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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36. 그러면 어찌할꼬

날짜 : 2011-10-09

본문 : 사도행전 21장 17-36절


서론 : 하나님의 정교한 은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설교할 본문을 골라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설교방식은 성경 중 한 권을 선정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이 있고, 주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한 주 한 주 설교할 본문을 고르다 보면 그 당시의 성도들의 상황에 적절한 설교가 될지는 몰라도 성도들을 편식시킬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한 권을 선택해서 연속으로 설교하는 일은 적실성은 떨어지지만 편식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기독교 진리와 은혜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맛보게 해 줄 수 있고 그만큼 풍성하고 균형잡힌 성도들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년 2부를 담당한 후 지금까지 때로는 조금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지만 그런 방식으로 설교해 오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조금 방식이 바뀌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매일성경에서 그 주간의 성경공부 본문으로 정해주는 본문을 설교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제가 특별하게 누릴 수 있었던 은혜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입니다. 분명히 그 주간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본문으로 설교를 하다 보면 일부러 찾아도 찾기 힘들 정도로 그 주간의 상황에 딱 맞는 본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은혜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정교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만큼 교회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라고 믿습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의 정교함과 정확함에 때로는 정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1장의 말씀을 놓고 한참 씨름을 벌였습니다. 다른 주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뭔가 교훈이 되고 은혜를 발견하려면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은 전체 이야기의 가운데 토막이기 때문에 굉장히 난감했습니다. 아뭏든 결국 묵상과 연구를 끝냈고 그래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어떤 깨달음과 은혜를 나누어야 하겠다는 것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놓고 보니 참 놀라웠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니 돌아오는 수요일이 임직식인데, 제가 본문에서 발견한 교훈과 은혜가 그 일과 너무 딱 맞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정교한 은혜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장년부 회원들 중에는 수요일날 새로운 직분을 맡게 되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장로님이 되시는 분들도 계시고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이 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가까이는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입니다. 물론 사탕처럼 달콤한 선물은 아닐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아마도 칡뿌리나 산삼같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씹을 때는 별 맛이 없고 심지어는 굉장히 쓰게 느껴지겠지만 잘 씹어서 삼키시고 그래서 여러분의 삶과 또 섬김의 자양분으로 삼으신다면 정말 귀한 양약이 될 것이고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해 줄 만큼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또 이번에 임직을 받지 않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된 신분과 직분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이 말씀을 듣고 묵상한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흥황하지만...

사도행전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령충만한 제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은 정말 마른 들판에 불이 번져가듯이 펴져갔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를 흔들고 나라를 흔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복음은 점점 더 흥왕해져 갔습니다. 

회원 여러분, 만약 복음이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떨치며 전파되어져 간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의 위치와 삶은 어떻게 될까요? 복음이 흥왕되어가는 것과 비례해서 복음전도자들과 성도들의 사회에서의 위치와 개인적인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성공적이 되어져 갈까요?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복음전도자들과 성도들이 하는 선행이나 윤리적이고 희생적인 삶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그런 면에서는 인정을쇠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반대가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복음이 세력을 얻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심한 거부감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그 사회의 주류에 속해있었던 종교 지도자들, 혹은 정치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잃게 되고 특히 악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악함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한 번 복음이 전해지면 수 천명씩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하는 정말 놀라운 승리의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 큰 은혜를 받고 영적인 흥분을 느낍니다. 복음이 거둔 놀라운 승리에 도취되기도 하구요. 물론 그렇습니다. 복음은 처음에 그렇게 대단하고 능력있게 전파되었습니다.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고 꼭 보아야 할 것은 복음의 승리가 곧 그 복음을 전하고 믿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쇠하였다

