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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27.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날짜 : 2011-08-07

본문 : 열왕기하 19장 1-19절


서론 : 성경의 인물평가를 보는 눈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성경이 어떤 인물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평가를 해 놓은 내용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평가는 어떨 때는 정말 그 사람을 향해 분노하게 만들만큼 부정적일 때도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게 할만큼 긍정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평가들 앞에서 성도들의 마음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들은 때로는 우리를 헤깔리게 하고 당황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특정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전체나 혹은 어떤 모습과 매치가 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면 이런 경우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이 땅을 믿음으로 살다간 우리 선배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은 다 그렇다고 쳐도 그 속에 입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입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아는 성도들에게는 입다가 믿음으로 살아간 전형적인 인물로 소개되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그의 기록을 찾아 읽어보면 그의 전체 삶은 결코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간 삶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는 입다를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사사기도 성경이고 히브리서도 성경인데 둘 중의 하나는 틀렸다고 볼 수도 없고 성경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회원 여러분 중에서 성경을 읽다가 이런 문제에 봉착하신 분들이 계신다면 제가 오늘 하나의 해결방법을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입다의 예를 들었으니 입다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사기가 말하는 입다의 모습과 히브리서가 말하는 입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렇게 조화시키면 됩니다. 분명히 입다의 전체적인 삶은 히브리서의 기록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평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입다의 전체 삶에 대한 평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단지 입다가 믿음으로 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하는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입다가 믿음으로 행했을 때, 나라들을 이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히브리서의 관심 밖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입다에 대한 이야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기 나오는 삼손도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믿음으로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를 발견하면 그것이 과연 그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한 평가인지 부분에 대한 평가인지를 구별해야 하고 비록 그 기록이 그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한 순간도 남김없이 다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서 성경을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읽다가 쓸데 없는 고민에 빠지거나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완전무결한 삶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이야기의 모순이 주는 교훈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은 히스기야입니다. 열왕기하는 18장부터 20장까지 세 장이나 할애해서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아주 길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열왕기하가 25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의 수많은 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감안해 보면 거의 8분의 1이 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입니다. 18장으로 돌아가 보면 5절 이하에서 열왕기하는 히스기야를 그야말로 극찬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열왕기하는 다윗 이후에 북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서 이런 왕은 히스기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얘 여호와와 찰싹 붙어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워낙 잘 지켜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가 어딜 가든지 형통하게 해 주셨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히스기야는 그 막강한 앗수르를 배척하고 블레셋 사람의 땅인 가사까지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 성경이 처음 등장시키는 히스기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참 당황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히스기야 14년, 그러니까 그의 통치 중반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처들어 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하고 애굽쪽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거의 함락 일보직전까지 내몰립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산헤립 앞에 납짝 엎드립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저 돌아가 주시기만 하신다면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싹싹 빕니다. 그러자 산헤립은 은 삽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합니다. 히스기야는 나라 안에 있는 온갖 금이란 금, 은이란 은은 다 긁어 모읍니다. 심지어는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은까지 벗겨서 산헤립에게 바칩니다. 산헤립은 그 금과 은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이스라엘은 함락 일보직전에 겨우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해피엔딩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이 이야기 속 그 어디에도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찰싹 붙어 그 분을 의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형통케 하신 은혜로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을 잘못했다가 된통 얻어맞고 비굴하게 납작 엎드린 힘 없는 왕, 성전의 금, 은까지가져다 바치고 겨우 위기를 모면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왕의 모습 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전무후무한 선한 왕, 가는 곳마다 형통한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나중에 유다가 멸망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금과 은을 의지하여 위기에서 벗어난 그였지만, 나중에는 그 금과 은에 대한 자랑과 교만 때문에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회원 여러분, 앞에 나오는 히스기야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뭐고, 이 이상한 이야기는 또 뭡니까? 이 두 기록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18장 5절부터 8절까지의 기록이 히스기야에 대한 시시콜콜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런 저런 부족한 모습과 또 때로는 치명적인 실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래도 히스기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는 하나님과 찰싹 붙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지켰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던 왕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최종 평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가지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고 할 때, 그 형통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회원 여러분,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대가로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짧게 말씀드리면 형통에는 항상 신실함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형통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형통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짓을 하던 상관없이 잘 되게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통은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간 것에 대한 복이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신실함이 깨어지면 그 형통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언제든지 불통으로 변해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더 온전한 형통을 사모하며 그리로 나아가게 하시려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결코 유쾌하고 즐거운 형통일 수는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유다의 큰 성들을 모두 함락시킬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진실로 형통케 하시고 싶으셨기 때문니다. 히스기야가 처음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다면 분명히 사정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마병과 병거이셨던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시고 그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형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에게 전쟁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전쟁이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그 전쟁을 하나님께 맡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처음 앗수르가 침공해 왔을 때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돈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금은까지 손을 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임기응변이요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떠난 앗수르는 이번에는 아얘 유다를 끝장내기 위해서 전보다 훨씬 더 큰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세력으로만 보면 이 전쟁은 정말 하나 마나한 전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앗수르는 아얘 유다의 전투의지를 무력화시키는 심리전부터 시작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온 장수 중에 랍사게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랍사게는 이스라엘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방언까지 유창하게 구사해 가며 성벽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리 저리 흔들었습니다. 비웃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유다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까지 들먹이면서, 자신들이 거기까지 올라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니 하나님이 유다를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 뻔하다고 주장했고, 만약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유다를 건지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니 빨리 항복하라고 떠벌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다의 대신들은 분노와 슬픔 속에서 이 내용을 모두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전번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옷을 찟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낮추고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는 굵은 베옷을 입히셔 이사야에게 보내며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망넘치는 소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두 해결해 주시고, 그 간교한 랍사게를 처리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는 와중에도 랍사게는 자신의 악한 시도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앗수르 왕이 싸우는 것을 도우러 가는 중에도 다시 유다의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나님을 폄하하면서 하나님도 의지하지 말라고 협박과 회유를 계속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수많은 나라를 함락시키고 멸망시킬 때 가만히 있었던 힘 없는 하나님이 어찌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히스기에는 그 편지를 펴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기도의 주제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의 기도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데 산헤립이 감히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모독하도록 내버려 두시냐고,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시라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열방에 증거하시라고 기도드립니다. 물론 이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직결된 문제이기는 했지만 히스기야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이, 이 전쟁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이 되도록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치루는 방법 또한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그 전쟁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부터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전쟁을 하나님이 치르시도록 내드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번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처음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했을 때도 히스기야는 옷을 찟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그 모든 전쟁을 맡기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두 번째 침공 때 히스기야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섰고,  이렇게 변화된 태도는 하나님을 무척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그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고 스스로 그 싸움에 뛰어 들어, 유다는 싸울 필요도 없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 전쟁을 자신의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으로 온전히 인정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을 바라셨습니다. 유다가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이 전쟁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렇게 두 번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그러한 상황을 다루는 올바른 방법을 터득하면서 자신이 가야할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점점 더 하나님께 더 온전히 달라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유다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왕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결론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을 하자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 정확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해도 그 일이 다 끝난 후에 “아!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났구나. 이 일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하고 그제서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사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시대의 유다는 영적으로 앗수르의 손에 멸망을 받을만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영적으로 타락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18만 5천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유다가 풍전등화 상태가 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앗수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앗수르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갈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습니다. 유다를 집어 삼키기에는 유다가 군사적으로 가장 취약해져 있는 그 때가 최적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아주 쉽게 유다를 집어삼키고 또 자기의 세를 과시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전쟁을 벌였고 이제 그 일의 완성의 문턱에 와 있었습니다. 

