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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43.네 형은 사마리아요


날짜 : 2011-11-27

본문 : 에스겔 16장 35-52절


도입 : 정체성에 대하여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정체성’이라고 번역되는 말인데요, 어떤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아이덴티티가 분명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신분이나 위치, 그리고 행동 등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을 확실히 구분짓는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답다’라든지 혹은 ‘...답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말하는 우리 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아이덴티티가 분명하다 말의 참된 의미는 자신의 신분과 위치, 그리고 삶과 존재에 대한 바르고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의 구분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긍정적인 면에서 말이죠. 그래서 ‘도둑놈으로서의 정체성’, ‘사기꾼으로서의 정체성’, ‘폭력배로서의 정체성’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넌센스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그래서 욕을 먹고 비난을 받는 것은 모두가 다 이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바르고 분명한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니까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에 쓴 열매를 만들어 내면서 살아가게 되고 그것 때문에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신분과 위치, 직분에 대한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애쓴다면 적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아픔과 슬픔, 경멸과 분노는 그 수위가 굉장히 낮아질 것이고 서로가 욕하고 또 욕을 먹는 이런 일들 또한 굉장히 줄어들 것입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이 아이덴티티와 관련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이덴티티라는 것이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해도 그것을 만들어 주는 것은 사회나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덴티티와 관련해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도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냈거나 혹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아이덴티티가 하늘로 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덴티티와 관련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지 않는 짐을 하나 더 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만 욕을 먹고, 사람들 앞에서만 책임을 지면 되지만,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평가를 받고 책임을 져야 하며, 실제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이 아이덴티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많이, 그리고 더 심하게 욕을 먹는 경우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도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이덴티티는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선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망쳐 놓았을 때는 그만큼의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정체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나라나 민족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 선하심과 풍성하심으로부터 직접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만군의 하나님께서 직접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을 것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직접 싸우지 않아도 엄청난 적들이 일순간에 격퇴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특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삼으시고, 그들의 남편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탯줄도 제대로 자르지 않은 채로 핏덩이로 버려진 유기된 아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극진하게 양육하셨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그 수치와 흠을 하나님의 옷으로 입혀 주셔서 오히려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셨으며, 언약과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아내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고, 또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에게만 내어 주셨습니다. 또 온갖 보석들로 치장하시고, 가장 기름진 음식을 먹여주셔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드셨고 왕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황후로 만드셔서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귀하고 복된 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만들어 낸 은혜였습니다. 생명을 주신 것도, 양육하시고 보호하신 것도, 하나님의 황후로 삼으신 것도, 가장 존귀하고 복된 자리를 주신 것도, 그래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신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황후라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한 아내가 한 남편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전도 부요함도 그리고 만족함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자신의 자신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고귀함과 복됨,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였고, 또 아이덴티티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나라들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황후가 되어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든든하고 풍성하며 또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보여 주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양육하시고 귀하고 아름답게 만드시고 남편이 되어주시고, 그렇게 그들의 모든 것이 되어주신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자리에 오른 이스라엘은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가 주는 부유함과 자유, 그리고 사람들의 사랑은 누리면서도 마음에 드는 다른 남자들을 꼬셔서 그들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강하고 힘 세어 보이는 외간남자들을 불러들여서 그들에게 돈을 주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음행’이라는 말을 보면 ‘우상숭배’만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의 음행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항상 어딘엔가는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 아니면 주변의 강대국들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의 매번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을 선택했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외간남자를 선택한 것이죠. 그 이유는 하나님은 너무나 자유로운, 그 어디에도 묶이는 분이 아니셨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자유로우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했고 또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불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항상 더 쉽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의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거의 매번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변의 강대국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내 주어야 합니다. 바로 재물과 영적인 순결함이었습니다. 강대국의 그늘에 있으려면 항상 돈이 들어갑니다.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보호해 주려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대국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은 그 나라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약소국인 이스라엘은 그 나라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먼저 나서서 이방신들을 섬겨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이중의 부정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나라들의 힘에 의지하는 간음을 범합니다. 그리고 그러느라고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들을 신으로 섬기는 간음도 저지르게 됩니다. 이런 행동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몸을 파는 여인의 행위보다도 훨씬 더 악하고 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을 파는 것은 그래도 생계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많은 돈을 지불해 가면서 외간남자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의 의미

남편인 하나님,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고 귀하게 만들어 자신의 아내로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가만히 내버려두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남편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하면 ‘사랑’을 떠 올립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무조건 선대하시는 항상 웃고 계시기만 하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사랑도 결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굉장히 오래 참고 굉장히 오래 기다리시지만 그러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밝고 아름다우며 행복하기만한 그런 사랑이 되려면 그 사랑 안에는 항상 서로간의 ‘신뢰’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 신뢰야 말로 부부간의 사랑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 신뢰가 깨어졌을 때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하는 능력의 크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부부간의 사랑과 관계가 깨어지는 속도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인내가 극에 다다르면 세상없는 부부일지라도 상대방을 향해 질투하고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신다는 말의 의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언약’을 통해서 부부가 된 그런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도 항상 서로를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 신뢰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행복하고 즐거우며 풍성한 사랑으로 남아있게 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뢰’가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심각하게 깨어지면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 형태가 바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분노와 투기”라는 단어입니다. 성도들 중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질투하시고 분노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황스러워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건 유치한 감정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그 반대가 정말 웃기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바람을 피워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리 신뢰를 깨뜨려도 다 이해하고 용서합니까? 이런 것을 부부지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질투로 바뀌고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내로서 있어야 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 그런 일이 반복될 때는 어느 순간엔가는 그렇게 바뀌어 버리는 그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 그러니까 그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그런 종류의 독점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어떤 한 가지 금지된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에 기초한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결혼관계를 더럽히고 그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거기서 우리의 만족과 안전을 찾으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금지사항을 어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금지된 법을 어긴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 일을 통해서 깨어지는 것은 법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뢰이며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항상 ‘음행’이라고 ‘음란한 행동’이라고 여인이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나쁜 행동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하여... 언제? 누구와?

