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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28. 그러나 여호와께서

날짜 : 2011-08-14

본문 : 열왕기하 23장 21-30절


서론 : 철칙은 없다

사람들은 항상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결론을 얻게 될 여지가 남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그 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지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면 그런 법칙은 별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성향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출판계에서조차 상식으로 통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조건에 대한 것인데, 물론 그 책 자체가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그런 제목을 가질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특별히 일반성도들의 눈에 들어오고 또 잘 팔리게 하려면 제목에 ‘비결’이나 혹은 ‘방법’이라는 말이나 혹은 ‘보장’같은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답이 보장된 기도’, ‘응답받는 기도의 일곱가지 비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가지 법칙’처럼 뭔가 확실한 것을 주는 듯한 제목일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잘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비록 사람들의 성향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앙에 있어서까지 이런 성향을 만족시키려는 것은 넌센스라는 생각을 합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무언가 확실한 것을 붙들려는 사람들의 심리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손과 머리 속에 넣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사실 잡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다른 것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놓아두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는 누가 뭐래도 분명합니다. 예를 든다면 “신앙인은 신실해야 한다”라든지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다”라든지 하는 명제들은 거기에 토를 수가 없고 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런 하나님께서 현실 속에서 일해가시는 방법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깨지지 않는 철칙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철칙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이거다, 저거다 하고 완전히 규정할 수 있는 법칙을 찾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그런 철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또 설교자로서 그런 철칙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철칙은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요시야 이야기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의 통치와 삶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자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요시야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를 흠모하게 될만큼 신앙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정말 놀라운 평가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지켰습니다. 형식적으로 행동으로만 지킨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생각, 모든 인격과 노력을 쏟아부어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를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런 왕이 없었다고 말로 평가합니다. 말 그대로 요시야 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서는 ‘전무후무한 왕’이었다는 것, 그것이 요시야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시야’하면 항상 따라붙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는 다윗 이후로 몇 번의 반짝임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빛을 일어갔던 여호와 신앙을 제 자리로 돌려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 것은 그가 여덟살 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몬이 스물 두 살에 왕이 되었다가 왕이 된지 2년 만에 신하들의 손에 암살을 당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여덟 살이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므낫세도, 그리고 아버지인 아몬도 아주 심각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뒤를 이은 요시야는 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여덟 살이라는 정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을 목숨처럼 섬겼습니다. 8살에 왕이 되었고, 26살이 되던 해에 성전보수를 시작하고 그 도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는 유다의 모든 우상들을 그야 말로 ‘혁파’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그에게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유다는 오랫동안 우상을 숭배해 왔습니다. 비록 영적으로 많이 회복되었던 히스기야 시대가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정말 악독한 우상숭배자로 55년을 통치했고, 아버지 아몬은 2년동안 유다를 통치하면서 아버지와 꼭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57년, 그러니까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두 세대 동안 유다는 가장 심각한 영적인 타락의 시대를 지냈던 것입니다. 이 세월동안 유다는 아마도 우상을 숭배하는 국가로 재편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우상숭배와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되었을 것이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한 들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는 우상숭배를 순순히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백성들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입니다. 선왕이 두 세대에 걸쳐서 우상에 푹 빠져 지냈으니 백성들도 우상숭배의 문화에 심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종교는 모든 것을 의미했습니다. 종교는 곧 정치였고 삶이었고 문화였습니다. 두 세대 동안 그런 세월을 보냈으니 이들이 자신들이 섬기던 신상들이 쓰러지고 무너지는 것을 보며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반대하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덟 살에 왕이 되어 18년 동안 때를 기다려온 요아스는 성전부터 보수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발견한 율법책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가 31년을 통치했으니까 이러한 종교개혁은 그 이후 13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실질적이고 근본적이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그의 선조들이 세워놓았던 모든 우상들을 부수고 그 자리를 더럽힘으로써 다시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그는 모든 산당들을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산당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내어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장소가 되게 했습니다. 신앙이 타락하고 변형되는 것을 원천봉쇄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가 종교개혁을 시작하던 해에 다시 지켰던 유월절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성경이 이를 두고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 앞에서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켰더라”라고 평가할만큼 유월절을 제대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회복했습니다. 유월절의 회복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역사의 결말은...