바울은 교회의 유익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도중에 만난 제자들과 예언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일들을 말해주며 거기 가면 죽을수도 있다고 말하며 말렸지만 바울은 예루살렘행을 강행합니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기근으로 힘들어 하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위해서 모금해 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 이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를 진정으로 복음 안에서 하나로 만드는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이 일이 자신의 생명을 걸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이 아주 평화롭고 순조로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 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과 은혜를 나누며 모두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땅의 교회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 수 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울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칠 때 아들들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율법의 규례들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오해를 해결하지 않는 한 바울은 자신이 거기에 온 목적을 이루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그 일의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은 오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수 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고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미 해결책을 생각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중에서 단기 성결의 서원을 한 사람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되 그들의 머리깎는 비용까지 부담하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굉장히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율법을 필요없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율법에 대한 필요 이상의 열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설득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 네 사람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서 결례를 행하고 자신이 명절이 끝날 때까지 성결의 헌신을 하고 결례를 행했음을 제사장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함으로써 자신이 율법을 누구보다도 존중하는 유대인임을 공식적으로 증명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율법에 열심이었던 예루살렘의 성도들과의 오해와 갈등은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오해와 위기는 그 다음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스스로의 힘과 방법으로는 아얘 해결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헌신의 기간이 끝나는 날, 우연하게도 바울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바울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부터 이미 바울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다른 유대인들을 향해 자신들과 합류하라고 선동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곳곳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여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제는 여기까지 와서 직접 성전을 더럽혔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과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전부였으며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죄목은 이 세가지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 중에서도 성전을 모독한 죄는 로마 당국마저도 유대인들의 즉결처분을 허용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바울이 헬라사람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내에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 안마당까지 들어가게 했다고 지레짐작하고는 바울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성전을 더럽혔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결코 무사히 빠져나갈 수는 없는 상황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은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 로마의 천부장이 와서 그 상황에 개입했고 바울과 군중들을 격리시켜 주었습니다. 천부장은 성난 군중들의 손에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울을 영내로 호위하려고 했지만 군중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없애버리라고 소리치며 따라가는 바람에 바울을 들어 올려서야 영내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던져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정말 엄청난 이적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오해와 비난, 그리고 핍박과 고통만 늘어났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은 점점 흥해 가셨지만, 오히려 바울 자신은 점점 쇠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대충 대충 사역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기 고집대로 사역했다면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제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괜챦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항상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한 부분도 타협하거나 양보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제대로 그리고 정직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괴로워지기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제대로 하면 다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고 호언장담하며 가르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현실이 그렇습니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해도, 정직하게 해도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하니까, 정직하게 하려고 하니까 더 힘들고 어려워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여기 저기서 툭툭 끼어드는 어려움과 방해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경험했던 것이며, 또 우리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바울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숨은 그림 하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은 묵상을 계속할수록 점점 뚜렷해져 갔는데, 그것은 바로 바울을 통해 스며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우리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가장 낮은 삶을 사셨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가 어디가 부족한 사람입니까? 그는 가만히 있었으면 아마도 이스라엘 최고위층이 되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그것을 추구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그가 복음을 믿고 나서는 자신의 영광과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의 유익과 하나됨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까지 달려왔고 야고보와 장로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자신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결코 행할 필요가 없었던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철저히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으셨던 예수님의 성육신과 얼마나 많이 닮아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것과 같은 모함과 위협을 당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가 이스라엘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앞쪽의 것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전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도 동족들을 사랑했고, 율법을 사랑했고, 또 성전에 대해서 폄하하여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것은 억측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을 둘러싼 끊임없는 유언비어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미쳤다, 귀신이 들렸다, 율법을 무시하고 성전을 무시한다... 예수님은 그 분의 선하심과 온전하심과 상관없이 엄청난 모함과 거짓 소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도 똑같은 일을 당합니다. 성전을 모독했다는 모함과 성전을 더럽혔다는 오해 때문에 결국 그는 죽음 일보직전까지 갑니다. 

가장 많이 닮아있는 것은 두 사람을 향한 군중들의 고함소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은 이번에는 바울을 보호하려는 천부장을 향해 “바울을 없애라”고 소리칩니다. 또 두 사람이 이런 모함과 고난을 당한 곳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바울의 삶과 고난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던 가장 온전한 제사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제자도의 의미

임직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직분으로 불릴 수 있고 또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맡은 역할의 이름이지 우리 자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 분의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이름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불리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제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제자도”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제자일까? 진정한 제자도란 무엇일까?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본문이 들려주는 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란 스승처럼 사는 사람이라는 답이었습니다. 제자도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와있고, 제자도에 대한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제자도의 본질은 바로 스승처럼, 스승의 뒤를 좇아서 살아가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에 가장 가까운 설명일 것입니다. 

제자도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의 방식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방식에는 살아가는 방법과 모습 뿐아니라, 그렇게 살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보여주었던 겸손과 거기서 당했던 고난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무엇이든 제대로 하려고 하면 오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을 거울삼아 평가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살려고 하면 분명히 자기이익 때문에 그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그들이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 위험과 장애물들도 만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과 바울이 경험했던 현실이며 또 우리가 사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교회라고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히 달라야 하지만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도 불완전한 사람들, 아직 악함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보면 그런 일들을 완전히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기다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곡해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마련이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남모를 고통과 고민에 빠질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진짜와 가짜를 가늠하는 기준인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가 감당해야 할 짐에 대해서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가 스승을 닮아 있다면 이 세상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접했던 방식대로 제자들을 대접할 것이며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도 오해를 받게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의 방식 뿐만이 아니라 스승의 삶에 따랐던 고난에도 함께 하는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심는 씨앗이 같으니 거두는 열매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제자도의 댓가, 제자도의 영광

임직자 여러분과 회원 여러분께 충심으로 권면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나 혹은 교회생활 속에서나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찾아오는 어려움들이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닮아가시고 또 주님을 닮은 제자로 더 온전하게 빚어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행하면서 그 일을 연습하시고 또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분명히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이 길을 가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크신 팔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멍에를 주님이 함께 메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그 멍에를 쉽고 가볍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힘있는 믿음을 주셔서 그러한 시험들을 너끈히 이기고 더 견고하게 서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자들만이 아는 믿음의 참된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실 것이고, 또 하늘에서 우리를 만나는 그 날 “너는 땅에서 나처럼 살더니 나를 아주 많이 닮았구나”라고 영광스러운 칭찬을 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항상 스스로에게 “그러면 어찌할꼬?”라고 묻고 또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선택하셨고, 그 주님을 닮은 바울이 선택했던 그 방법을 찾아 그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만나는 그 기쁜 날까지 참 제자로 살아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