여기서 잠깐 오늘 본문에 우상숭배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어서 잠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굉장히 짧은 이 구절 속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이 구절 속에 들어있는 첫번째 교훈은 우리가 언제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앞쪽에 나와있는 ‘누추한 것’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짧은 어구 속에서 우상숭배는 어떤 행동인가? 우리는 언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상숭배란 우리 속에 있는 욕망을 다스리지 않고 그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 생겨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스려지지 않은 욕망, 함부로 쏟아놓는 욕심은 반드시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통제하거나 다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쏟아놓을 때, 그 욕심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바로 거기서 영적인 외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교훈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고 그것을 남편인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가져다 놓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36절로 돌아가 보면 거기에는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정든 자’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사랑하는 자’를 말합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애인’을 말합니다. 요즘은 ‘애인’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애인은 주로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든 자’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애인’을 말합니다. 사랑하면 안되는데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왜 영적인 외도와 탈선에 빠집니까? 그것은 그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의 동기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 그래도 순수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의 사랑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이란 그 동기가 바로 자신의 만족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항상 그 사랑의 대상이나 혹은 적어도 그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서 얻는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만족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괴롭고 힘들기만 한데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진실로 섬기는 대상, 영적인 남편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후가 된다는 것의 의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내, 영원한 왕의 황후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욕심을 다스리지 못했고,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남편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장 높고 고귀한 곳에서 가장 낮고 추한 자리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왕후의 자리에서 간부의 자리로, 음녀의 자리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저 자기 자신만 망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의 영향은 주변의 나라들로 번져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산 위에 지어진 동네고 등경 위에 놓여진 등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제자들은 “드러나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잘 드러나는 것이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는 그리고 성도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일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산 위에 지어진 이유이고 등경 위에 놓여진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피덩이로 버려진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양육하셔서 가장 귀하고 복된 자리, 하나님의 왕후의 자리에 앉히신 것은 물론 이스라엘 자신이 그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하나님을 섬기며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만족스러운 것인지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이방인들을 위한 시청각 교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주변의 나라들보다 훨씬 더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창녀보다도 못한 돈을 주고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간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네하고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 나라들이 저지른 죄들, 그리고 주변의 이방나라들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정죄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보다 가증스러운 일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뭐 뭍은 개가 뭐뭍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나라들 중에서 가장 악하다고 할 수 있는 소돔과 사마리아도 이스라엘에 비하면 오히려 깨끗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그들이 의롭게 여겨지고 그들이 깨끗하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맡기시는 소명은 항상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사는 일은 어둠에게 비추어서 어둠이 어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꼭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성도답게 살아가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더러움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이 강하면 뉘우치고 돌이키게 되기도 합니다. 소금으로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소금은 소금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을 맛이 있는 음식 적어도 먹을만한 음식으로 바꿔놓습니다. 썩을 수 밖에 없는 것에 들어가서 그것을 썩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만약 빛이 어둠보다 더 어둡다면, 소금이 아얘 맛이 없다면, 그리고 그 소금이 더해질 때 오히려 음식이 더 빨리 부패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비교해 볼 대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렇게 망가진 빛과 소금을 보면서 자신들이 빛보다 더 밝고, 소금보다 더 짜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그 빛과 소금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게 되고 계속해서 어둠과 부패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머물러 있게 됩니다. 

결론 : 항상 그 분의 신부로 살자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의 신부답게 살아가는 일은 우리 개인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움과 신실함을 지키는 일이며, 우리의 존귀함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그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며, 이 세상이 맛이 나는 세상이 되게 하고, 냄새가 덜 나는 세상이 되게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순결함에 대한 소명은 항상 이 두 가지 차원을 함께  지닌 일입니다. 

중요한 역할은 그 역할이 중요한 만큼 제대로 행해지지 않을 때, 역효과와 부정적인 파장이 더 크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책임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소명은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한 소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왕후가 되어서 그 분의 은혜와 선하심을 드러내며, 그 복과 영광을 드러내며 순결하게 살아가는 다른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은 그 어떤 부르심보다도 영광스럽고 고귀하며 세상을 위해서도 중요하기 그지없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엄청난 징계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은혜와 복, 그리고 고귀함이 그만큼 귀하고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주신 소명이 그렇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크신 은혜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되어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특권이 있고 복이 있기에 행해야 할 책임과 지켜야 할 자리가 있는 그런 삶 말입니다. 

항상 내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복되고 존귀한 하나님의 황후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욕망을 다스리시고, 다른 것들로 향하는 나의 사랑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하셔서 하나님 오시는 그 날,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가장 복된 신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