이런 왕이 유다의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 덕분에 유다 땅에서는 우상숭배가 청산되며 그 흔적이 사라져 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 유다를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평소의 예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유다를 기뻐하시고 다시 한 번 복을 주셔서 아마도 다윗 시대에 버금가는 영광을 회복시켜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시야 통치 31년에 당시 이집트의 왕이었던 느고가 힘이 많이 약해진 앗수르를 치려고 북진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가 앗수르를 치려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유다를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때 요시야는 이집트에게 순순히 자기 땅을 통과하게 해 주지 않고 이집트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이집트가 이기면 자기 나라도 점령당할 것이고, 이집트가 진다면 나중에 앗수르는 그렇게 길을 내준 책임을 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유다의 패배로 끝납니다. 유다가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가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시야의 사망 후,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었고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가 결국 완전히 패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나라는 땅 위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의 나머지 부분은 그러한 멸망을 긴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를 굉장히 당황하게 하는 결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 그 훌륭한 요시야를, 그리고 이제 막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기 시작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것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평상시의 하나님과는 많이 다릅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받아주시고, 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다시 강하게 해 주셨던 이전의 하나님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당시의 유다백성들이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우리의 충격도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자손 천 대까지 복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 용서하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요시야의 헌신은, 그리고 그의 인도를 받으며 제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한 유다의 돌이킴은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면 지난 13년 간의 요시야의 목숨을 건 종교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요시야 시대의 의미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오늘 본문은 일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본문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입니다. 분명히 요시야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윗보다도 나은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요시야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갑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우리의 기대대로라면 “그래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한 가지 사실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돌이키고 제 자리로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이미 진행중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편하기만 한 마음으로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언제나 받아주신다면, 무조건 받아주신다면, 항상 용서해 주시고 복만 주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또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며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분명히 그 참으심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밖에 없습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가면 비록 누군가가 혹은 한 세대 전체가 제 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결정적인 스케쥴이 이미 시작되어져 버렸다면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요시야의 삶이 그렇게 끝났다면 그리고 유다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면 요시야의 신실함과 개혁은, 그리고 유다의 돌이킴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요시야와 그 세대 사람들의 회개가 유다의 미래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요시야의 헌신과 유다의 회복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요시야의 헌신과 유다의 돌이킴은 그 누구에게 보다도 그들 자신에게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요시야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다백성들이 요시야를 따라 돌이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도 이전 세대의 왕과 그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배도와 반역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고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요시야와 그의 백성들은 이미 침몰해 가는 배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칭찬을 받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회복이 유다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와 시대를 이어가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은혜를 주며, 이정표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옷을 찟고 가슴을 찟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요시야의 죽음은 어찌 보면 굉장히 허무한 죽음이고 저절로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지?”라는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요시야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계획한 죽음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야 말로 막바지로 가고 있습니다. 더 지체했다가는 요시야가 이스라엘의 가장 비참한 꼴을 목격하게 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에 내리는 재앙을 보지 않게 해 주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과 내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 속에서 어디 위치하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만약 어떤 일을 행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우리로서는 그 시간표를 다시 무효화 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계속 기다려 주신다는 말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설명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런 설명이 통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표가 시작되기 전일 때만 그렇습니다. 이미 그 시간표가 시작된 이후라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불확실함과 무능함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시야처럼 우리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올바르고 온전한 믿음의 반응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리를 지킨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바른 자리로 돌아간다면, 항상 그러기 위해서 힘쓴다면 비록 그러한 우리의 헌신과 노력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을 받으며 영원한 영광 가운데 머물게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삶의 한 자락을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사용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시야의 삶이 비록 유다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지금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고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표가 아직 시작되기 이전이라면 그러한 우리의 삶과 헌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러기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나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로 마음을 다해서 헌신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다음 세대나 하늘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 아니면 우리의 믿음의 후배들은 그렇게 우리가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를 거두며 그 풍성한 유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와 뜻을 다 알 수 없고, 때로는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 나라나 역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그저 어느 시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묵묵히 우리의 길을 가면 됩니다. 그게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소명 중 하나입니다. 회원 여러분, 모두 요시야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당장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며,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값진 헌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요시야의 열정을 주셔서 이 길을 계속 가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