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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39. 어찌 합당하냐


날짜 : 2011-10-30

본문 : 요나서 4장 1-11절


도입 : 이렇게 열받을 때가

어떤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그 청년이 정말 정말 싫어하는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남자를 싫어했지만 문제는 이 사람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이고 힘도 세서 그 누구도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은 그 부자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자가 바로 이 청년을 직접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여기 이 사과를 옆 마을에 가서 좀 팔아오게. 값은 잘 받아와야 하네.” 생전에 그 부자를 잘되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싫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가 또 무슨 해꼬지를 당하게 될지 덜컥 겁이 났던 것입니다.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엄청난 양의 사과를 달구지에 싣고 그 부자집 문을 나서는 청년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부자에게 화가 났고, 또 비겁한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났습니다. 속으로 몇번이고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그런다고 화난 감정이 누그러지기는 커녕 오히려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습니다. 

투덜대며 달구지를 끌고 걷다보니 벌써 옆 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사과를 팔기가 너무 너무 싫었던 청년은 마지막 자존심을 세워보기로 합니다. 그저 파는 시늉만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은 될 수 있는대로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달구지를 부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얼버무리며 외쳤습니다. “사과 사세... 맛있는 사과... 사과 싸게 드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들리지도 않을만한 작은 소리로, 그리고 최대한 알아듣지 못하도록 얼버무리며 이야기 했는데,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달구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저마다 한 보따리씩 골라 보자기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가격은 거의 묻지도 않고 시세보다 훨씬 더 쳐주고는 종종걸음을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습니다. 

청년은 더더욱 화가 났습니다. 억지로 여기까지 온 것만도 화가나 죽겠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사하는 흉내만 내며 그래도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계획을 세우고 회심을 미소를 지었었는데, 이렇게 대박이 났으니 절대로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 일이 자신을 통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열받은 요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는 꼭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요나는 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그 죄 때문에 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를 정말 말 그대로 무지 무지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을 때, 정말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닐 정도로 싫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에게 벌을 내리시기는 커녕 결국에는 니느웨성 앞에 가져다 놓으셨습니다. 물고기 뱃 속에서 2박 3일 동안 죽을 고생을 하다가 눈을 떠 보니 어느덧 니느웨성 앞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처음에 맡기셨던 일을 맡기십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면 니느웨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요나는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디로 피하든 다시 제자리로 오게 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메시지를 전하면 분명히 니느웨는 회개할 것이며 그러면 니느웨를 향해 준비되어 있던 하나님의 징벌이 취소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되 절대로 니느웨가 회개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그저 시늉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는 꽤 큰 성읍이기 때문에 걸어서 그 성을 통과하려면 꼬박 3일 밤낮이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성 전체가 아니라 그저 하루 동안만 돌아다닙니다. 3장 4절을 보면 그가 전한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는 한 마디 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성읍 전체에 전한 것도 아니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한 것도 아닌데 니느웨성 전체가 심지어는 가축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하면서 회개에 돌입한 것입니다. 그것도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던 모든 악한 행동을 돌이키면서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어 들이셨습니다. 

요나는 극도로 열을 받았습니다. 정말 정말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어서 그것도 흉내만 내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가 되는 마음으로 그저 몇 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외친 것 뿐인데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보기 힘든 대대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그 결과 당연히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 망해버려야 하는 니느웨가 다시 건재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것보다 열받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광경을 지키보면서 하나님께 투덜거립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기 오기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이 도성을 이렇게 또 용서하시고 넘어가실 줄 알았습니다. 니느웨가 다시 떵떵거리고 사는 꼴을 보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을 들으시고는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요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니느웨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동쪽 언덕에 초막 하나를 짓고 니느웨를 향해 돌아 앉아 버립니다. 그는 여전히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식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아서는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망하는 꼴을 보겠다고 하나님으로 부터 돌아 앉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앉은 요나의 머리위로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안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박처럼 잎사귀가 넓은 식물 하나를 속성으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금새 다 자라난 그 식물의 그림자는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습니다. 요나는 이 그늘 속에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 식물은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했지만 요나를 제대로 가르치려는 하나님의 시청각 교재이기도 했습니다. 밤이 찾아왔고 그래서 요나가 자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벌래 한 마리를 보내셔서 밤새 그 식물을 모두 먹어치우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해가 뜨는 시간에 딱 맞춰서 뜨거운 동풍이 불게 하셨습니다. 위에서는 해가 쨍쨍합니다. 계속해서 뜨거운 동풍이 불어옵니다. 계속 고집을 부리고 앉아있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요나는 더더욱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다시 하나님께 구합니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이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래? 그럼 죽여주지.”라고 대답하시는 대신에 또 다시 질문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해서 이렇게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합당하구 말구요. 지금 저 화가 나서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네가 수고한 것도 없고 기르지도 않았고 그저 하룻 밤 사이에 났다가 시들어 버리는 이 박넝쿨 때문에 네가 이렇게 화를 낼만큼 이 박넝쿨을 아꼈다면 말이다. 내가 이 성 안에 있는 십 이만명이 넘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과 가축들을 아까워하는 것이 과하다고 하겠느냐? 나는 그것들을 아끼면 안되겠느냐?” 이것이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서는 바로 이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의미