별 잘못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은 생사의 기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포악하고 잔인하기 그지 없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은 지금 당당하게 자신의 세를 과시하며 유다의 목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약백성이고 악하기로 친다면 유다보다는 앗수르가 훨씬 악한데, 하나님이 펼쳐 놓으신 현실은 유다가 멸망일보직전이고, 앗수르는 최고로 잘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만 보면, 그리고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음상황과는 완전히 반대로 결말지어집니다. 앗수르 군대는 하루 저녁에 18만 5천명 모두가 송장이 되어버립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모두가 산 사람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모두가 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앗수르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산헤립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본국으로 돌아가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앗수르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기는 유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 앞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천하의 앗수르 군대가 하루 밤 사이에 그렇게 완전히 전멸한 군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망할 것 같았던 것은 유다였는데, 막상 마지막 뚜껑을 열고 보니 망하게 된 것은 앗수르였습니다. 여기까지 와 봐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일으키신 이유는 처음부터 눈에 보여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앗수르를 더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유다와 히스기야를 하나님의 백성들의 있어야 하는 자기 자리로 되돌려 보내고 교만하고 잔인한 앗수르를 벌 주시기 위해서 이 전쟁을 계획하시고 또 진행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아무런 부작용 없이 하나님의 모든 목적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지 일의 시작이나 중간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의 속 사정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에게 미리 다 알리시고 또 의미를 설명하신 후에 움직이신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물론이고 믿는 우리들도 그 이유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계의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 앞에 어려움을 놓아두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며 온전해져 가게 하기 위한 도구로 그런 어려움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이 우리를 향한 징계인지 아니면 훈련과정의 일환인지의 여부를 그 일을 겪는 동안에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많은 경우에는 그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우리가 도데체 이런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은지, 정답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상황과 목적이 다르면 대처 방법도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려움이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해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대처방법이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반응이 있고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대하여 보였던 그 반응입니다. 히스기야처럼만 한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면 그 어려움 자체만 생각하고 그 어려움의 해결에만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기도는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기도는 그 어려움의 해결을 위한 기도이지 그 이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렇게 어려움을 가지고 기도하는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리고 바라시는 것은 비록 눈 앞에 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줄 아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 연습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성도라면 그래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도 가장 기쁘고 만족스러워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줄 아는 성숙한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시고 가장 적절한 해결방법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국가의 존패위기라는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보였던 첫번재 올바른 반응이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이유와 목적이야 어쨋든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 앞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일이 죄를 짓는 것이나 나쁜 일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죽을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가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고 뜻하지 않은 큰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일의 주관자와 해결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 일을 온전히 의뢰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처럼 그 일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 하나님의 일인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정직하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자신의 일로 맡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가장 큰 영광을 거두시고 또 가장 크게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반응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고 또 그것이 힘들지라도 바로 그 반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두 이루시고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가장 큰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모든 상황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의뢰하는 연습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의 몸에 익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분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을 돌려드림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