눈앞에 내미십니다. 그 증거들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요, 영적인 체험들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우리 과거의 모든 은혜와 놀라운 일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고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 만약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불신앙이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큰 모독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실제로 더 많은 성도들은 이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 보다는 여전히 세상의 길, 그리고 인간의 길을 따르기를 더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특징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기를 꺼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 때문입니다. 이미 수차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에는 항상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거의가 다 “너희가 이렇게 하면 내가 저렇게 해 주겠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이 참 여러가지이지만  몇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길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복된 약속들에 이런 조건들을 붙여놓으셨을까요? 그냥 복을 주시지 않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진짜로 그 약속을 믿는지 어떤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들을 따른다는 것,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힘쓴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들을 진짜로 믿고 있다는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조건들이 하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들은 거의 항상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나 인간의 길, 세속적인 방법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게다가 믿음의 눈이 없다면 하나님의 길은 어렵고 불확실해 보이는 반면에 인간의 길은 쉽게 확실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고민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고민과 갈등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모른 척 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귀를 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게 되고 싫어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길을 혐오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의 마음에도 거룩함과 순결함을 거부하는 마음의 경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마음을 일컬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이라고 말합니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증거들을 거부하고, 또 고의로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 버렸으니 그런 마음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 귀한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실 수도 없는 것이구요. 이것이 바로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이고 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떠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 그래서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흔쾌히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버린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귀를 다시 열리게 하기 위해서 충격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귀입니다. 사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신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귀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기능을 가진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들려올 때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자기 삶과 신앙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영적인 이해력과 수용능력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귀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점점 더 그 귀를 닫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요구의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해서 무척 불편해 하고 심지어는 불쾌해 하는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을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참된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진짜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 성도들 중에서는 표정이 굳어지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회원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혹시 이런 거부감은 없으십니까? 그것이 신앙적인데도,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것을 들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불쾌해지며 마음이 닫혀 버리는 경험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리고 나는 점점 들을 귀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안식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결론적으로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분의 약속이 들려올 때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약속을 듣고 받아들이면 그 약속이 믿음의 기둥과 기초가 되어 믿음을 더욱 든든히 세워줍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한 삶에 대해서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길, 인간의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모두가 다 복된 동시에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그래서 그 복된 약속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그 부담은 그만큼 가벼운 짐이 됩니다. 기쁘게 질 수 있는 짐이 됩니다. 그 믿음이 이 땅에서 거룩하고 정직하게 사랑하면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쉽지 않은 길을 가게 하는 새로운 힘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체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신실함과 확실함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울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때에 오히려 강퍅하게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더 크고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결론 : 과거의 은혜 위에서 미래의 하나님을 보라.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주신 신앙적인 체험들은 뒤돌아서서 그것을 기억하고 바라보며 추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라고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위에 믿음의 발을 딛고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믿음을 준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나의 과거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지금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계산기를 두드려 보십시오. 비록 우리의 믿음이 부족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던 과거에도 그 은혜로 이만큼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다면, 만약 우리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더한다면 우리의 미래의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하고 완전하겠습니까? 


회원 여러분,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요구를 따르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요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요구들은 그저 딱딱하기만한 부담스럽기만한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뒤에 따르는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는 열린 문입니다. 그 문이 크고 부담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만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 크고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영광이 크고 찬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무겁게 느껴지고 그래서 파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마음이 강퍅해지려고 할 때마다 약속의 성취를 눈 앞에 두고, 그 약속된 안식의 문 앞에서 안타깝게 탈락했던 이스라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아니하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들의 비극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과거를 생각하십시오. 그 과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나의 광야 40년 동안 매순간 나를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 하나님께, 그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의 눈을 고정시키시기 바랍니다. 그 곳만 뚫어져라 바라보십시오. 그 약속이 더 크고 선명해질 때까지, 그 약속이 가장 확실하게 보이고 하나님이 온전히 믿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 그 분의 약속을 들을 때 강퍅해지지 않고, 더 견고하고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이 무뎌지고 강퍅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조건있는 복된 약속에 믿음을 더하고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모든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고, 약속된 안식, 그 영원히 영광스러운 안식에 넉넉히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