‘요나’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건 ‘요놈의 나’라는 말의 준말이라는 농담비슷한 대답이 주어지곤 했습니다. 그 만큼 요나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의 감정적인 호불호를 넘어서지 못한 못나고 좁은 자아를 가진 성도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대표한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나를 읽을 때는 기가 막혀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새어나오게 됩니다. ‘요놈의 나’가 ‘이놈의 나’와 닮은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의아해 질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였던 요나가 정말 그렇게까지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도 결국 인간이고 보면 까딱 잘못하여 삐딱선을 타면 얼마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나를 닮은 감정과 사고방식들은 거듭나야 하고 변화되어져 가야 하는 부분이지 정당화하고 당연하게 여겨야 할 부분들이 아닙니다. 

오늘은 본문과 요나서 전체를 살펴보면서 왜 요나에게는 이런 일그러진 모습이 있었는지,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요나를 닮은 부분을 처리해 나가고 또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알게 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나서 속을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

요나서 안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큰 물줄기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물줄기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나라든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각자의 번영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나라들과 그 나라의 백성들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느 나라든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할만큼 어린아이들과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존재들은 특히 더 아끼십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심판은 뒤로 미루시고 또 미루십니다. 어떻게든 용서하시고 봐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화내시고 함부로 벌을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움직이시는 순간은 마지막 순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계속 존재하는 것보다는 멸망하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여기실만큼 그들이 구제불능의 악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때 움직이십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멸망이라는 징벌이 주어질 때는 바로 그 때입니다. 그 전에 돌이킨다면 언제든지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니느웨 사건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악한 나라 니느웨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려고 한 사람의 선지자 요나를 택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회개의 메세지를 전하기 싫어서 그야 말로 요리 조리 도망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시고 그런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에 구원의 메세지가 전해지게 하십니다. 요나는 형식적으로 흉내만 내지만 요나의 그런 형편없는 사역을 통해서 니느웨가 대대적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결국 그들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요나가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함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였지만 그런 니느웨를 향해서도 끝까지 이런 성품으로 대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니느웨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 모든 나라, 모든 피조물들을 향해 이런 성품으로 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시고, 의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죄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이 바로 요나서를 흐르는 가장 커다란 물줄기입니다. 

또 하나의 물줄기는 바로 요나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셔서 니느웨로 보내실 때, 요나가 그런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요나 안에 있는 니느웨를 향한 미움과 분노를 모르셨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요나를 택하셨을까요? 왜 그 중요한 일을 그 일을 정말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그 일을 맡기셨을까요? 그 이유는 요나가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그런 부족하고 편협한 인물됨이 하나님께서 요나를 선택하신 가장 큰 이유가 된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로 부름받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의 울타리, 그리고 악인들은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의이며 그것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틀에서 본다면 니느웨야 말로 멸망대상 1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에게 이 껄끄러운 일을 맡기시고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 과정을 통해서 요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나의 이중성

요나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행하셨던 일과 그 일에 대한 요나의 반응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으시고 다시 그를 살리셨을 때, 성경은 요나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동편에서 뜨거운 햇빛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요나를 걱정하셔서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그늘을 드리워 주셨을 때, 성경은 요나가 그 일을 ‘심히’ 정확하게 표현하면 ‘극도로’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물고기로 요나를 살리신 것도, 햇빛 때문에 거의 쓰러지게 된 요나를 위해 그늘을 주신 것도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다 하나의 ‘작은 구원’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가장 심각한 불순종과 반항의 순간에 주어진 무조건적인 은혜 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와 기쁨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킨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차라리 니느웨가 잘 되는 것을 보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까지 이야기하며 불쾌한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하루 낮동안 그늘을 제공해 주었던 박넝쿨이 시들자 그것이 아까워서 전과 똑같은 말로 불평하며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죄없는 아이들과 가축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박넝쿨이 망한 것은 아까워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일그러진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 안에서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신앙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와 구원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에 대해서는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중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정의’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하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인데, 사람이 이 틀을 넘어선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날 이 본문을 가지고 조장모임을 하는데, 모 조장께서 “제 멋대로 악하게 살다가 죽기 일보직전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지는 않지만 많이 억울한게 사실이다”라고 하셨는데 너무 솔직한 말씀이셔서 모두가 박장대소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악인이 받고 있는 그런 은혜가 필요없거나 혹은 그 은혜 속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우리도 우리가 불쾌해 하는 그 은혜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나는 그렇게 큰 죄를 짓고 악하게만 살던 니느웨 사람들이 당장 망해버리지 않고 또 다시 은혜의 기회를 얻는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불쾌해 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나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까지 오면서 자신이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항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신 또한 니느웨 사람들이 받은 그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요나는 자신의 작은 구원에 대해서는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 하면서도 니느웨에 베푸시는 큰 구원에 대해서는 반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큰 성의 모든 사람들이 망하고 죽는 것은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여기면서도 박넝쿨이 망하는 것은 너무나 아까워 하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얼마나 쉽게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되는지 모릅니다.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나의 엄청난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여전히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로 인해 얼마나 겸손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성도는 자신을 그저 ㅐ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약해지고 사라집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요나처럼 그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기는 하지만 이미 내 생각 속에서의 나는 은혜 받을만한 자리로 옮겨온 사람입니다. 그렇게 저 밖에 있는 죄인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때는 즐거워 하면서도 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일한 은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이런 감정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 없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믿고 하나님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삶은 크고 작은 죄와 불순종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악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 원리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은혜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 악인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하고 악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덕분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정당한 사고방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나를 보는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누리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리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나도 본질적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분에 넘치는 은혜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며 지금도 그러한 은혜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이런 마음은 더 깊고 진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요나가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셨던 질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요나에게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셨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합당하다는 말은 단순히 상황에 적합하다는 뜻이나 그럴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일치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는 것은 적절하고 질서잡혀있고 덕스럽고 제자리에 있고 아름답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하는 질문은 요나가 성을 내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선한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나는 이 질문을 받고도 대답도 하지 않고, 대답을 하더라도 고집만 부립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이 질문이야 말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질문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요나의 잘못은 얼마든지 우리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악인은 벌을 받아야지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인이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고,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과 더불어 그 너머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도 소중히 여기시지만 그것 보다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생각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선한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물론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를 묻고 옳은 것을 따르는 것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한 가지를 더 질문하고 답해야 하며 그 답을 따라야 합니다. 니느웨가 엄청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니느웨는 망해야 합니다. 니느웨가 복을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 질문이 무엇이 옳으냐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만이 정답이 될 것입니다. 이 정답대로 되지 않는 것은 불의한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분노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질문이 달라지면 답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냐하는 것이 질문이 되면 답이 달라집니다. 니느웨가 벌을 받고 망해버리는 것은 옳은 일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선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니느웨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 적어도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선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정당하냐를 묻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선하고 아름다우냐 하고 말입니다. 첫번 대답이 이 질문의 대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번 더 답을 찾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답은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유익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가장 선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까이 가자

내가 항상 믿는 자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똑같이 필요로 하고 있고 또 그 은혜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찌 합당하냐?’하고 ‘그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냐?’하고 말입니다.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극악한 죄 속에 있었던 니느웨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계속 어긋나가고 반항하기만 했던 일그러진 요나를 설득해 가셨던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 두 가지 일에 힘쓴다면 우리의 존재와 삶은 날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변화되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풍성한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